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복원되기 전의 장흥천도교 교당↑

보수복원된 이후의 장흥천도교 교당↓









▶분류-유적 건조물 ▶수량-면적 1동 ▶지정일- 2003.05.27

▶소재지-전남 장흥군 장흥읍 교촌리 25,26

▶건축시기-일제강점기

▶소유자, 관리자-재단법인 천도교 유지재단

▶일반설명

장흥 천도교당은 원래 1906년 4월에 동학의 후예인 교구장 강봉수(姜琫秀) 등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인에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지어졌다. 천도교장흥군교구역사〉와 교당 내부에 걸린 〈교구실기(敎區室記〉(1920년)를 통하여 당시 개축에는 전남의사원(全南議事員) 신명희(申明熙), 장흥교구장 김재계, 수령 강봉수, 윤세현 등이 주도하였다는 것과 1917년(포덕오십육년정사(布德五十六年丁巳) 11월부터 한달여에 걸쳐 2,300원(圓)을 모금하여 1918년 2월 15일에 건축을 시작하여 6개월만인 8월 26일 준공한것 그리고 건축 실비가 1,600원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금에 참여한 연조인(捐助人) 169인, 목역인(木役人) 104인, 토역인(土役人) 34명으로 명단이 확인되었다. 토역인은 기숙소(寄宿所) 건립을 주로 하였다. 이처럼 1906년과 1918년의 건립에 발기인과 연조인, 목역인, 토역인까지 기록되고 건축 금액이나 건립 기간까지 알 수 있어 중요하다.

장흥지방에 동학(1905년 천도교로 개칭)이 포교된 연대는 대략 1891년 경이었는데 이인환, 이방언, 문남택 등이 동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천도교당 건물로서 남아 있는 흔하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점, 삼일운동 등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과 연계되는 공간구조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구조 양식에 있어서 전통 한옥이 개화기의 여러 문화가 변용되면서 공적 근대화 과정을 표상하는 등 근대 이행기의 공공기관의 건물의 변모과정을 알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역사적, 학술적, 향토문화사적 가치가 있다.

장흥 천도교당은 원래 1906년 4월에 동학의 후예인 교구장 강봉수(姜琫秀) 등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인에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지어졌다. 처음에는 초가 5칸으로 지어졌고, 부속 건물은 4칸이었다. 그 뒤 1918년에 개축하였는데 〈천도교장흥군교구역사〉와 교당 내부에 걸린 〈교구실기(敎區室記〉(1920년)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당시 개축에는 전남의사원(全南議事員) 신명희(申明熙), 장흥교구장 김재계, 수령 강봉수, 윤세현 등이 주도하였다. 1917년(포덕오십육년정사(布德五十六年丁巳) 11월부터 한달여에 걸쳐 2,300원(圓)을 모금하여 1918년 2월 15일에 건축을 시작하여 6개월만인 8월 26일 준공하였다. 건축 실비는 1,600원이 들었다. 당시 건물이 현재의 건물로서 10칸(정면 5, 측면 2)이었고, 가운데 6칸은 성화실(聖化室), 좌우 4칸은 교구장 이하 제임원 처리 사무 응접 등의 용도로 사용하였다. 모금에 참여한 연조인(捐助人) 169인, 목역인(木役人) 104인, 토역인(土役人) 34명으로 명단이 확인되었다. 토역인은 기숙소(寄宿所) 건립을 주로 하였다.

이처럼 1906년과 1918년의 건립에 발기인과 연조인, 목역인, 토역인까지 기록되고 건축 금액이나 건립 기간까지 알 수 있어 중요하다.

1920년에는 차양실(遮陽室)을 건축하였다. 5월 3일에 시작하여 6월 15일에 준공하였다. 실비는 610원이 들었다. 자금은 일반 교원의 의연금, 성미여액(誠米餘額)으로 충당하였다.

