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산마을 봉명재는 가사 문학의 시발지자 장흥 가단의 중심지
팔문장 시가비 조성 등‘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서 대상
국립문학관, 봉명재 복원 등 기산권을 또 하나의 문학메카로


안양면 기산마을은 지난 해 말 행정안전부가 주최한 '08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대상을 차지한 기산마을은, 조선 중기에 명성이 높은 문인을 한꺼번에 여덟 명이나 배출하여 이들을 기산 팔문장’이라 불리어졌던 옛 문화전통을 복원하고자 8문장 전통문화마을 사업계획을 수립하여 관서별곡과 시비건립(14개소)을 비롯하여 우물정비(2개소), 소공원조성(1개소), 돌담정비 및 산책로를 조성하고, 동시에 마을의 옛 이야기를 형상화한 벽화 등을 완료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기산마을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8문장 복원을 통한 옛 명성을 살리기 위해 ‘참 살기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 추진위원회’에서는 한국고전문학 번역원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토대로 한 고증을 입증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팔문장 복원에 온 힘을 기울였다.


특히 이번에 기산마을은 조선 중기에 명성이 높은 문인을 한꺼번에 여덟 명이나 배출한 곳으로 잘 알려졌고, 이들을 '기산 8문장'으로 부르기도 했던 이 마을 전통이었던 '기산 8문장'을 복원, 이른바 '8문장 전통문화마을' 가꾸기를 성공시켜 대상을 차지했다.


이 8문장 복원에는 마을이장이기도 한 백광철씨(56)가 깊숙히 관여되어 있다.
‘관서별곡’의 기봉 백광홍과 같은 수원 백씨이기도 한 백광철씨는 평소에도 기봉 선생의 출신 마을에 산다는 사실에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 온 이 마을 토박이.


그는 "팔문장들의 빛나는 업적과 얼로 인하여 후손들이 정신적 영향과 더불어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며 "마을주민 모두가 마음속에 시가비를 세우고 복원 시켜 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면서 "진즉에 실현하지 못하고 금번 ‘참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사업이 마을의 소중한 가치나 보물을 발굴 보존한다 하여 팔문장을 복원코자 사업을 추진하였다"고 밝혔다.

-지난 해에 장흥군이 문학기행 특구로 지정되고, 사자산 기슭에 문학박물관 건립 추진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백광철=늦은 감이 없잖지만, 이제라도 우리 장흥이 문학관광 기행 특구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장흥은 그동안 이렇다 할 문화상품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제 장흥에도 장흥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화상품이 개발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이점에서 저희 ‘가사문학 테마마을’ 조성은 장흥문학 상품화에 적잖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산리의 ‘8문장 전통 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은 한 마디로 ‘가사문학 테마마을’ 조성 사업인데, 이는 담양의 가사문학문화상품과 비교될 수 있는데.


▶백광철=최근에 담양이 가사문학을 들고 나와 국립관광지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담양에는 송순의 면앙정을 비롯 소쇄원이 있으며 정자문화가 잘 발달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정자문화와 가사문학이 직결될 수 없습니다. 담양의 가사문학이 일찍 드러난 것이라면, 기산리의 8문장이나 기봉의 관서별곡, 장흥가단의 실체는 그동안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야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형국입니다.


송강의 ‘관동별곡’만, 기봉의 ‘관서별곡’을 모방해서 25년 후에 지었다는 것이 학계에 비교 문학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기봉의 아우 옥봉 백광훈과 송강은 절친한 친구로서, 담양에 머물던 송강이 장흥 기산을 자주 놀러와 친구(옥봉) 형의 작품인 ‘관서별곡’과 ‘사미인곡’을 흠모해서 10년 선배인 기봉 평안도 평사에게 편지를 자주 보냈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습니다.


기봉의 관서별곡은 이제서야 국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교 국어2에서도, 기봉의 ‘관서별곡’이 송강의 ‘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으로 표기가 바꾸어졌고, 문화관광부에서도 지난 2004년 ‘6월의 문화 인물’로 기봉 선생을 지정되었습니다.


