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차문화사]/2.다산의 구중구포설- 보림사 차
정민/한양대교수. 한양대학교 교양국어위원회 위원장
출처-http://www.hykorea.net/korea/jung0739/study_view.asp?catKey=2&subKey=s212&subtitle=조선후기%20차문화사&num=647


다산이 제다(製茶)의 방법으로 말한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글에서는 ‘구증구포(九蒸九曝)’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다. 구증구포는 오늘날 다산의 권위를 등에 업고 하나의 신화가 된 듯하다. 지난 호에 살핀 다산이 강진 백운동의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구증구포를 줄여 삼증삼쇄(三蒸三曬)로 말했다. 그렇다면 다산이 만년에 주장을 바꾼 것인가?
구증구포란 말 그대로 아홉 번 쪄서 아홉 번 말린다는 말이다. 구증구포는 인삼이나 숙지황 등 한약재의 강한 성질을 누그러뜨려 약성을 발휘시키기 위해 쓰는 방법이다. 이를 차에다 적용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앞서도 보았듯이 다산의 구증구포나 삼증삼쇄는 덖음 녹차가 아닌, 곱게 빻아 가루를 내 돌샘물로 반죽해 빚는 떡차에 해당하는 제법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덖음 녹차를 만들면서 다산의 이 구증구포를 적용하고, 이를 마치 절대의 비전(秘傳)인 양 떠받드는 경우마저 있다. 이 문제는 관련 문헌의 검토를 통해 좀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째서 다산은 그 여린 찻잎을 아홉 번이나 쪄서 말려 차를 법제해야 한다고 했을까? 구증구포에 대한 다산의 최초 언급은 〈범석호의 병오서회(丙午書懷) 10수를 차운하여 송옹(淞翁)에게 부치다(次韻范石湖丙午書懷十首簡寄淞翁)〉란 시의 둘째 수에 나온다.

보슬비가 뜨락 이끼 초록옷에 넘치길래
느지막이 밥 하라고 여종에게 얘기했지.
게을러져 책을 덮고 자주 아일 부르고
병으로 의관 벗어 손님 맞이 더뎌진다.
지나침을 덜려고 차는 구증구포 거치고
번다함을 싫어해 닭은 한 쌍만 기른다네.
시골의 잡담이야 자질구레한 것 많아
당시(唐詩) 점차 물려두고 송시를 배우노라.
小雨庭菭漲綠衣 任敎孱婢日高炊
懶拋書冊呼兒數 病却巾衫引客遲
洩過茶經九蒸曝 厭煩雞畜一雄雌
田園雜話多卑瑣 漸閣唐詩學宋詩1)

1구의 ‘녹의(綠衣)’는 마당에 깔린 이끼다. 아침부터 조찰이 내린 비로 뜨락의 이끼 옷이 자박자박 젖었다. 오늘 같은 날은 마냥 게으름을 부리고 싶다. 갑자기 책을 덮으니 무료하다. 공연히 이래라 저래라 아이를 불러 심부름을 시킨다. 의관을 풀어헤친 채 지내다 갑자기 손님이 오면 허둥지둥 의관을 정제하느라 손님맞이가 늦어진다.
5구에 구증구포가 나온다. 직역을 하면 “지나침을 줄이려고 차는 구증구포를 거친다”는 말이다. ‘설과(洩過)’는 《좌전(左傳)》에 “부족함을 건져서 지나침을 줄인다. 濟其不足, 以洩其過”란 표현이 있는데서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차의 성질이 지나치게 강한 것을 감쇄시키려고 구증구포, 즉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과정을 거친[經]다고 했다. 6구에서는 조촐한 살림이라 닭도 두 마리만 기른다는 이야기를 대구로 얹고, 쓸데없는 잡담에 마음 쓰지 않고, 지금까지 보던 당시를 접어두고 송시를 더 읽겠노라는 다짐을 적었다.
차를 법제할 때 구증구포 하는 이유를 ‘설과(洩過)’에 둔 것이 흥미롭다. 차의 지나치게 강한 성질을 감쇄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 것이다. 다산의 구증구포설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운데 〈호남사종(湖南四種)〉이란 항목에 한 번 더 나온다.

