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29일, 전주강암서예관서,자작한시등 75편
강암서예대전서 대상…치인 글씨 국내외 전문가들 인정
질항아리 같고,유행가 가락같은 리듬실은 글씨쓰고 싶다



치인 이봉준(痴人李奉浚) 선생이 제2회 강암서예기획초대전의 초청을 받아 지난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전주시 강암서예관에서‘치인이봉준 耳順展’을 열고 있다. 서예가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1913-1992)선생은 한학자이며 호남의 대표적인 서예가로서 한국의 근대서예 중흥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분.


선생은 1992년에 강암서예학술재단을 1995년에 강암서예관을 개관했다. 강암 선생의 유훈을 담고 강암선생이 이룬 서법예술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는 강암서예학술재단은 지난 2007년부터 중견작가의 작품전시회라는 이른바‘강암서예기획초대전’을 개최해 오고 있다.
따라서 이 초대전은 강암선생이 이룬 서법예술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는 강암서예학술재단이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견작가들에게 작품전시의 기회를 주고, 서예 동호인들에게는 우수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는 큰 행사이다. 작가 선정 기준은 강암서예ㆍ미협 ㆍ서협 초대작가 희망자 중 선정위원회에서 한 해에 한 명을 엄선하여 전시회의 모든 비용을 재단 측에서 부담하고 있어 이 초대전 초대 자체가 서예인에게 큰 영광이다.
그런데 강암서예학술재단은 2008년 강암서예대전 초대작가로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인 치인 이봉준씨를 초대,‘강암서예기획초대전-치인 이봉준 이순전’을 개최하기에 이른 것이다.


‘강암서예기획초대전-치인 이봉준 이순전’초대라는 큰 영예를 안은 치인 선생은 제4회 강암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 강암서예대전 초대작가가 되면서 강암서예학술재단가 인연을 맺었다.
치인 선생은 이번 전시회에서 63편의 작품과 부작서예 13편을 전시하고 있다.

■글씨 미치광이 치인 이봉준
이명흠 장흥군수는‘치인이봉준 이순전’개막 축사에서 “문화예술의 중심에서 후학을 양성하고‘서법예술’보급을 위해 부단히 애쓰신 선생의 60평생 깊이가 담긴 작품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문화예술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한다”면서“강암서예기획초대전을 계기로 지역문화예술 창달에도 기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언제인가 치인 선생에 대해“치인 이봉준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엎드려 글씨만 쓰는 '글씨 미치광이(書狂)'이다. 열 개의 벼루에 구멍이 뚫어지고, 몽당붓이 천 개가 넘도록 쓰고 또 쓰는, 글씨와 벼루 와 붓과 종이만 씹어 먹고 사는 사람이다.”고 평한 바 있던 소설가 한승원 선생은 이번‘치인이봉준 이순전’에서 “전주 강암서예기획초대전에 내건 그의 작품들 앞에서 눈을 씻고 또 씻으면서 그의 글씨들을 본다. 그의 글씨에는 글씨가 없다.


그의 글씨 속에는 인민부처의 음음한 그림자만 있고, 정지용 시인의‘향수’ 속에 나오는 가난으로 말미암아 헐벗은 아내의 백합꽃 같은 순수만 있다. …중략…열 개의 벼루 밑바닥이 구멍 뚫어지고 붓 천 자루가 몽당붓이 되도록 글씨를 썼다는 추사 김정희처럼, 붓과 종이가 없어 모래밭에 작대기로 쓰고 칡덩굴을 으깨고 씹어 만든 붓으로 쓰고, 대나무를 털처럼 쪼아 만든 붓으로 썼다는 창암 이삼만처럼 글씨 쓰기에 미쳐 있는 그의 글씨에는 글씨가 없다. 광기(狂氣)와 신기(神氣)와 선기(仙氣)만 있다.…중략…그의 작품은 오탁악세의 세상 속에서 하나의 발언이고 성토이다. 가끔 작품 속에 부적을 빨간 영사로서 그려 넣기도 하는 그의 글씨에는 글씨가 없고, 고대 중국의 시인 굴원(屈原)의 시 같은 주술(呪術)이 한 가마니씩 들어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통해 마음의 가난을 얻고, 산과 강의 그윽하고 건강한 정(精)을 가슴에 품고, 예술지상주의자의 광기(狂氣)와 신기(神氣)와 선기(仙氣)를 배우고, 어지러운 세파를 헤쳐 나가는 나침반 같은 신통한 주술을 배운다”고 평했다.

