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1일, 재인천 장흥군민향우회 정기총회 석상, 향우회 2,3대 회장을 역임했던 마춘수회장(68)이 인천 향우회 발전의 초석을 다진 공으로 공로패를 받았다.
지난 2002년 2월 20일 재인천장흥군민향우회의 발기인대회, 이어 5월 24일 창립총회가 열렸다. 초대회장은 부평서 정형외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위성민원장이 맡았다.
그리고 그해 말 12월 20일 열린 제1차 정기총회 때 위성민회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을 표명, 차기회장으로 삼미건설대표인 마춘수씨가 취임의사를 표명했고, 마 회장은 이듬해인 2003년 4월 29일 임시총회에서 제2대회장으로 추대됐다.
이후부터 마 회장은 2007년 3월 15일 정기총회에서 회장직에서 이임할 때까지 6년간을 향우회에 헌신하며 오늘의 인천향우회 초석을 쌓는데 기여하게 된다.


장학사업, 93년부터 500명의 학생들에 장학금혜택 주어 와
고향, 향우사랑 지극 - 종친사업 등 숭조사업도 적잖게 기여
평생을 근면 성실, 절약정신으로 살아와-장학사업에 큰 보람

■고향사람, 고향후배에 대한 지극한 애정

인천향우회 발기모임 때 초대 위성민 회장을 추천한 사람은 인천시청에 근무하는 곽하형 회원이었다. 위 회장이 사임을 한 후 곽하형씨는, 회장 맡을 분이 없어 향우회가 해체될 위기에 놓이자, 마춘수 회장을 찾아가 회장을 맡아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마 회장과 곽하형씨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건설 일 때문에 시청을 출입하며 시청 실과장 몇몇과 친했는데, 그들 모두 경상도 사람들이었어. 나와 절친했던 모 과장이, 하루는 자응놈이 하나 있는디, 대단한 놈이요, 하고 곽하형씨를 소개해 줬어. 경상도 출신상사가 그라고 확실히 인정했던 하형이를 그때부터 알았지. … 헌디 그놈이 찾아와 통사정하드라구. 해서 하형이 체면도 있구해서 회장맡았지, 뭐”
마춘수 회장이 인천 향우회장을 맡게 된 동기를 밝힌 대목이다.

“이번에 문과장(마 회장이 향우회장 때 총무, 사무처장 등을 맡으며 6년동안 향우회를 함께 이끌었다)이 이번에 명퇴해, 법무사를 차렸는디, 법무사는 경기가 좋을 때야 좋지 요새같이 불경기 때는 파리만 날리는디, 걱정이구만”

곽하형과 문건식은 장흥중 동창이며 친구사이다(21회). 그 사실도 잘 알고 있는 마 회장이다. 자기를 회장맡게 한 하형씨 얘기 끝에, 자기 회장 때 수고하며 함께 일했던 문건식씨가 최근 공직을 그만두고 법무사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한 진심어린 염려와 걱정이다.

마 회장과의 많은 얘기 속에 고향사람, 특히 고향의 후배들에 대한 사랑이 극진함이 물씬 배어나온다. 하기사 그런 고향과 고향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바탕이 되었기에 어려운 시절 노구를 이끌고 향우회장을 맡아, 오늘의 탄탄한 인천향우회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지난 1994년 3월 4일 유치중학교 입학식 때였다. 한 독지가가 15명의 학생에게 1백50만원의 장학금을 주어 청운을 품은 어린 학생들에게 희망을 부풀게 했다. 그때의 주인공은 당시 인천 북구 부개동에서 삼미주택을 경영하는 마춘수 회장이었다. 유치 신월리가 고향이었던 마 회장은 이날 직접 고향으로 내려와 후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93년부터 15년째 장학사업 해와

국교 1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마 회장이 장학사업을 시작한 지는 1993년부터였다. 당시 막 시작했던 삼미건축사업이 그런대로 잘 나가던 때였고, 돈도 엔간히 잘 벌 때였다. 마 회장은 꿈에도 학창시절이 너무 그리워,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학업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한창 자라나는 후배들을 통하여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장학사업을 시작했으며, 평생 1천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혜택을 주겠다는 계획으로 이후 해마다 장학사업을 추진해 와 지금까지 499명에게 장학금 혜택을 주었다.