강진 보림사의 죽전차(竹田茶)는 열수 정약용이 얻었다. 절의 승려들에게 구증구포의 방법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이 보이차에 밑돌지 않는다. 곡우 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치니, 이를 일러 우전차(雨前茶)라 해도 괜찮다.
(康津寶林寺竹田茶, 丁洌水若鏞得之. 敎寺僧以九蒸九曝之法. 其品不下普洱茶. 而穀雨前所採尤貴. 謂之以雨前茶可也.)2)

금싸라기처럼 소중한 기록이다. 보림사의 죽전차를 처음 개발한 사람이 정약용이라고 밝혔다. 다산이 보림사에 갔다가 절 둘레의 야생차를 보고, 구증구포의 방식으로 차를 법제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 품질도 중국의 보이차만 못지않다고 했다. 곡우 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쳤다는 것은 앞서 다산이 백운동에 보낸 편지에서 곡우 때가 되었으니 서둘러 따서 떡차를 만들어 보내달라고 한 언급과 일치한다.
이유원은 〈호남사종〉외에도 문집인 《가오고략(嘉梧藁略)》에 〈죽로차(竹露茶)〉란 장시를 지어 보림사 차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다. 여기서도 다산의 구증구포설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뿐만 아니라, 차의 법제 과정 및 차 맛까지 자세히 적었다.