또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와 시 창작에 몰두하였다가 뒤늦게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1549년 28세의 나이로 과장에 나아가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552년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 정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10월 명종 임금이 영·호 남 문신들로 하여금 성균관에서 시문으로 글재주를 겨루게 하였는데 여기에서 기봉은 ‘동지(冬至)’라는 부(賦)를 써서 장원을 했습니다. 이 때 명종 임금으로부터 상으로 하사받은 ‘선시십권(選詩十卷, 1999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7호로 지정)’ 지금도 기양사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산마을을 중심으로 한 가사문학의 자원은 담양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장흥군도 탐진강변을 중심으로 담양에 못지않은 정자문화가 넘쳐나고 있을 뿐아니라, 현대문학에 들어서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 전기철 이대흠 위선환 김영남 등 소설가 시인등 문학자원이 대단하고, 이청준의 생가와 ‘천년학’ 세트장과 천관산 문학공원, 한승원 문학산책로, 해산토굴 등 현대문학자원이 그 어디에 내놓아도 뒤질 것이 없으므로, 전통 장흥가단과 기양사, 기산마을 등으로 연계하는 문화관광 벨트를 구축한다면 전국적으로 경쟁력 있는 문학상품이 구축되어질 것입니다.

―평소에도 장흥의 문화자원에 대한 긍지가 대단한가요.


▶백광철=장흥을 지켜온 토박이로 살아오면서 우리의 중요한 문화자원을 남한데 빼앗긴 것이 장흥군민의 한 사람으로 안타까워서 그럽니다.
남들은 하나같이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만들어서라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습니다 . 왜 그런다고 생각하십니까. 문화 자원이라는 것은 천년을 가는 것이며, 특히 세계적인 추세가 문화관광시대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장흥군은 그동안 거꾸로 흘러갔습니다. 대표적인 것만 지적한다면, 장흥 고싸움과 서편제입니다.
우리 민속놀이 중 가장 역동적인 놀이로 광산의 고싸움이 대표적인데, 사실 이 고싸움의 장흥의 것이었습니다. 1968년 보림문화제 때 선보였던 고싸움이 도민체전 때 장흥의 고싸움이 1등을 했고, 그 당시 광산은 농악으로 2등을 하였다고 하는데, 전남도에서 장흥군이 장흥고를 가지고 전국체전에 나갈 것을 권유하자 예산 700만원이 없어서 못 나간다고 예산타령만 하는 사이, 광산이 고 싸움을 가지고 나가라고 권유를 받아 장흥군이 광산으로 장흥고를 넘겨주었으며, 장흥읍 행원에 고를 잘 꼬는 머슴까지 부쳐 보내니, 광산에 집도 사주고 논 3 마지기도 사주고 이주까지 시켜서 아예 장흥고를 광산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공보실장이었던 김복수씨가 제 앞에서 직접 증언한 내용입니다.


서편제는 또 어떻습니까. 서편제 마지막 전승자인 정응민씨는 본적이 안양면 학송리이고, 만년에 보성 강산과, 회천 오세에서 전수하다 별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개편이 이루어지기 전인 웅치 강산과 회천면은 원래 우리 장흥 땅이었습니다. 물론 국악인 조상현씨도 득음을 회천면 오세에서 했다고 하는데, 본시 용산면과 안양면 사람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우리의 문화자원을 잘 유지 보존하고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학기행 특구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인가요?


▶백광철=그렇습니다. 우리 군이 전국 최초로 문학기행 특구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번 기회에 진지하게, 우리 군이 어떻게 문학을 문화상품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방안을 모색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기행 특구 사업으로 기산마을 주변에 국립문학박물관을 세워, 기산마을의 가사 테마마을과 연계됨으로써 그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기산마을에서 ‘참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사업의 일환으로 운 좋게도 ‘팔문장 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전국에서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조선팔문장 기봉 백광홍과 기산 팔현에 대한 자료 수집을 하던 차에, 국립중앙 도서관과 한국고전문학 번역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용산면 금곡 출신인 김규정씨의 협조로, 조선 왕조실록 선조 18년 2월 1일자와 12월 1일자, 송구 송시열의 문집 등에서 기록을 찾아 복사해 와서 문집을 만들어 냈습니다.


