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 성실 등 기초체력이 든든해야 불황 이긴다




글로벌 경제 불황이 전 세계적으로 쓰나미 같은 회오리를 발생시키면서 우리나라 또한 그 냉기를 피해가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지역 장흥에서 산업 및 농업용 공구상을 경영하는 차영길씨. 그는 ‘이 불경기를 해쳐나가는 것도 사업이라는 이념이 투철한 상도(商道)야말로 험난한 파고를 이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상인이다.


“한 번이라도 우리 가계와 거래한 고객은 다시 찾아오는 단골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상술의 상도요 경영 효율성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이러한 마음 가짐이 지금의 그를 존재하게 하고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차영길 사장은 강진 대구면 출생으로 단돈 10만원으로 34세 되던 82년도에 장흥으로 이사왔다. 타향 장흥에서 새롭게 출발한 그의 인생은 밑바닥에서부터였다. 풍찬노숙도 마다하지 않고 고물 수집과 고용살이 등이 그 무렵 그가 할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치만 이런 생활은 절망 그 자체였다.

이 무렵 목포시의 나불도에 사는 사촌형으로부터 이곳에 와 살라는 권유를 받고 갔지만 아무런 희망을 세울 수 없었다. 두 달여 동안 생활을 마친 그는 다시 장흥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한 해에 4번이나 이사하며 고물 수집업을 시작했다. 도서벽지 가리지 않고 온 천지를 돌아다니며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끼니가 되어도 배고픈지 모를 정도로 하는 일이었다.


이때 그에게 11살, 9살, 6살, 3살박이 네 아들이 있었다. 아침 새벽에 밥을 지어 일찍 먹인다음 아장거리던 애들은 집에 그대로 둔 채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6년동안 악착같이 일하여 서초교 뒤에 127평짜리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큰애가 싸우고 울면서 집에 왔다. ‘네 아빠는 고물장수’라는 소리에 또래 애들과 싸웠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무슨 죄냐, 이놈의 가난이 죄지’하는 자책감에 고물상에서 생선장수로 직업을 바꾸었다. 여수에서 고기를 사서 남모르는 타향에서 장사를 하였지만 장사는 신통치 않았다. 이즈음 그는 인생의 변환기에 접어드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철물점을 인수하여 운영해 보라는 제안이었다. 이 장사는 제법 쏠쏠한 벌이가 되어갔다. 덜 입고 덜 먹으며 최소한의 생활비만 제외하고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가기 시작했다. 이후 98년도에 그는 지금의 이 자리에 ‘탐진 공구상’이라는 상호로 사업 기반을 확충하면서 기업을 경영하는 자세로 일대 변화를 맞이한다. 정직과 성실, 친절과 신의가 최고라는 덕목을 사업이념을 정하고 매진하기 시작한다.


천운도 있었겠지만 그는 절대 게으름을 멀리하면서 시종일관 초심을 잃지 않고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좋은 물건 싸게 판다’는 것이다. 그의 가계에 오는 고객 중에는 장흥 사람뿐만이 아니라 인접 강진, 보성 등지에서도 많이 찾아온다. 한번 거래한 사람은 절대 발길을 돌리지 않게 한다는 그의 경영의 상도(商道) 덕분이었다. 또 싸구려 물건은 절대 들여 놓지 않는다. 그렇다고 좋은 제품을 비싸게 팔지도 않는다.


이렇게 하여 어느 만큼 기반을 잡은 그는 이제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장로로 봉직하고 있으면서 사회봉사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푸른장흥21' 회원으로 하천정비나 강변 정화활동 등 환경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명절때는 불우한 이웃돕기에도 솔선하고 있다. 또 사업을 같이하는 큰 아들에게는 사회 봉사단체인 라이온스 클럽에 입회시켜 사회 봉사와 기업의 환원을 학습시키고 있다.


차영길 씨는 “우리 아버지는 무학과 무전이 전부였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하는 근성만큼은 우리에게 남기셨다”고 회고한다. 그는 또 자신은 가난 때문에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자식들에게는 가난과 무지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지금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고 한다.


큰아들은 대학을 나와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서 같이 일하고 있으며, 둘째는 전도사로 있으면서 한국신학대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셋째는 대학 졸업 후 장흥의 기업체인 (주)세일에 취업하였고 막내는 대학교 졸업 이후 외국 제약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차영길 씨는 “찌든 가난과 성치 못한 건강 속에서도 나를 믿고 뒷바라지해 준 부인에게 한없는 미안함과 존경심을 가지고 산다”면서 “자식들에게는 ‘항상 아래를 보고 살아라,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되어라, 자기의 현실에 항상 고마움을 가지고 살라’고 주지시킨다”고 강조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없는 사람 무시하지 말고, 언제나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배려가 있는 참된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고 말했다.


차 씨는 “경제가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덕목인 ‘정직과 성실, 친절과 신의’이 바로 나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원천입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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