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읍 행원리 산 34번지에 위치한 행강사(杏岡祠)는 1797년(정조 21년) 9월 중정일(中丁日)에 창건된 사우로 조헌, 김헌, 김유신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관내 유림에서 해마다 9월 중정일에 사당에서 제를 봉행해 오고 있다. 이중 김헌은 바로 행원리 출신의 의병장이요 애국지사이다.


■金憲 公- 그는 누구인가

행원리 출신의 김헌(金憲, 1561~1592)은 조선조 임진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절한 의병장이요 애국지사였다. 그는 光山人으로, 자는 희도(希度)로 1561년 2월 16일 생이다. 본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고 친구와 깊은 우애를 나눈 가운데서도 학문에 큰 뜻을 두었다. 또한 천성은 자애롭고 의리와 기절(氣節)이 있어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강건하고 기품이 넘쳐흘렀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바로 훈련판관(訓練判官)이 되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金 公은 바로 고향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으키니, 7백 명을 규합하게 되었다.
金 公은 7백 의병을 거느리고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면에서 치러진 금산전투에 참가했다. 임란 당시, 임란이 교착상태에 들어가 강화를 교섭하던 중 왜군의 일부는 충남 금산에 주둔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고, 이에 전국의 여러 곳에서 의병들이 몰려와 이들을 치다가 여러 번 패하면서, 금산전투는 임진란의 여러 전투 중 유명한 전투가 된 곳이었다.










金 公도 이 전투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이 되면서 좌우에서 왜군에게 포위되어 끝내 7백 의병이 전몰하게 되었으며, 이 때 金 公도 순절하게 된다.
이 무렵, 행원리 金 公의 집에서는 어느 날 공중에서 金 公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려온 지라, 이를 이상히 여겨 밖으로 나가보니, 金 公의 전마(戰馬)가 피묻은 전포(戰袍)를 안장에 걸친 채 울면서 대문밖에 서 있었다. 이에 公의 집에서는 비로소 공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公의 집에서는 행원리 후등에 시신이 없는 公의 전포와 안장 등을 정중히 예장(禮葬)하여 금산순절사김공헌의적비(錦山殉節士金公憲義蹟碑)를 세웠다. 또 公의 묘 바로 아래쪽에 公의 전마도 함께 장사 지내고 석비 ‘의마총(義馬塚)’을 세워 전마의 주인에 대한 충절을 애도했다. 그리고 묘소 옆에 자리한 큰 바위에 ‘의마총제지각(義馬塚祭之刻)’이라는 글과 함께 ‘소금산(小錦山)’이라는 글도 새기니 이후, 사람들은 이곳을 ‘소금산종용대(小錦山從容臺)’라 부르게 되었다.
나라에서도 후에 공의 전적(戰績) 사실을 알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을 내리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하였다.

■김헌 흔적 남은 의마총, 행강사

김헌공의 묘소로부터 100미터 쯤 아래에는 공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강당(제실)이 있는데 이곳이 행강사(杏岡祠)이다. 위치는 행원리 산 34번지이다. 이 행강사에서는 해마다 유림에서 지내는 제와 함께 별도로 광산문중에서 해마다 10월 10일 김헌공에 대한 시제를 봉행해 오고 있다.
특히 사당 바로 밑의 강당은 지난 2002년에 김헌공의 13대손인 김용규씨(金容圭. 76세)가 기존의 강당이 노후되어 있어 이를 허물고 신축했다. 또 최근에는 강당 옆으로 화장실이 신축되고 있는데, 이는 이민우 의원이 도비 2천만원을 지원해 주어 신축되고 있다.
그동안 지역의 향토사에서 또는 군지 등에서 장흥의 역사 인물로 김헌에 대한 사적 내용이 전혀 소개되거나 조명받지 못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헌공의 후손들이 金公의 사적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거나 치장하는 데 관심이 없었던 데다가, 최근 30여년 전에 장흥을 떠난 김공의 직계손들에 대한 행적이 묘연해 그로부터 지금까지 30년동안 행불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김공의 13대손은 김용진씨로,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30여전 고향을 떠났으나 그 이후 행적이 묘연해 행불상태가 되어 있다. 용진씨와 용규씨는 사촌형제간으로 용진씨 부친은 용규씨의 숙부가 된다.
이러한 실정에서 최근에서야 고향에 정착하게 된 용규씨는 행불상태인 김헌공의 직계 종손의 역할을 도맡으며 제실도 신축하고 김공의 묘소와 사당 등을 관리해 오기에 이르렀던 것.

■행강사-의마총 일대 정비 시급

“그동안 누구도 관리하지 않아 거의 폐허나 다름없었습니다. 저 역시 고향과 객지를 오가며 정착하지 못했다가 최근에 고향마을에 정착하게 되면서 행강사를 제대로 복원도 하고 관리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난 2002년에 제실도 신축했고, 도비 지원으로 화장실도 신축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문제는 사당에서 김헌공의 묘소로 올라가는 100여미터가 구불구불한 맨땅의 언덕길이어서 누구도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조성하려고 하는데,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렵고 해서 누군가의 지원받으려고 하던 중, 무엇보다 지역사회에 의병장 김헌공에 대한 조명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어, 이 문제도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
김용규씨의 말이었다.
장흥에서 의마총은 행원리 행강사의 ‘소금산종용대’가 유일하다. 또 이곳에는 주인공인 김헌공의 시신은 비록 전장에 묻고 공의 피묻은 의복등을 허장했지만, 공이 사랑했던 전마와 함께 묻은 공의 묘소가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그는 우리 지역에서 7백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서 7백 의사들과 함께 순절한 의병장이었기 때문이다.
장흥향교 김제열 전교는 “공의 종손이 없어지다시피 되면서, 공에 대한 치적 등이 그동안 우리의 향토사에서도 조명받지 못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면서 “비록 그동안 공에 대한 치적이 전혀 소개되지 못했다할지라도, 이제부터라도 그분에 대한 역사적 조명도 필요하고 더불어, 공의 흔적이 남아있는 묘소와 의마총 일대의 정비는 물론 공의 위패를 모신 행강사에 대한 정비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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