그는 그동안 주로 인천시내의 중학교 고교, 대학교 등의 서무과에 연락해, 성적은 우수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못내는 학생들을 선발하게 하고 특히 부모에 대한 효심이 좋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전달해주는 식으로 장학사업을 추진해 왔다.
“초창기 때는 한해 4천만에서 5천만원 정도 장학금으로 지급했어.

근년들어 건축사업을 그만 두면서 건물관리만 하고 있는 실정이고 큰 돈벌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보통 한 해 4,5명의 대학생들에게 각각 등록금 350만원에서 370만원 정도 지급해주고 있어. 자식들도 다 자리잡고 했으니, 내 여력이 있는 한 장학사업은 계속할꺼야.”
“그게 무슨 법칙은 아니겠지만, 장학금을 지급하면 그 다음에 만사가 잘 풀렸어. 남들은 다 어렵다고 하는 데도, 어려운 가운데서 장학금을 지급하고 나면 사업이 이상하게 술술 잘 풀리는 거야. 그동안 장학사업을 해오면서 느낀 것은 이웃과 세상을 향해 베풀면 반드시 그만한 대가가 나타난다는 거야.”


■16세 상경-안해본 일 없이 고생고생하며 서울살이 시작했다.

마 회장은 고향이 유치 신월리다. 그가 유치남초등학교 제1회 학생으로 입학했을 때 9세 때 6ㆍ25가 발발한 데다 생활이 곤궁해지면서 6개월 학생으로서 한 많은 학업을 중단했다.
그는 이후 장작나무를 지게에 지고 4㎞ 이상 떨어진 강진군 병영장터에 내다팔아서 생계를 도와야 했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신월리 독서제(한문서당)에서 8년간 한문공부를 하여 논어ㆍ맹자까지 독파하여 한문에 관한 한 자신감은 어릴 때부터 갖게 되었다.

마 회장은 유치 산골짜기 생활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6세 때 3만4천원을 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누구하나 아는 사람 없는 낯선 땅에서 서울 생활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구두닦기, 고무줄 장사, 노동판에서의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인쇄소에 간신히 취직이 되어 1년 6개월 남짓 공무일도 했고, 리어카 야채장사, 소금장사도 했다. 남가좌동으로 이사를 가 남대문 시장에서 메리야스 도매상에서 월급제로 취직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않아 서울 집을 팔고 현재 살고 있는 인천시 부개동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 그곳은 미개발지역이어서 집값이 그만큼 쌌기 때문이다.

인천 부개동에서 79년부터 새마을 지도자로 활동했다. 8년간 새마을지도자를 마친 후 통장을 12년간 역임하기도 했다.

새마을지도자 시절이었다. 그의 새마을운동의 실적은 괄목한 것이었다. 81년도 수원 중앙본부 가나안농군학교 104기로 입소해 새마을성공사례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새마을사업 실적이 두드러져 전국우수새마을지역을 순회지도하는 팀이 인천의 부개동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 회장은 정부의 훈장 수상자로 상신되었고, 훈장을 받으려고 당시 대구에서 개최하는 새마을전진대회에 참가했으나 결국 훈장은 다른 사람이 받고 말았다. 전라도 출신이라는 출신 성분(?)이 작용한 것이었다.

인천에서 더 이상 텃세와 괄시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됐고, 인천생활에 염증도 느낀 마 회장은 서울로 이사를 하려고 했는데, 당시 조진형씨(14,15,18대 국회의원)가 서울로 가지 말고 여기서 함께 일해보자고 간곡히 설득해, 그 우정에 감동되어 주저앉게 되었다.