장흥지방에 동학(1905년 천도교로 개칭)이 포교된 연대는 대략 1891년 경이었는데 이인환, 이방언, 문남택 등이 동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임실지방과 왕래가 빈번했고, 1893년 충청도 보은 집회에는 장흥 동학교인 수십명이 참석할 정도로 늘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최후 격전이라 할 석대들 전투(장흥군 장흥읍 남외리, 교촌리, 충렬리 일원)에서 장흥, 강진, 해남 지방의 동학교도들이 수 많은 피해를 보았다. 관군측에서도 피해를 입긴 하였다. 그러나 동학 전쟁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리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들이 천도교의 중심인물이 되며, 특히 장흥의 천도교도들은 1906년에 교당을 설립하면서 교세를 확장하고 1918년에는 현재의 건물로 개축을 하며, 1919년 삼일운동 때에는 그 선봉에 서며, 장흥 천도교당은 그 중심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항일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에까지도 천도교당으로서 신앙 공간의 기능은 이어져 오고 있다.

천도교 장흥교당은 전통 목구조 형식의 가옥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납도리 구조로 좌측(향좌)은 부엌을 블록으로 덧달았으며 정면과 우측면은 후림선이 기단 안으로 가로지르고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한 듯한 차양을 기단 밖까지 덧달아 낙수에 대비를 하였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 쌓기를 하였으며 기단 상부는 강회다짐을 한 듯 하나 현재는 일부만이 시멘트로 덮여 있다. 정면에는 출입구로 유도하는 포치(Porch)가 인위적으로 만든 차양을 가로질러 위치하고 있으며 포치 지붕의 형태는 맞배의 형태를 하고 있어 T자형 평면 형태를 취하고 있다. 포치는 종교적인 성격을 띠는 구조물로 보인다.

좌우에 방을 두고 전면에 유리창으로 장식했다. 중앙 3칸은 장마루를 깐 대청이다. 대청의 중앙 후면에는 단차를 높인 제단을 두었고 전면에는 유리창을 사용한 4분합문과 쪽마루를 두었다. 천장은 평천장으로 처리했다. 정면과 측면에는 차양을 설치하고 장대형 초석을 사용한 가느다란 원형 기둥으로 받치고 있다.

구조체의 형성은 기단 위에 막돌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원형 장초석을 올리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차양과 포치를 받치고 있으며 본 건물은 막돌 초석에 방형 기둥을 올려 몸통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지붕의 구조는 납도리 위에 부연처럼 착각을 하게 하는 방형 서까래가 올려져 지붕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건물 외부는 쪽마루를 덧달아 사용하고 있으며 내부는 어칸과 협칸, 즉 3칸을 장마루를 깔았으며 제단은 마루에 단을 높여 만들어 놓았으며 전면은 유리를 둔 4분합문을, 측면은 띠살창을 한 4분합문을 두었으며 양쪽 퇴칸에는 방을 만들어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내부의 천장은 최근에 한 듯한 우물 천장이 만들어져 있으며 대들보에는 단청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장흥 천도교당은 1906년에 초가로 처음 건립했다가 1918년에 현재의 형태로 개축했으며, 1920년에 차양실을 증축했다. 그리고 처음 건립과 개축에 참여한 주도 인물과 모금 인물, 그리고 건축 작업에 참여하였던 목역인(木役人)과 토역인(土役人) 등의 인명, 건축 비용(1918년 건립시 모금액 2,300원, 실 건축비 1,600원)과 건립 기간까지 알 수 있어 근대 건축사 자료로서 중요하다.

또한 천도교당 건물로서 남아 있는 흔하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점, 삼일운동 등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과 연계되는 공간구조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구조 양식에 있어서 전통 한옥이 개화기의 여러 문화가 변용되면서 공적 근대화 과정을 표상하는 등 근대 이행기의 공공기관의 건물의 변모과정을 알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역사적, 학술적, 향토문화사적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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