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던 김제현씨에 의해 한일합병기때 독입자금을 헌성했던 235인의 위대한 혼을 기리는 ‘선인들의 찬연한 혼을 기리는 비’가 지난 2007년 1월 25일 회진면 신상리에 조성된 이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21.16㎡ 부지 위에 높이 6.6m의 높이로 세워진 이 석비(사진)가 세워진 신상리는 독립투사 김재계 선생, 작가 한승원 선생의 고향마을이기도 하며, 일제 시대 이 마을 출신의 4형제, 3형제, 부자, 형제 45인이 독립자금 헌성금 모금 발생을 주도해, 장흥군 전역에서 독립자금 헌성자 235인을 낳게하여 ‘삼세 충혼비’가 한승원의 문학현장비와 함께 세워져 학생들의 역사 문학 현장 탐방으로 잘 알려진 마을이다.
‘선인들의 찬연한 혼을 기리는 비’라고 명명된 이 추모비에는 역시 이 마을 출신 작가 한승원이 비문이 이 석비 조성의 의미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발을 멈추고 우리 선인들의 꿋꿋한 발걸음을 읽으십시오.
하늘로부터 열린 태극의 길은 땅과 바다로, 명덕(옛 덕도) 사람들의 가슴으로 흘러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착취, 그 무지막지한 총칼의 세월 속에서도 우리 선인들은 찬연한 태극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혀를 깨물면서 보릿고개 배고픔 속에서도 허리띠 졸라매고 한 줌 두 줌 좀도리 쌀을 모으고 논밭을 팔고 눈물로 마련한 금반지 은반지를 빼고 고추알바람 속에서 건진 김 한 속 두 속 모아 상해로 보냈습니다. 그 가시밭 헤치고 나아간 우리 선인들의 발걸음을 영원히 기리고 청사에 남기고자 후손들은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 이 조그마한 돌을 놓습니다. -글 한승원
독립자금을 조성한 선인들을 기리는 후손 일동 ”
일제합병기로 기미년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4년 전 1915년, 당시 장흥군에서는 김재계 선생이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김재계 선생 이하 당시 천도교 장흥교구인들이 대거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특히 김재계의 고향 마을인 신상리에서부터 독립자금 헌성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이때 전답을 팔아서 독립자금 모금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이 바로 이 마을의 4형제, 3형제, 부자, 형제 45인이었다. 종내 이 모금운동은 장흥군 전역으로 확산되어 235인이 참여했다. 이들의 헌금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성금 금액을 적지 않고 은동장으로 표시했는데, 이 자금은 대부분 자기들 목숨 줄이나 다름없던 논밭을 팔아 마련한 자금이었다. 이 자금을 전달할 때도 남자들은 의심을 받기 쉬워, 대리 김영화씨와 관산 대평 한오화씨가 부녀자의 신분으로 돈을 허리에 동여매고 영산포역까지 걸어 올라가 열차를 타고 상경, 천도교중앙총부에 전달했다. 당시 장흥사람들의 이 독립자금 모금 헌납한 장부의 기록이 10여년 전에 문서로 발견되어, 당시 열기 넘친 장흥사람들의 독립정신을 여실히 증명하기도 했다.
김제현씨는 이후 독립자금 모금 후손들을 찾기 위해 10여년 동안 동분서주했으나, 세월이 많이 흘러 독립 자금 모금자 후손들을 다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분들의 위대한 뜻을 무엇으로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들의 정신을 기리는 석비를 세우기로 했고, 오랜 노력으로 지난해 1월에 비로소 석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우리 지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던 김제현씨는 지난 1995년 명덕향토사를 지역주민들과 함께 편찬하기도 했던 분이다. 또 그의 조부와 부친이 모두 동학운동에 참여해 자연스럽게 천도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그동안 장흥지역의 동학사에 대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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