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당 조성호 선생의 회고록인 ‘내 인생 80년사’에서 ‘老益壯의 典範으로서 노년기를 빛낸 고당'이란 제목과 ‘쉽게 본대로 느낀대로 쓴 평설’이란 부제로 쓴, 이른바 고당의 업적과 활동을 중심으로 쓴 글이다. 선생의 회고록을 보지 못한 대다수의 독자들을 위해 여기 이 글을 지난 호에 그 마지막을 여기 게재한다.…<필자 주>…◆


■ 보림사 복원활동 선도

<지난 호에 이어>고당이 늘그막에 귀향, 유치에서 생활하고 있던 94년, 그의 나이 65세 때, 고당은 다시 한번 보림사와 인연을 갖게 된다.
그해 장흥군에서는 보림사 복원을 본격 추진하기에 이르러, 보림사 복원추진위를 구성하였는데, 복원사업의 중추적인 인물로 고당 선생을 선임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당 선생은 복원추진위 사무소를 보림사에 두고, 전란 때 불타버린 뒤 그때까지 모든 것이 복구되지 않은 채 버려져 있던 복구사업을 본격 추진하기에 이른다.


물론 당시 보림사 복구사업에는 많은 예산이 필요했고, 그 필요한 예산 확보에는 당시 김재종 군수를 비롯 이영권ㆍ김옥두 국회의원, 현광스님 등 여러분의 관심과 지원, 노력 등에 힘입은 결과였지만, 추진사업을 현장에서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복원 추진사업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고당의 공로를 간과할 수 없다.


예컨대, 교도소 입구에 방치되어 있던 마애석불을 보림사로 옮겨 보림사 뒷산 언덕 부도탑 옆에 미타전(彌陀殿) 을 건립하여 안치하는 일이라든지, 보림사 복원을 위한 문교부의 재정지원의 기초를 마련해 준, 당시 문교부 소속의 문명대 문화재위원의 보림사 현지답사 초청을 성사시킨 일 등이 그 사실을 잘 말해준다.


당시 고당은 보림사 복원에는 문교부의 재정 지원이 전제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사찰문화재복원에 간여하는 문화재위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견지에서 평소에 친분이 있던 동국대학교 문명대 박사와 의논을 했고, 그분을 보림사 초청까지 해결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문명대 박사는 한국미술사연구소장, 동국대학교 불교미술문화재연구소장, 서울시 문화재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있는 분으로 불교관련 문화재 관리 보존 등에 영향력이 아주 큰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보림사는 95년도에 요사채 1동, 종각, 미타전, 염화실, 삼성각, 조사실 등을 신축할 수 있었고, 96년에는 대적광전 이전과 명부전으로 사용과 대적관전의 원형복원도 이루어졌다.

■ 열성적인 노인회 활동

고당 선생의 노익장으로서 면모는 노인회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고당은 86년 57세 되던 해에 유치로 귀향했고, 5.6년간 덕산마을의 움막에서 투병생활을 한다. 차츰 건강을 회복하면서 서각예술작업에 전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지역의 많은 기관단체장 등의 방문을 받게 되고 유치 중앙경로당창건 추진위원장에 이어 62세 때 대한노인회 유치면분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이처럼 지역에서 노인회 활동에 참여한 이후 고당은 노인회 군지회장, 대한노인회 전남도연합회장에 이르기까지의 노인회 활동에서 노익장으로서 보여준 고당의 지도력, 추진력 등은 가히 노인세대들에게 전범(典範)이 되고도 남을 만하다.


“그 동안 장흥군 노인회는 유명무실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노인회'는 지역사회에서 푸대접도 적지 않았다. 이는 노인회가 말 그대로 노인들의 모임으로 그쳐있었기 때문이다. 즉, 노인회라는 모임은 있었지만, 노인당이나 경로당 방안에 모여앉아 세월을 낚는 모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노인회도 변화되어야 한다, 거의 모임도 없다시피 했던 읍면 분회모임을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지면서 노인회 활동을 활성화하고, 나아가 거리로 나가 담배꽁초를 줍고 탐진강변의 오물을 치우고 거리 정화운동에 참여하는 등의 지역봉사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인회장이 사용하는 연간활동비 120만원도 노인회 운영기금으로 내놓고, 월 1회씩 개최할 읍면분회 모임 경비도 제가 부담하겠다, 연말이면 불우 소년소녀가장 돕기 운동을 추진하겠다, 우리 노인들도 지역사회를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힘을 보여주겠다, 방안에 들어앉아 대우받기만을 원하고 지원해주기만을 바랬던 종전의 노인회의 위상을 과감히 척결하겠다, 그리하여 노익장다운 노인회를 만들어가겠다”


지난 2000년 대한노인회 장흥군 지회장에 당선된 뒤, 고당이 밝힌 공약과 활동 구상 등이다. 그 후 2005년까지 노인회장으로 재임하며 고당이 보여준 활동력과 그 성과는 대단했다. 그의 당초 생각과 포부대로, 장흥노인회를 일거에 ‘젊고 활기찬 노인회’ ‘거리로 나선 노인회’ 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그때부터 장흥군노인회는 변화를 거듭,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닌, 꼭 필요한 노인회로 변화해 가고 있다.

■ 崇祖爲先, 융화정신의 고당

고당의 삶에서 숭조위선(崇祖爲先)의 현창사업에도 정성을 다한 부문도 놓칠 수 없는 부문이다. 숭조위선(崇祖爲先) 정신은 유교적 가치관에서 기인된다.