보림사는 강진 고을 자리 잡고 있으니
호남 속한 고을이라 싸릿대가 공물일세.
절 옆에는 밭이 있고 밭에는 대가 있어
대숲 사이 차가 자라 이슬에 젖는다오.
세상 사람 안목 없어 심드렁이 보는지라
해마다 봄이 오면 제멋대로 우거지네.
어쩌다 온 해박한 정열수(丁洌水) 선생께서
절 중에게 가르쳐서 바늘 싹을 골랐다네.
천 가닥 가지마다 머리카락 엇 짜인듯
한 줌 쥐면 웅큼마다 가는 줄이 엉켰구나.
구증구포 옛 법 따라 안배하여 법제하니
구리 시루 대소쿠리 번갈아서 방아 찧네.
천축국 부처님은 아홉 번 정히 몸 씻었고
천태산 마고선녀 아홉 번 단약을 단련했지.
광주리 소쿠리에 종이 표지 붙이니
‘우전(雨前)’이란 표제에다 품질조차 으뜸일세.
장군의 창 세운 문, 왕손의 집안에서
기이한 양 어지러이 잔치 자리 엉긴 듯 해.
뉘 말했나 정옹(丁翁)이 골수를 씻어냄을
산사에서 죽로차를 바치는 것 다만 보네.
호남 땅 귀한 보물 네 종류를 일컫나니3)
완당 노인 감식안은 당세에 으뜸일세.
해남 생달(栍橽), 제주 수선(水仙), 빈랑(檳榔) 잎 황차(黃茶)러니
더불어 서로 겨뤄 귀천을 못 가르리.
초의 스님 가져와서 선물로 드리니
산방에서 봉한 편지 양연(養硯) 댁에 놓였었지.4)
내 일찍이 어려서 어른들을 좇을 적에
은혜로이 한잔 마셔 마음이 애틋했네.
훗날 전주 놀러가서 구해도 얻지 못해
여러 해를 임하(林下)에서 남은 미련 있었다네.
고경(古鏡) 스님 홀연히 차 한 봉지 던져주니5)
둥글지만 엿 아니요, 떡인데도 붉지 않네.
끈에다 이를 꿰어 꾸러미로 포개니
주렁주렁 달린 것이 일백 열 조각일세.
두건 벗고 소매 걷어 서둘러 함을 열자
상 앞에 흩어진 것 예전 본 그것일세.
돌솥에 끓이려고 새로 물을 길어오고
더벅머리 아이 시켜 불 부채를 재촉했지.
백 번 천 번 끊고 나자 해안(蟹眼)이 솟구치고
한 점 두 점 작설(雀舌)이 풀어져 보이누나.
막힌 가슴 뻥 뚫리고 잇뿌리가 달콤하니
마음 아는 벗님네가 많지 않음 안타깝다.
황산곡(黃山谷)은 차시(茶詩) 지어 동파 노인 전송하니6)
보림사 한잔 차로 전별했단 말 못 들었네.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은 도공(陶公)이 팔았으나
보림사 차를 넣어 시 지었단 말 못 들었네.
심양 시장 보이차(普洱茶)는 그 값이 가장 비싸
한 봉지에 비단 한 필 맞바꿔야 산다 하지.
계주(薊州) 북쪽 낙장(酪漿)과 기름진 어즙(魚汁)은
차를 일러 종을 삼고 함께 차려 권한다네.
가장 좋긴 우리나라 전라도의 보림사니
운각(雲脚)에 유면(乳面)이 모여듦 걱정 없네.7)
번열(煩熱)과 기름기 없애 세상에 꼭 필요하니
보림차면 충분하여 보이차가 안 부럽다.
普林寺在康津縣 縣屬湖南貢楛箭
寺傍有田田有竹 竹間生草露華濺
世人眼眵尋常視 年年春到任蒨蒨
何來博物丁洌水 敎他寺僧芽針選
千莖種種交織髮 一掬團團縈細線
蒸九曝九按古法 銅甑竹篩替相碾
天竺佛尊肉九淨 天台仙姑丹九煉
筐之筥之籤紙貼 雨前標題殊品擅
將軍戟門王孫家 異香繽紛凝寢讌
誰說丁翁洗其髓 但見竹露山寺薦
湖南希寶稱四種 阮髥識鑑當世彦
海橽耽䔉檳樃葉 與之相埓無貴賤
草衣上人齎以送 山房緘字尊養硯
我曾眇少從老長 波分一椀意眷眷
後遊完山求不得 幾載林下留餘戀
鏡釋忽投一包裹 圓非蔗餹餠非茜
貫之以索疊而疊 纍纍薄薄百十片
岸幘褰袖快開函 床前散落曾所眄
石鼎撑煮新汲水 立命童竪促火扇
百沸千沸蟹眼湧 一點二點雀舌揀
胸膈淸爽齒根甘 知心友人恨不遍
山谷詩送坡老歸 未聞普茶一盞餞
鴻漸經爲瓷人沽 未聞普茶參入撰
瀋肆普茶價最高 一封換取一疋絹
薊北酪漿魚汁腴 呼茗爲奴俱供膳
最是海左普林寺 雲脚不憂聚乳面
除煩去膩世固不可無 我産自足彼不羨8)

