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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환 시인 현대시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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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4.01  07: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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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읍 출신으로 이순을 넘겼지만, 젊은 시인못지 않게 왕성한 시작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위선환시인이 '현대시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위선환시인은 지난해 세번째 시집으로 <새떼를 베끼다>(문학과지성사) 를 발간, 시단에 화제를 일으켰다. 적막과 허무의 깊이를 헤아리면서도, 이순을 훌쩍 넘긴 시인의 그것이라곤 믿기 어려우리만치 모던하고 담박한 시구 그리고 맑고 깨끗한 서정의 세계로 주목받았다.

그 이후로 각 문학잡지에 발표한 30여편의 시들이 좋은시들이어서, 이러한 위선환 시인의 시를 심사한 끝에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한다.

월간 '현대시'는 5월호에 위선환 시인의 작품상 수상자에 대한 특집을 꾸미며, 시상식은 9월에 있을 예장이라고.

우리에게 위선환 시인의 이름은 그다지 익숙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1960년부터 시를 썼으나 그 후 오랫 동안 펜을 꺾고 시단을 떠나 있었던 탓이다.

1960~70년 당시 광주지역 문인들의 사랑방(김현승 시인을 필두로 이후 문순태, 송기숙, 이성부 등의 문인들이 주축이 되었다)이나 다름없던 광주 충장로의 한 빌딩에서 서정주(시인은 위선환의 시를 읽고 “참 고운 시”란 말을 건넸다)와 김춘수 시인의 추천을 받고 또 두 시인이 본심을 맡았던 ‘용아문학상’(시「떠나가는 배」로 잘 알려진 용아 박용철(1904~1938)을 기리는 문학상)을 수상하고도 문단과 가까울 수 없었던 그는 30년 가까이 공직에 머물렀었다. 그러고는 “몇 해째 (시에 대한)공복”으로 “허기와 쓰림과 욕지기”를 그 자신의 가슴에만 담고 있다가 결국 2001년에 <현대시> 9월 호에 '교외에서' 외 2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미당에게 인정받았지만 가난이 싫어 공무원 선택…30년만에 돌아온 위선환 시인
국민일보/2007-02-11/정철환 기자


“나는 더디고 햇살은 빨랐으므로 몇 해째나 가을은 나보다 먼저 저물었다//땅거미를 덮으며 어둠이 쌓이고 사람들은 돌아가 불을 켜서 내걸 무렵 나는 늦게 닿아서 두리번거리다 깜깜해졌던,//그렇게 깜깜해진 여러 해 뒤이므로(중략)//하늘 아래로 걸어가는 길이 참 조용하다//사람의 걸음걸이로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더디게 오래 걸어서 이제야 닿는구나 목소리를 낯추어 혼잣말 하듯”(‘혼잣말’ 일부)

예순을 넘긴 시인의 그것이라곤 믿기 어려우리만치 모던하고 담박한 시로 주목받고 있는 위선환(66) 시인의 세번째 시집 ‘새떼를 베끼다’(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위선환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익숙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1960년에 문단에 나왔으나 오랫동안 펜을 꺾고 시를 끊었다. 하지만 일찌기 미당 서정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다. “미당 선생의 편지를 받은 것이 1960년이지요. 딱 한 줄이었어요. ‘위성환 군이 참 고오운 시를 입고…’.

1960년 전남 광주에서 용아 박용철(1904∼1938) 시인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용아문학상 신인상의 첫 수상자로 위씨가 선정되었을 때 미당은 문학상 운영위원회의 고문 역을 맡고 있었다. 얼마 후 받은 미당의 두번째 편지는 다소 길었다. “‘어느 때든지 이 나라 시인들이 써야할 시다. 하지만 너무 빠르다’는 내용이었지요.”

‘너무 빠르다’는 미당의 지적은 위씨의 문학적 운명을 예견한 것이었다. “신인상을 받고 등단은 했지만 당시엔 제가 프로이드 같은 것을 읽으면서 좀 어려운 시를 썼나봅니다.”

심심치 않게 문학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그가 시를 작파한 것은 1969년 겨울. 문학잡지도 흔치 않아 지면도 열리지 않았고 다형 김현승 선생으로부터 “이런 시로는 안된다”는 지청구를 들은 참에 그는 시험을 봐서 하급 공무원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난이 싫었다. 그는 시 대신에 클래식 마니아가 되어 5000여장의 음반을 사모았고 등산에 의탁해 시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30년. 위씨가 시를 다시 잡은 것은 공직에서 정년퇴직한 1999년 4월이었다. 한달 내내 ‘4월’이라는 하나의 제목을 정해놓고 이른바 습작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 공문서만 들여다보았으니 언어감각이라도 무뎌졌더군요. 차츰 감각을 회복해서 5월이 되니 ‘초록’이라고 말하면 초록이 묻어날 정도로 감각이 살아나더군요. 그해에 40여편의 시를 써서 무작정 장흥고교 1년 선배인 소설가 한승원씨를 찾아갔어요.”

한씨의 소개로 시편들은 월간 ‘현대시’에 넘겨졌고 위씨는 2001년 9월 ‘현대시’에 시 ‘교외에서’ 등 3편을 발표하며 재등단했다. 시집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2001)와 ‘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2003)에 이어 이번에 세번째 시집을 펴냈으니 30년동안 시는 호주머니 속에서 그를 찔러댄 송곳이었다.

“몇 해째 공복이었다. 땅거미 내리고 나뭇잎들이 검어지고 저만치 걸어가는 어머니가 내다보였다. 기우뚱. 헛발을 내딛는 키 낮은 어머니의 바깥으로 둥근 무릎이 튀어나왔다.//날은 저물었고 다음은//내가 저물 차례였다. (중략) 나를 부르며 멀어지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목청껏 대답해도 들리지 않던 내 목소리와 울대에 걸려있던 토막말 몇 마디를 마저 토해냈다.”(‘토악질’ 일부)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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