두 해쯤 전에 나는 우리 동네에 커피 마실 수 있는 집이 없는 걸 아쉬워했다. 같이 걷는 아내에게 이 거리에 누가 커피집을 내면 좋을 텐데, 하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1년가량 외국에 나갔다가 작년 7월에 돌아와 보니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음식점이 있던 자리에 대형 브랜드의 커피전문점 간판이 걸려 있고, 새로 지은 건물마다 커피집이 들어와 있는가 하면 크고 작은 커피집이 골목 안쪽까지 생겨나 있었다.

그때는 하나도 없어 아쉬웠는데 지금은 내 산책 코스에만 스무 개쯤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1년 사이에 그렇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우리나라 커피 시장 규모가 3조원이나 되고,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기면 커피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한다는 보도를 최근에 접했다. 잘살게 되었다는 표시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겠다. 단순히 소득 증가가 이유일까?

커피전문점에 앉아 노트북을 켜놓고 일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노트북을 비롯한 휴대용 디지털 기기 보급이 소득 증가 못지않은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휴대용 물감의 출현이 인상파 화가들을 탄생시킨 것과 유사한 현상이 휴대하기 좋은 컴퓨터 보급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가 있는 곳이 곧 사무실이고 도서관인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제 사무실과 도서관은 한 곳에 붙박여 있지 않고 여기저기로 이동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호모 노마드가 현대인의 이름이다.

혼자 와서 커피를 시켜놓고 오래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만지는 것이 몇 년 전에는 어색하고 눈치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배려한다는 인상까지 풍긴다.

같이 와서 따로 책을 읽고 각자 스마트폰을 만지는 모습도 낯선 풍경이 아니다. 전에는 한 공간에 있으면 같이 있는 것이었다. 같이 있다는 것은 같은 공간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공간에 있다고 해서 꼭 같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따로 있고 다른 공간에 있으면서도 같이 있는 것이 가능하다. 가령 같은 공간에 있는 두 사람이 다른 사이트에 접속하거나 다른 공간에 있는 두 사람이 같은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공간이 더 이상 공감과 소통의 근거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직접적으로 소수와 깊숙이 관계 맺는 것보다는 간접적으로 다수와 얕게 관계 맺는 걸 선호하는 이들, 고립은 싫지만 몰두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오늘날 커피전문점은 맞춤하다. 더불어 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인 것이다. 바람직한 변화라고 환영할 이유는 없지만 거부하고 부정해야 할 현상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세상은 변하고, 변화된 세상은 변화된 삶의 방식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유목민들은 자기 공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공간에 고립ㆍ몰두해 있는 것을 피해서 밖으로 나온다. 너무 조용하면 오히려 공부가 안 된다고 학생들을 말한다. 어떤 교수는 연구실이 아니라 시끄러운 거리를 걸으며 논문 구상을 한다고 말했다. 노트북을 들고 이 커피집 저 커피집 옮겨다니며 글을 쓴다는 소설가는 꽤 많다. 나 역시 그런 소설가들 가운데 한 명이다. 최근 여러 편의 내 소설들은 우리 동네 여러 커피전문점에서 태어났다.

한 자리에 모여서 예술과 삶과 철학을 이야기하던 프랑스 살롱이나 1950년대 명동 다방 같은 분위기가 그리울 때도 있긴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커피전문점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풍속도에 대한 기대가 생기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요컨대 살롱이나 명동 다방들이 그랬던 것처럼 커피전문점이 그저 커피를 마시러 가는 집은 아닌 것이다. 커피 맛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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