죽로차는 앞서 〈호남사종〉에서 말한 보림사 죽전차(竹田茶)의 다른 이름이다. 보림사 대밭에 차가 많이 자라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게 차인 줄도 모르고 잡풀 보듯 한다고 했다. 그것을 다산이 와서 보고 절의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어 비로소 보림사 죽전차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아침(芽針)’만을 골라 뭉쳐 쥐면 마치 머리카락이 엇짜인듯 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곡우 이전의 일창일기(一槍一旗)의 여린 잎만 골라 딴 것을 구리 시루로 찌고 대소쿠리로 말려 구증구포를 거친 뒤에 방아를 찧어 가루로 만들고, 이를 다시 반죽해서 떡차로 만들었다. 이유원이 마신 보림사의 죽로차는 대나무 소쿠리로 짠 작은 그릇에 ‘우전’이란 상표까지 붙인 최고급의 떡차였다.
이유원은 젊은 시절 자하 신위의 집에서 초의가 자하에게 선물로 준 보림사 죽로차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 후 백방으로 그 차를 구했으나 다시는 마셔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고경 스님이 찾아와 차 한 봉지를 선물하였다. 둥근 떡을 실로 꿰어 꾸러미로 만들었는데, 세어 보니 떡차가 110개였다. 차를 마신 소감은 막힌 가슴이 뻥 뚫리고 잇뿌리에 단맛이 감돌더라고 했다. 효능은 번열과 기름기를 제거해준다고 적었다. 이유원은 《임하필기》에서 중국의 보이차에 대해서도 자세한 언급을 남긴 바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마셔본 결과 보림사의 죽로차가 결코 중국의 고급 보이차에 못지 않은 품질을 지녔다고 단언하였다. 그래서 그 맛을 기려 후대의 증언을 위해 보림사의 죽로차를 기록으로 남긴다고 했다.
증쇄를 거듭할수록 차의 독성이 눅는다. 냉한 성질이 따습게 변한다. 향과 맛이 부드러워진다. 다산은 이러한 약리를 잘 알았다. 이러한 제다법은 확실히 약용으로 차를 음용하던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위 시를 통해 이유원이 〈호남사종〉에서 말한 구증구포로 법제한 보림사의 죽전차, 또는 죽로차는 잎차 아닌 떡차임이 더 확실해졌다. 또 다산이 처음 제다법을 알려주었다는 보림사 죽로차를 초의가 그 방식대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초의차의 소종래 또한 다산과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므로 초의차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논하겠다.
보림사의 구증구포 죽로차가 떡차였다는 사실은 조선의 차에 관심이 많았던 모로오까 다모쓰(諸岡 存, 1879-1946)와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 1900-1982)가 1938년 전남 나주군 다도면 불회사와 장흥 보림사 등을 직접 답사하여 조사한 결과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답사기에 수록된 불회사의 전차[磚茶] 제다방법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차를 만드는 기본은 순을 딴 뒤의 남은 잎을 채취해서 이것을 하루 안에 3,4회 찐(찐 것을 방안에 얇게 펴서 식히는 정도로 하여 찌며, 찌는 회수가 많을수록 향기와 맛이 좋다) 것을 절구에 넣고 끈적끈적하게 충분히 찧은 뒤, 지름 아홉 푼(약 2.3cm), 두께 두 푼(약 0.5cm)이 되게 손으로 눌러 덩어리 모양으로 굳히고, 이 복판의 작은 구멍에 새끼를 꿰어서 그늘에 말리며 될 수 있는 대로 짧은 기간에 만들어 사용한다.9)

몇 번을 찌든 차 잎을 딴 그날 낮과 밤 안에 여러 번을 찌는데, 찌는 횟수가 많을수록 향기와 맛이 좋아진다고 언급한 사실이 흥미롭다. 또한 완전히 건조시키지 않고, 찐 것을 방안에 얇게 펴서 뜨거운 기운을 식히는 정도로만 말린다. 이렇게 여러 번 찌고 말리는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향과 맛을 더 좋게 하기 위해서다. 여러 차례 찌고 말리기를 되풀이한 뒤에 비로소 절구에 넣고 끈적끈적해질 때까지 찧는다. 찌는 회수를 3,4회 정도라고 했는데, 앞서 본 이시헌의 편지에서 말한 다산의 떡차 제조법과 한 치의 차이가 없다.
또 당시 보고서에는 보림사의 청태전(靑苔錢) 제조 방법도 보인다.
이(보림사) 부근에서는 청태전을 보통 차라고 하여, 1919년경까지 부락 사람들이 만들었으나, 그 뒤 작설차(雀舌茶)를 마시게 되면서 만들지 않는다. (중략) 가져온 날잎차는 곧장 가마에 넣고 쪄서 잎이 연하게 되면 잎을 꺼내(찻잎이 누런 빛깔을 띨 무렵) 절구에 넣고 손공이로 찧는다. 찧을 때는 떡을 만드는 것처럼 잘 찧는다. 이때 물기가 많으면 펴서 조금 말리고, 굳히기에 알맞게 되었을 무렵, 두꺼운 널빤지 위에서 내경 두 치(6cm), 두께 5리(0.15cm), 높이 1푼 6리(0.48cm) 가량의 대나무 테에 될 수 있는 대로 짜임새가 촘촘한 얇은 천(무명)을 물에 적셔서 손으로 잘 짜서 펴고, 그 안에 찧은 차를 넣고, 가볍고 평평하게 엄지 손가락으로 눌러 붙인다. 그것이 조금 굳어갈 때에 꺼내서 자리 위 또는 평평한 대바구니 위에 얹고 햇볕에 쬐어 절반쯤 말랐을 무렵에 대곶이로 복판에 구멍을 뚫는다. 잘 마른 다음 곶이를 꿰면 차가 부서지므로, 연할 때에 하나씩 꿴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날 안에 말리도록 한다.10)