■치인 선생- 그는 누구인가
치인 이봉준 선생은 장흥군 장동면 만수리 출신으로 지난 80년대 후반에 낙향하여 20여년 동안 서예가로서, 서예연구 인생을 걷고 있는 서예가이다.
치인이 본격적으로 학서(學書)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 두 살 때인 1980년 여수에서 생활할 때다. 현실생활에 부딪치면서 온갖 일을 하다가 그 무렵 유류 파동으로 모든 것을 잃은 선생은 서예의 길에 뛰어든 것이다. 이때 선생은 창암 이삼만(蒼岩 李三晩) 선생의 학서 지침에 주안점을 두고 자습에 몰입해 갔다.


1985년 오랜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치인은 장흥서법예술원을 개설해 후학을 지도하면서 열심히 습서했다. 귀향한 선생은 한편으로 한국방송대학교 중국어과에 입학하여 백화문白話文과 고문을 서예와 병행습서習書하며 만 권서의 학덕學德을 쌓는 기간을 보내게 된다. 1986년에는 독학의 한계를 깨닫고, 정중와(井中蛙)를 면하기 위해 상경할 것을 결심하고, 여초 김응현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게 돼 일주일에 한 번씩 장흥과 서울을 오가며 서예에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 시기에 치인은 서예 실기과정을 거쳐 서법이론과정인 동방서법탐원 3年, 동방서법탐원 최고과정 2년을 필업하게 된다.


치인은 또 틈틈이 번역한 ‘대학서법’을 '서법대관書法大觀(4×6배판, 420면, 이화문화출판사 1997년)‘이란 책으로 편저해 1997년에 출판했으며 2000년에는 ‘魏碑의 書法藝術(4×6배판 954면, 이화문화출판사, 2000년)이라는 理論書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또 지난 2003년에는 '제4회 강암서예대전'에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한데 이어, 그 해 하반기 충주문화원에서 주최한 '제8회 김생전국서예대전'에서도 대상의 영예를 안게 돼, 명실상부 국내 톱클래스에 드는 중견 서예가로서 자리잡게 된다.
또 지난 2006년 6월에는 국내 최초로 서예와 부적을 결합한 부적서예작품 60여점을 특허출원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지난 2007년 7월에는 국내 최초로 부적서예작품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이처럼 치인이 배양하고 축적한 공력과 실력이 지극함에도 불구하고 서예계 3단체(미협ㆍ서협ㆍ서가협)의 기천 명이나 되는 초대작가 대열에 끼지 못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해 치인은 “여초 선생의 국내 공모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공감하고 그에 순종한 탓이었지만, 한편으로 내 나름의 성정이 그런 곳과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치인은 해외 공모전에선 큰 두각을 나타냈다. 중국 항주 서령인사에서 주최한 제1회 국제전각서법예술대전의 입전을 비롯하여,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제 22회 국제현대미술창작전과, 제20회 신동아현대미술대상전에서는 종합 대상의 영예를 안아, 국내보다 해외에서 그 실력을 입증하고도 남을 만한 성과를 올린 것이다.


