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목리 마을회관 앞에서 200여 명의 조문객들이 지켜본가운데 故 이청준 선생의 추모제가 엄수됐다.


▲이명흠 군수가 추모사를 하고 있다. 이 군수는 선생의 타계를 몹시 안타까워 했다.


▲이지선 명창이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로 선생이 가시는 길을 위로했다.


▲국악인 김덕수씨가 한스런 춤으로 선학동 신화세계로 가는 고인의 넋을 위무하고 축복했다.


▲고인의 유가족. 좌에 딸 은미씨, 우에 부인 남경자씨.


▲고인의 유해가 노모의 묘 옆에 안장되고 있다.


▲딸 은미씨가 하관식에서 흙 한 삽을 떠 넣고 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비통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한승원씨(우)와 한승원씨의 딸로 소설가인 한강(좌)씨.

故 이청준(69) 선생의 노제(路祭)가 8월 2일 오후 2시 30분, 선생의 고향 마을인 회진면 진목리 마을회관 앞에서 엄정히 봉행됐다.

하늘도 고인의 노제가 축제이길 바라는 듯, 구름이 끼여 햇빛을 가리우고 간간히 서늘한 바람도 불어와 한여름 대낮치고는 최적의 날씨가 계속된 가운데, 부인 남경자씨와 외동딸 은지씨를 비롯한 유가족과 장흥군민, 고향 문인 3백여명은 슬픔 속에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조용히 지켜 봤다.

2시 30분 경, 서울에서 영구차와 함께 선생이 귀향하고, 단아하고 인자한 미소를 띤 고인의 영정사진이 분향소에 설치되면서 노제는 조용히 엄수됐다.

이날 노제에는 서울서 영화감독 임권택, 소설가 천승세 현길언 김승옥 임철우 정찬 한강씨, 시인 김형영 채호기 임동확씨, 평론가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 김화영 권택영 정민 성민엽 정과리 한기 우찬제 이광호씨, 출판인 조상호 정중모씨 등이 장흥까지 따라 내려왔다. 또 장흥출신의 문인으로는 송기숙 이승우 김영남 이대흠, 화가 장찬홍 김선두 박진화를 비롯 박준영도지사, 박형상 변호사 등도 노제에 참석했다.

노제에 앞서 선생의 고향 땅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한풀이라도 하듯, 제주민요제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명창 이지선씨가 고인을 기리며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한스럽게 읊어대 선생의 이승에서 정한(情恨)의 삶을 되새기게 했다.
또 노제 마지막에서는, 장흥가무악제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춤꾼 김덕숙씨가 고인을 기리며 마치 영화 '천년학' 마지막 장면처럼 선학동으로 날라드는 학의 춤이라도 추듯, 애조띤 창(唱) 가락에 맞추어 너울너울 가무를 선보이며 선학동 신화시대를 연 선생의 마지막 길을 축복했다.

노제가 시작되고 선생의 고향 친구이자 동료이기도 한 소설가 한승원(69) 선생은, 한지에 붓으로 쓴 조사(弔詞)를, 목이 메이는 듯 말을 띠엄띠엄 잇기도 하며 "이지적이고 지적이고 정직한 선생은 세상을 문명비평적인 시각으로 통찰하고 조용히 작품을 쓰면서 후학들에게 좋은 소설을 쓰는 전범을 보였고 천재이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글을 쓰는 근면한 작가였다"고 회고했다.

이번 노제 추진위원장이기도 한 한승원 선생은 또 "우리는 선생을 매장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고 선학동에서 영원을 사는 선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당신은 저 태고의 신선들처럼 자기 시간의 한계를 극복한 문학으로서 영원을 살게 된 신화 그 자체입니다"라면서, 이청준이 장흥의 선학동의 신화가 되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선생의 고향 후배시인 김영남은 조시(弔詩)에서 "…임은/여기 진목의 한 달개비 풀로 태어나/질긴 생명력과 왕성한 의욕, 높은 지조로/고향 산해(山海)를 향기롭게 하는/난이 되었지요/선학동의 학이 되었지요/(중략)/이 더위 물러가고 눈 내리면/우리는 또 '눈길'을 걸으며 걸으며/임과, 임의 어머님과, 임의 삶에 대하여/여기 춘란의 향처럼 그리워하리라/선학동의 학 울음소리도 받아 적게 되리라"고 읊으며 고인의 삶을 회고하고 그 의미를 새겼다.
이명흠 장흥군수도 추모사에서 "그저 당신이 타신 꽃구름 보면서/어디로 가시느냐고 몯지 않겠습니다/다만 지금 선베님의/하연 머리에 그 미소가 보고 싶습니다/그런데 자꾸만 눈이 시립니다"고 선생의 타계를 안타까와 했다.

한편, 이에 앞서 이날 오전 7시 삼성서울병원에서 문인장으로 열린 영결식에 김병익 장례위원장은 영결사를 통해 이청준 문학의 보편적 의미를 되새겼다. “고인은 인품이 고매했고, 작가로서 최고였으며, 남도 땅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세계인이었고, 옛것을 지키고 사랑하며 오늘의 새로움을 알아내는 장인이었다”고 추모하고 "그의 소설들은 인간의 참된 조건으로서의 자유의 귀중함을 가르쳤고, 분단의 현실이 빚은 억압의 현실적 구조를 밝혔으며, 세계를 뛰어넘는 구원의 길을 찾고 무한을 창조하는 예술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원초적인 것들과의 화해의 소리를 들려주었다."고 강조했다.

후배 문학평론가 오생근씨는 조사를 통해 "작은 아픔이건, 큰 아픔이건 형은 그 아픔을 숙명처럼 감내하면서 그것을 문학으로만 표현하려 했다"며 "문학을 통해서 아픔이 표현되어야 그 아픔이 치유될 수 있고, 삶이 삶다워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추모했다.
또 고인과 중고교 동기동창인 민득영 한양대 명예교수는 조사에서 “우리가 쪼께 있다가 어머니 옆으로 보내 줄 테니 두 모자 함께 꽃섬 보고 잔잔히 퍼지는 물결 보고 눈도 보고 새도 보고 하시오. …형을 보내려 어설프게 이리 모였는데 곱게 그냥 픽 웃어주시요잉”이라고 애도하자 곳곳에서 울음이 터졌다.

시인 김광규 한양대 교수는 ‘문우 이청준 영전에’라는 조시에서“겨울날 연탄난로 가에서/자네가 읽어주던 ‘퇴원’의 초고에/귀 기울였던 청년들이 오늘은/늙은 조객으로 모였네… 자네는 세상을 담은 큰 집을 지었군/원고지를 한 칸씩 메워 자네의 필적으로/집과 언덕과 산과 강을 만들었군’이라고 읊었다.

선생은 이날 오후 4시 회진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모친의 묘 앞에 묻혔다. 고인의 소설에서, 어미가 어린 아들들을 한 군데 묶어놓은 채 땡볕 아래 콩밭을 매던 자리였다.
영화 '천년학'을 이 마을에서 찍은 임권택 감독은 말없이 하관식을 지켜보며 선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눈물로 지켜봤다.

선생은 이렇게 2008년 8월 2일, 남도 벽촌의 장흥사람으로 태어나 ‘한국문학의 거목’으로 ‘한국문단의 큰 별’이 되고 장흥문학의 신화시대를 연 주역의 한 사람으로 돌아와 당신이 창조한 선학동 신화 속으로 학처럼 영면했다.
/사진촬영: 마동욱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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