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사’라 불렸던, 장흥 ‘예양서원’에는 ‘목은 이색, 추강 남효온, 영천 신잠, 월봉 김광원, 천방 유호인’ 다섯 분 선생이 모셔져 있다. 그간에는 그 배향된 몇 선비분들 행적이 잘 알려지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다만, 영천 선생은 ‘관산록’을 통해 그때 사정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천방 선생은 ‘장흥문화 제10호(1987)’에 그 ‘행록’이 소개된 것 말고는 없었다. ‘장흥읍지·정묘지(1747)’에 기록된 내용마저도 우리들은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월봉 선생도 ‘장흥문집해제’에 소략하게 언급된 정도인데 그 남아있는 자료만이라도 그 국역이 아쉽다.)
먼저 천방 유호인天放 劉好仁(1502~1584)선생의 ‘천방유집’과 ‘장흥읍지·정묘지’에 수록된 ‘소시梳詩’부터 소개한다. 문림장흥의 전통적 역량을 다시 한 번 드높혀 준다.

梳(빗)
목소소료죽소소木梳梳了竹梳梳/난발초분슬자제亂髮初分蝨自除/안득대소천만척安得大梳天萬尺/진소검수슬무여盡梳黔首蝨無餘(그 출처되는 판본에 따라 그 원문시어가 조금씩 다르게 되어있다.)
-얼레빗질 끝나면 참빗질/헝크러진亂 머리 가지런해지고 이는 절로 없어지네/어찌하면 천만척尺이나 되는 큰 빗을 얻어서/백성들 속에 들끓는 이떼들을 없이할꼬(김석회 역)
-나무 빗으로 빗고 또 대나무 빗으로 빗어/짧은短 머리 처음 나뉘어지니 이는 절로 없어지네/어디서 길이가 천만 길丈이나 되는 빗을 얻어다가/백성들의 머리 한 번一 빗어 남김없이 이를 없앨까(윤호진 역)
크나큰 대빗질을 하여 백성(검수, 黔首)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없애버리자는 우의愚意가 깃든 작품이다.

‘소시’는 허균의 ‘학산송담, 성수시화, 국조시산’과 남용익의 ‘기아’, 장지연의 ‘대동시선’등에 평가받아 왔음에도 그간에는 그 ‘소시’ 작자를 제대로 모른데서 ‘무명씨, 실명씨, 유호인(兪好仁. 1445~1494)’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극기·천방·산당 유호인劉好仁’과 ‘뇌계 유호인兪好仁’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허균이 가려 뽑은 조선시대 한시, 3’라는 전문학계의 ‘허균시평집’ 번역서(1999)마저도 예전의 잘못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존재 위백규 선생이 ‘소시변’에서 전제하였듯이 ‘천방 유호인 선생’이 그 작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서 존재 선생의 ‘소시변梳詩辨’을 소개한다. 아마 존재 선생의 비판적 현실인식에 비추어 천방 선생의 ‘소시’야말로 더 할나위 없이 훌륭했으리라.

“아아, 이 빗을 읊은 한 절이 운어韻語도 천성天成이요 의치意致도 구족俱足하도다. ‘시집백수詩集白首’가운데서 더욱 기절奇絶하니, 사람들 입에 즐겨 오르내려 전파되어 암송되기를 이제에 이르렀다. 혹자는 이르기를 무명씨라고 하고 (남제학南提學 용익龍翼은 ‘청구풍아’에 이 시를 끌어 들이고 무명씨라고 일렀다) 혹자는 유뢰계兪?溪라고 인지認知하고 있다. 대개 이 시집은 반곡盤谷 정공丁公이 스승의 삼석三席에서 집록輯錄하여 직접 수서手書하여 그 후손에게 남긴 것이니, 천방 선생이 지으신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바다와 산으로 막힌 거친 벽지僻地에 문호門戶가 쓸쓸할 정도로 가난하니, 한번 잘린 화초도 오히려 보존치 못하거든, 이미 평천平泉의 성주석醒酒石이 되어버렸으니, 어느 정황에 선생의 자리 위에 있는 아름다운 옥돌을 뉘 있어 즐겨 백형이라 묻고 연성지가連城之價를 놓겠는가!
선비의 불우함이 예로부터 위와 같으니 후인은 이를 읽고서 반드시 거문고 줄을 끊고 길이 탄식함이 있으리로다.”
(참고문헌,‘장흥문화 제10호, 김석회 교수의 역문, 윤호진 교수의 논문’등을 종합하였다.)

한편 김 교수는 ‘삼석수서三席手書’라고 묶어 버린 데서 달리 판단하게 되었다고 본다. 윤교수의 지적대로, 또한 장흥문화 제10호처럼 ‘삼석’과 ‘수서’를 떼어서 옮겨야 한다. 그래야 원작자 착오가 안 생긴다.
한편 윤교수는 ‘삼석三席’을 ‘스승’의 뜻으로 해석하였으나, 그 보다는 ‘스승의 수제자(二席,왼편)에 못 미치는 가까운 애제자로서 三席(오른편)’정도의 ‘겸사’로 짐작한다. (그런데 존재 선생이 예시한 ‘남용익의 청구풍아’는 ‘남용익의 기아’가 옳다.)