특히 치인은 국내 서예계의 폐단을 일신한다는 기치 아래 한국 서예계 최고의 상금과 권위를 내걸고 탄생한 강암서예대전의 제4회대회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미리 예선을 통과한 쟁쟁한 서예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주최 측에서 지정해준 명제命題에 따라 작품을 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치인은 평소 각고면려 연구한 신라 고비古碑의 필의로 써내려간 해서체로 영예의 대상을 차지하였다. 이는 치인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 명성을 드높인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또 이 무렵부터 치인은 시흥詩興이 떠오르는 대로 한시를 지어오고 있다. 이번 초대전에서도 치인은 자작 한시 17점을 발표하고 있다.
치인은 “조선의 분청사기와 같은 글씨, 부뚜막에 덩그렇게 걸린 벌 가마 같은 글씨, 장독대 지키는 투박한 질항아리 같은 글씨, 풍설에 겨워 앙상한 가지만 남은 노송같은 글씨, 석벽에 엉크렇게 드러난 석란 뿌리같은 글씨, 투박한 삼베자락 같은 글씨, 고승의 주름살 같은 글씨에 유행가 가락 같은 리듬을 실은 글씨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치인의 예술세계
다음은 치인 선생의 서예와 예술세계에 대해 서예가인 송신일 선생(동방연서회 서법예문 연구원장ㆍ동방서법탐원회 총회장)의 평한 글의 일부이다.
“글씨는 단순한 필묵筆墨으로 꾸미는 속장俗匠의 한계를 넘어 변화 다채로운 예술세계로 승화시키려면 탈속의 인품, 비범한 천질天質, 만권서의 학덕, 부단하게 각고한 학서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치인은 이같이 ‘서여기인書如其人’의 뜻을 마음속에 깊이 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천학비재淺學非才한데다 노력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겸양해 하는, 우직하고 졸박한 선비의 성정을 가지고 그토록 몸부림치며 서법에 대한 피나는 노력을 한 사람이다. 치인은 이같이 ‘서여기인書如其人’의 뜻을 마음속에 깊이 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천학비재淺學非才한데다 노력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겸양해 하는, 우직하고 졸박한 선비의 성정을 가지고 그토록 몸부림치며 서법에 대한 피나는 노력을 한 사람이다.”


“치인은, 석고문石鼓文을 근간으로 주대周代 천년의 각종 금문金文, 은대殷代 갑골문 등의 대전大篆, 진대秦代 각석刻石 등의 소존小篆을 연구했고, 한대漢代 고예古隸는 물론 웅장호방雄壯豪放하고 변화무쌍한 광개토대왕비의 고예와 팔분예八分隸를 비롯 목간木簡 ㆍ죽간竹簡ㆍ백서帛書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해서楷書 초학시에는 초당初唐 3대가(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와 만당서가晩唐書家 안진경의 서를 공부하다가 위진남북조 시대의 각종 비갈碑碣과 묘지명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특히 1980년대 중반부터는 변화 다채롭고 질박고졸質朴古拙하며 비정형체인 신라 고비 古碑에 심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서 공부는 장지張芝와 종요鍾繇의 법통을 이어받은 천하 제일행서인 왕희지서王羲之書와 천하 제이행서라 일컫는 안진경의 삼고三稿 등을 연구하였고, 초서로는 왕희지의 17帖 등을 비롯하여 왕희지의 영향을 받은 당 손과정孫過庭의 서보를 거쳐 장욱張旭의 광초狂草와 회소懷素 초서 등을 연구하며 치인 나름의 초서로 변화시켜 보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痴人은 제법첩諸法帖을 연구하면서 우리나라 고구려 및 신라 고비古碑의 고졸古拙함을 그 속에 녹여 천변만화한 작품을 이루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한글서예에도 남다른 연구로 훈민정음체ㆍ각종 판각체ㆍ궁체ㆍ봉서체ㆍ서간체 등을 자유자제로 구사하며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이르기 까지 치인이 이룬 필성총筆成塚, 묵성지墨成池의 노력이 얼마나 각고의 세월이었을까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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