그 후 자금도 부족하고 수많은 고생과 난관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미곡상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돈 2천만원을 밑천으로 융자를 받고 하여 지하1층 지상3층의 자기 집도 짓게 되었으며 미곡상과 함께 집짓는 장사도 함께했다. 생활형편이 나아지고 집 장사(삼미건축업)도 솔솔 재미가 붙으면서 부개동 노인정도 지어주고 어린이 놀이터 시설을 해주기도 했다.

자식들 학교인 부평중학교 육성회장과 체육회장을 맡으면서 점심 결식아가 7명이나 되는 것을 알고, 비로소 이제부터 평생 동안 자신의 할 일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가난한 학생들의 배움을 지원하는 장학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가 1992년도였다. 그리고 이들 결식아 7명에게 93년 2월부터 94년 3월까지 점심값을 지불하여 식사를 거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1994년 유치고향에 들렀을 때 점심을 싸온 학생들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듣고, 150만원의 장학금을 내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는 장학금 혜택을 30명으로 늘려 장학사업을 계속해 나왔다. 또 1996년에는 별도의 삼미장학회라는 장학재단을 설립, 재단에서 고향의 학생들과 인천관내 학생들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제각, 회관 등 숭조사업에도 열성 바쳐

마 회장이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서,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15년 가까이 장학사업을 해 온 것과 함께 숭조사업에도 적잖게 기여해온 것이라고.
장흥마씨 현감공파로 시조공 마완의 30세인 그가 장흥마씨종친회장을 맡은 것은 1989년이었다.
“그때 용산 제각을 내가 신축했어. 강진 작천면의 척동제각을 신축해주었고, 유치 신월리에 마지막 제각도 지어줬어. 문중답도 많이 희사했어. 경북 의성군 회관도 곡성군 석곡면 반송리 마을회관도 지어 줬어. 그런데 사실 문중사업은 크게 자랑할 것이 못돼. 자기 조상을 섬기는 일인데 그런 것까지 자랑할 것은 아니지.”

그는 절약과 저축을 생활화하고 어김없이 새벽 4시면 기상해 4㎞를 조깅운동으로 아침을 보내고 6시30분이면 회사에 나가는 불굴의 사나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무하러 새벽같이 일어나 산에 올랐던 게 평생의 습관이 된 거여. 유치서의 유년시절은 가난에 한이 든 시절이었어. 돈벌믄 아껴쓰고 절약하고…돈을 모으는 재미도 바로 유년시절의 그 가난과 배우지 못한 한 때문이었어. 그래서 돈 벌고 나서 배우지 못한 가난한 학생한테 눈을 돌리게 됐구, 그들이라도 나처럼 돈 읎어 배우지 못하게 되는 불행은 읎어야 한다구 생각한 게여. 가끔 길가다 반가운 얼굴로 꾸뻑 인사하는 장학금받았던 학생들을 보면서, 그리고 졸업하고 취직했다고 찾아와 감사의 인사하거나 감사 편지 보낸 것을 보믄서 보람을 느껴.”

■25년간 등산으로 체력관리해 와

마회장은 지금도 70을 눈앞에 둔 노령답지 않게 강인한 체력을 소유하고 있다.
지금까지 강인한 체력과 건강을 유지해 온 것은 평생을 철저한 자기절제와 성실, 근면한 삶을 영위해온 탓이기도 하지만, 아침 운동 등 체력관리와 함께 25여년간 등산을 해온 탓이다.

젊었을 때도 1주일에 2,3번씩 국내산행을 해왔지만, 지금도 1주일에 2회 정도는 인근 산행을 해오고 있다. 1994년에는 칠마산악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기도 했고, 천마산악회, 정우산악회 등 산악회 활동을 해오며 해외등반은 물론 전국 유명산은 몇십 번씩 등정할 정도로 열렬한 산악인으로 살아 온 탓으로 지금도 4,50대 못지않은 산행실력으로 산을 탄다고 한다.

마 회장은 부인 김광옥(57세) 여사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손주는 여섯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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