조상과 선조들을 기리고 이들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유교에서 아주 중요한 윤리이다. 고당은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충실히 공부하고 각종 유교관련 교서며 책자들을 익히어 유교정신이 잘 배어 있다. 그가 서예나 서각 등에서 능력을 잘 발휘해온 것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고당이 선산들을 사토하고, 가지산계 선조들의 입비를 세우고, 가족 납골묘를 조성하는 등 선조들의 묘역을 정비하거나비석 등을 세우고 공동 가족묘를 조성했던 것은 고당의 정신적 뿌리에 숭조위선의 정신이, 선조들의 업적을 현창하려는 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자기 인생의 지고지순 가치를 유교에 뿌리를 두었던 고당은 우연찮게 불교와도 인연을 맺게 된다.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인 20대 때, 보림사와 인연을 맺으면서, 제대로 불교에 대해 알기 위해 불교서적들을 탐독하고 그 이후 수차 전국의 사찰들을 답사하면서 불교에 대한 매력에도 빠져들게 된다.


유교를 공부한 자로서 불교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지난 60년 청년시절(32세 때) 펴낸 ‘한국 불교파 원류’라는 책과 98년 그의 나이 69세 때 펴낸 ‘피안에 이르는 길’이라는 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또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의 인생 80년 동안 보림사와 불가분의 관련을 짓게 만들면서, 그의 봉사적인 삶에서 나눔과 베품의 정신을 보다 단단하게 구축하는 동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테면, 고당은 그의 평생에서 유교와 불교정신의 융화를 수용한 것이다. 고당은 현실적인 삶의 말년에서 서예와 서각으로 예술적인 부문을 채운다. 이는 조용한 흐름, 정적(靜的)인 흐름이다. 그러나 또 다른 현실에서 그의 실천적인 행동은 정적인 부문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노익장의 노인회 활동 등으로 나타났다. 이 점은 그가 만난 삶의 환경이나 시대적 정서에서 기인된 것일 수도, 또는 그의 성정(性情)이 동시에 동정(動靜)을 추구하는 경향이 승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당이 꾸는 마지막 꿈

고당의 대한노인회 전남도연합회장의 임기는 2010년까지다. 그러나 고당 선생은 내년쯤인 2009년에 퇴임을 할 생각인 듯싶다. 물론 지금도 강건하다. 몇 개월 전 전남 지회를 순방하며, 어찌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술병이 나기도 해 그분의 건강이 우려되었지만, 지금은 거의 거뜬히 완치된 상태여서 앞으로 ‘노익장 10년’도 더 바라볼 수 게 되었다. 다만, 80년대 초 심하게 앓았다가 회복했던 다리관절이, 최근 무리한 활동으로 재발된 듯싶어 다리 관절부문이 불편해 건강을 위해 당분간 쉬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인 듯 싶다.


80순에 들어 찾아온 질환을 위해서도 그렇고, 지금까지 치열하게 불살라온 80년사가 그러해 이젠 그만 쉬면 될 듯도 하지만, 당신의 삶에 능히 자족하고도 남을 터인데도 지금 고당은 마지막의 꿈을 꾸고 있다. 고당 전각회를 설립하는 꿈을.
“우리나라 각자 문화는 근세 서양 인쇄술의 도입으로 급속히 쇠퇴, 판각 등 제한된 분야에만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나라는 목판본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 다라니경은 국보로 지정돼 있고,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우리나라의 각자 문화는 아주 훌륭했다”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목판기술, 각자문화의 전승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문림고을, 사림고을로서 우수한 전통을 이어온 장흥에서도 각자문화 전승, 보존을 위한 사업은 중요하고, 그런 점에서 장흥전각회의 설립도 의미가 크다 아직도 나는 전각회 설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내 인생 마지막까지 꾸는 찬란한 꿈이 될 것이다”라고 당의 말이었다.


<古堂 趙聖皓 프로필>
▲1929. 9. 19 장흥군 유치면 출생
▲광주 사범학교 중퇴
▲보림사 관리사 역임
▲대흥교원 이사 역임
▲정광학원 이사
▲동강대학 강사
▲해남 대흥사 3직 역임
▲전라남도 종무원장 역임
▲총무원 상임 포교사 역임
▲전라남도 도정 자문위원 역임
▲대한민국예술인협회 회원(1979-)
▲장흥문화원 운영위원ㆍ이사(1982-)
▲광주민학회 회원(1992-)
▲보림사 복원추진위원회 총무 역임
▲세계거석문화협회 회원((1998-)
▲민족통일장흥군협의회장(00-)
▲장흥학당 회원(00-)
▲전남사학회 회원(00-)
▲전라남도 금빛 평생교육 봉사원(02-)
▲민예품공모전서 서각작품으로 대상 수상
▲제1회 서각전시회 개최(1997)
▲대한노인회 유치면 분회장
▲대한노인회 장흥군 지회장(00-05)
▲대한노인회 전라남도 연합회장(06-)
▲2012 여수박람회 추진위원
▲어린이 유과 성범죄 추방 운영위원장
▲출산양육과 노인부영협회 의원
▲저서
-<불조파 원류>(1960)
-<피안에 이르는 길>(1998)
-<서예 기초편>
-<가훈에 대하여>
-<나의 인생 80년사>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