그런데 김교수가 비록 ‘삼석수서’를 한데 묶어 본데서 ‘반곡 정경달 선생’을 그 원작자로 지목하긴 했으나, 일반인들에게 ‘소시변’을 널리 환기시키면서 ‘소시’와 ‘소시변’을 의미있게 전파해준 김석회 교수의 저서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간에 오도된 ‘소시 작자설’을 꼼꼼히 되짚어보며, 현지기록을 보지 않고서도 ‘천방 유호인 작자설’로 이끌어 낸 윤호진 교수의 공을 치하드리지 않을 수 없다. 장흥지방에서야 잘 알려진 사실로 반곡 정경달(1542~1662)선생은 바로 천방선생의 제자였다. 또한 ‘소시’는 ‘장흥읍지·정묘지’와 ‘천방유집’에 확인되듯 천방 선생이 쓰신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 부분 사정을 우리 장흥사람들은 여태껏 바깥에 제대로 말하지 못해왔다. 장흥문화 제10호는 존재 선생의 ‘소시변’을 ‘영소詠梳시에 대한 변론’이라고 옮기고는 있었으나, 정작 ‘梳詩’ 원문을 제시하지 못하는 등 그 원시의 존재나 중요성을 알아채지 못한 점에 그 한계가 있었다.

이제 ‘소시’ ‘소시변’를 보건대, 천방 선생이 “왜 장흥예양서원에 의리와 절개의 선비로 모셔졌는지” 그 까닭을 충분히 알 것 같다. 천방 선생은 학문과 지조의 현자였다.
‘진사’에 합격한 후로는 과거를 버리고 은거한 채 장흥사자산 기슭 연하동에서 이학과 후진 양성에만 매진하셨다. 두 번에 걸쳐 참봉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끝내 나아가지 아니했다. 나중에 예양서원에 추배할 때 우암 송시열은 “오직 천방공은 정학을 이어받으신 분”이라고 그 축문에서 말하였다. 신장 8,9척에 수염이 2척이었다 한다.
장흥문화의 소개내용에 따르면, ‘풍암 문위세, 죽곡 임회, 옥봉 백광훈’은 ‘선생종유록’에, ‘청영정 문희개, 청계 위덕의’는 ‘선생문인록’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옥봉 백광훈 선생은 ‘옥봉집’에 다음 시를 남겨 두셨다. (장흥읍지·정묘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연하동방유상사불우烟霞洞訪劉上舍不遇-연하동의‘유상사’를 찾았다가 만나지 못하고(名 好仁)/홍엽비비벽동음紅葉飛飛碧洞陰-붉은 잎새 날고 나는 푸른 골은 그늘지고/시문불엄석양심柴門不俺夕陽深-사립문 열어둔 채 석양 노을 깊어라/심진하처귀래만尋眞何處歸來晩-어느 곳 참을 찾아 돌아옴이 늦은고/만벽청시객자음滿壁淸詩客自吟-벽 가득한 맑은 시를 나그네가 읊조린다.(조달순 역)

천방 선생은 ‘장성 송계서원’에도 배향되어 있다.
그의 글은 ‘천방유집’에 정리되어있다. ‘금,수,곤충,꽃,채소,나무,풀,과실,복식,문방구’등을 유니크하게 노래하였다. 선생의 한시들이 하루 빨리 국역되기를 염원해 본다.
그리고 ‘소시변’을 논증하면서, 같은 고을의 선학, 천방 선생의 의로움과 불우함을 늦게나마 달래주신 존재 위백규 선생을 다시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 선생은 그 뿐만 아니었다. 장흥에 우거한 ‘노홍 (관산땅에 남겨진 ’당포앞바다승첩도‘를 받으신 분)’까지 포함하여 ‘천방유집후서’를 비롯하여 ‘잊혀진 장흥지역 선비들’에 대한 ‘행장, 발문, 묘표, 후서’등을 도맡아 쓰셨다. ‘書노부정공행장후, 서곡임공묘표, 죽곡임공묘표, 처사양공(억주)행장, 송정김공행장’ 등이다.

이번 기회에 ‘예양서원에 합벽된 다섯분 선생들’의 재조명작업을 제안한다. 또한 예양서원 자체에 대한 재정비사업을 촉구드린다. 현재의 쇠잔한 모습은 도대체 말이 아니다. 후손의 도리가 아니다. 장흥이 진정 ‘문림의향’ 또는 ‘문림예향’이라고 한다면, 다른 무슨 사정보다도 ‘예양서원과 거기에 모셔진 다섯 선비들’을 제대로 받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백번 마땅하다.

<참고문헌> 장흥읍지·정묘지 (1747)/천방유집(1879 간행본)/천방 유호인 행록(장흥문화 10호, 1987)/존재 위백규 문학연구(김석회, 1995)/허균이 가려 뽑은 조선시대 한시3 (강석중 외, 1999)/소시에 대한 평가와 작자(윤호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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