놀랍게도 현재 이희승 국어 대사전이나 네이버 검색 등에서 팔문장에 대해 기봉 백광홍 대신 옥봉 백광훈으로 오기되고 있습니다. 조선 팔문장은 기봉 백광홍을 비롯 이산해, 윤탁현,이순인, 송익필, 최립, 최경창, 하응림 등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명종과 선조시대에 조선시대 학문의 르네상스라 할 정도로 시문학이 개화되었는데, 당대 거유 학자들을 일컬어 ‘조선 팔문장’이라 칭했으며, 옥봉 백광훈과 이달, 최경창은 삼당파 시인으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기봉 백광홍이 장흥 기산 출신으로 ‘조선 팔문장’으로 칭해지자, 기봉과 동문수학했던 훈장 남계 김윤, 지천 김공희, 동계 백광성, 풍잠 백광안, 옥봉 백광훈, 서곡 임분, 죽곡 임회 등이 한 기산 봉명재에서 사마시에 동시에 합격하였다고 하여, 세칭 '기산 팔현' ‘장흥 기산 팔문장’이라 칭하였다고 강진 성전면의 월남리 원주이씨 이금, 존재 위백규의 동생인 서계 위백순 등이 ‘기산 팔현지’ 서문과 찬을 해서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고려 말에 장원봉 하에서 위원개님 위문개님 위신개님의 장원을 비롯하여 오늘날 문학의 고장으로 불리우며 꽃을 피우고 있는 장흥 현대문학의 근본 뿌리는 기산리 봉명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명재에서 비롯된 백광홍 백광훈등 당대 석학들의 가사문학이 장흥가단을 일으키게 되고 그러한 문맥이 오늘에 이르러 장흥 현대문학의 성세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문맥의 전통을 가산에서 이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산마을의 봉명재가 장흥 문학의 뿌리라는 말씀인데.


▶백광철=그렇습니다. 당대 장흥가단의 작품들을 보면, 부산면 관한 노명선 천풍가, 금장 이중전의 장한가, 방촌 위세직의 금당별곡, 존재 위백규의 권학가, 용산 묵촌 이상계의 인일가, 유치 단산 문계태의 덕강구곡가 등 현존하는 장흥가단 가사문학 작품으로 17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 일부는 국문학계에서 한글로 번역되어 장흥문화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조선대학교 백수인 교수는 ‘장흥 가사문학’이라는 논문서에서 호남(전남북)에서 우리 장흥의 가사문학 작품 점유율이 가장 많고 가사 작가 수도 27,6%로 으뜸을 차지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장흥을 ‘문림고을’이라 호칭하는 것도 기실은 가사문학 작품들 때문인 것입니다.
즉 장흥문학의 그 문맥의 근원지가 기산의 봉명재가 발원지인 것입니다.


그 동안 장흥군에서는 천관산 남쪽 연지리에 돌탑과 문학공원을 세우고 그 부근에 현대문학관을 짓고 예산도 많이 투입했습니다.
이어 이청준 선생의 생가 복원, 한승원의 문학산책로, 그리고 최근에는 문학관까지 큰 예산을 투입했습니다다. 앞으로 현대문학과 관련있는 사업은 천관산 문학공원일대를 중심으로 하고, 기산마을은 가사 문학권으로 조성해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반 조성을 위해, 기왕에 문학기행 특구가 된 마당이고 해서, 국립 문학관을 기양사 부근으로 추진하고, 고전문학 시가비를 기양사와 봉명재 사잇길에 세움으로써 전국 유일의 가사문학과 고전문학 시가비가 조성된다면, 또 하나의 문학관광 단지가 세워짐으로써 장흥문학은 더욱 탄탄한 경쟁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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