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큰 별’이 졌다. 그는 누구인가.

청재 강수의(靑齋 姜守義) 선생이다.

▶1917년 장성에서 태어남. 스물 한 살 때 장흥 정착 ▶1937년 백양사진관 개업. 장흥 사진업 선도 ▶1956년 백양가정양재학원 열어 생활기술 보급 ▶1960년부터 11년간 삼애원장 역임, 사회봉사활동 추진 ▶1969년부터 15년간 장흥사진협회장 역임, 사진예술활성화 주력 ▶1979년부터 7년간 새마을문고 장흥지부장 역임, 독서진흥 주력 ▶1979년부터 제3대-제6대 장흥문화원장 연임, 열정적으로 장흥뿌리찾기, 향토사 연구, 문화진흥 사업 매진 ▶1988년부터-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 활동 ▶1991년 5월 1일 향토사 업적으로 장흥군민상(교육문화상) 수상 ▶1995년 최초 사진향토지 ‘사진으로 본 장흥 100년사’ 발간 ▶2009년 평생 쓴 향토사 관련 글을 모은 향토학문집 <향토학 백년 현장에서>-후학들이 간행 ▶이밖에 보림사복원추진위원, 전남 개도 100년 사진지 편찬위원, 법무부 갱생교화위원, 장원봉 유래비건립추진위원장 등 역임. 최근까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광주민학회 회원, 장흥학당 회원, 장흥문화원 고문으로 활동….

이상은 지난 27일, 향년 95세의 일기로 별세한 청재 선생의 주요 약력이다.

위 약력에서는 크게 돋보일 것이 없다고 여겨질 지 모르지만, 선생의 몇 자 안 되는 이 약력으로 표현한 글귀의 그 자간과 행간에 ‘筆로는 다 표현 할 수 없는 意味’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청재는 장흥 근현대사에서 ‘큰 별’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장흥의 근 현대사인 1백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그 많고 많은 장흥인 들 중에 청재선생 만큼 장흥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몇 년 전 소설가 이청준 선생 같은 ‘문학적 위인’이 작고했지만, 이청준 선생은 엄밀히 말해 장흥출신이었을 뿐 장흥에서 살다 간 사람은 아니다. 해서 필자는 장흥의 땅에서 숨 쉬며 장흥의 산하, 장흥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는 그 애환을 함께하며 큰 족적을 남긴 사람으로서 청재 선생을 크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어, ‘장흥의 큰 별’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장흥인 중 한 두 권의 책을 펴낸 사람은 적지 않다. 자서전이건 수필집이건 시집이건 적잖은 사람들이 책을 펴냈다. 그런데 근현대사의 그 많은 저서 중에, 1세기가 지난 뒤에도 ‘장흥의 서적’으로 가치가 있는 책이 과연 몇 권이나 될까. 이점에서 청재가 펴낸 ‘사진으로 본 장흥 100년사’와 그 후학들이 헌정해 펴낸 ‘향토학 백년 현장에서’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 두 권 다 장흥의 근현대사를 아우르고 있으며 특히 20세기 장흥의 흔적을 고스란히 고찰해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거의 한 평생을 ‘카메라 앵글의 눈을 빌려 향토역사를 순례해 온 ’문화기록 작가’였던 강수의 선생.
청재 선생은 대해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굳이 청재 선생을 말한다면, 앞에서 지적한 그 두 책이 바로 청재선생의 모든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청재 선생은 생전에 ‘사진으로 본 장흥 100년사’ 이후의 또 하나의 장흥 화보집 발간을 간절히 바랬다. 필자에게도 수차례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끝내 ‘사진으로 본 장흥 100년사’ 이후의 장흥 화보집은 발간되지 못했고, 그가 소장한 사진 자료들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어지고 말았다.

그 후 몇몇 후인들이 선생의 글과 활동내용, 사진들을 종합한 ‘향토학 백년 현장에서’를 발간, 헌정해 선생의 그 쓰라린 마음을 달래기는 했다.

선생은, 건강이 악화되기 전인 3,4년만 해도 왕성하게 활동했던 ‘장흥의 청년’ 이었다. 필자가 장흥에 내려와 정착한 이후, 가끔씩 지역의 어르신들과 술자리를 하곤 했는데, 그 중 에 필자와 가장 많은 술자리를 한 분은 바로 강수의 선생이었다.

주로 터미널 부근 음식점에서 돼지고기 한두 점 안주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많은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지난 해만 해도 두어 차례 필자와 함께 관산읍 모 식당에서 위황량, 조성호 선생과 함께 식사를 하며 소주 한 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선생의 의식은 때론 필자보다 젊고 참신했다. 장흥에서 근현대사를 관통해 온 장흥문화의 기수답게 그의 문화적 식견에는 비전이 넘쳐흘렀다.

그만큼 선생은 ‘청년정신’을 마지막까지 가슴에 담고 있었다.

3,4년 전인가, 어느 날은 ‘장흥에 박물관이 세워져야 한다’ 는 장문의 기고문을 가져와 신문에 게재되길 부탁했지만, 원고량이 너무 방대해 게재하지 못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선생은 또 수년전 까지만 해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전국 향토사연구모임에 매 회마다 꼬박꼬박 참석할 정도였다.

선생은 인생을 불사르기 바로 직전까지 열정적인 ‘장흥 문화청년’으로 살다 갔다.

그는 생사를 초월한 ‘장흥의 큰 별’이었다. 청년시절에 장흥으로 내려와 장흥에 정착한 외지인이었지만, 장흥사람 누구보다 장흥을 사랑한 장흥사람이었고, 장흥의 산하를 그리워하며, 앵글로 장흥의 모든 흔적을 담아내며 장흥의 근현대사를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장흥의 인문학사에 ‘강수의’라는 큰 족적을 남긴, ‘장흥의 위대한 별’이었다.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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