찐 차 잎을 절구에 찧고 말리는 과정 또한 다산의 방법과 같다. 대나무 통을 얇게 잘라 차 잎을 담을 틀을 만들고, 거기에 찧은 차를 눌러 담아 말렸다. 당시 보고서에는 50년도 더 된 청태전이 이 마을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언급도 있다. 다산 이래로 초의가 만들고 이유원이 마셨던 죽로차를 거쳐, 보림사 인근에서 생산된 청태전, 즉 떡차는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던 셈이다.
다산은 구증구포가 차의 강한 성질을 감쇄시키기 위함이라고 했고, 위 글에서는 차의 향과 맛을 더 좋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증포를 거듭하면 강한 성질이 감쇄되면서 향과 맛이 순하고 부드러워진다. 이유원은 위 시에서 차를 마시자 막힌 가슴이 뻥 뚫리고 잇뿌리에 단맛이 감돌더라고 해서 이를 뒷받침했다.
구증구포는 여러 차례 되풀이한다는 의미이지, 꼭 숫자를 세어 아홉 번 하란 말이 아니다. 9는 만수(滿數)이므로, 여러 번의 뜻으로 흔히 쓴다. 이렇게 본다면 다산이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삼증삼쇄(三蒸三曬)’로 횟수를 줄여 말한 것도 이해가 된다. 다산이 말한 구증구포는 꼭 숫자를 헤아려 아홉 번을 말한 것은 아니었고, 3회 이상 여러 차례 찌고 말리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는 의미로 보아 무리가 없겠다. 즉 다산이 만년에 횟수를 줄이는 쪽으로 견해를 수정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를 오늘날의 구증구포설처럼 교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다산이 직접 말한 증거가 나왔으니 구증구포는 마땅히 삼증삼쇄로 바뀌어야 옳다. 하지만 찌는 횟수가 몇 번이냐는 큰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이때 구증구포는 녹차 아닌 떡차를 전제로 한 언급이 아닌가?
지금까지 지난 호 다산의 떡차론에 이어, 다산의 구증구포설을 살폈다. 다산이 통상 마신 차는 잎차 아닌 떡차였고, 구증구포로 법제한 차 또한 덖음 잎차가 아닌 떡차가 확실하다. 다산이 중국에서도 쓰지 않는 구증구포의 방법을 도입한 것은 당시 조선에서 차가 약용으로 사용된 것과 관련이 깊다. 또한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는 당시 조선의 식습관에 비추어 녹차는 성질이 너무 강해 위장에 강한 자극을 주고, 정기를 손상시킨다. 차의 냉한 성질을 감쇄시키고 떫은 맛을 부드럽게 하며 단맛을 강화시키는데 구증구포의 제다법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과학적인 검토가 더 필요하겠다.
필자는 이글에서 다산 선생께서 마신 차가 떡차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차도 떡차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떡차는 진공 포장이나 냉장 보관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당시에, 잎차를 덖을 경우 장마철을 넘기기도 전에 차가 발효되어 맛이 변해 버리는 상황에서 나온 제다 방법이었다. 떡차가 잎차보다 맛이 더 좋아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시대가 다르고 기술이 발전하면 제다법도 바뀌는 것이 마땅하다.
연암 박지원은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과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을 말했다. 옛 것을 본받되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더라도 능히 법도에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의 자취를 왜곡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다음 호에서는 다산의 걸명(乞茗) 시문과 음다(飮茶) 생활에 대해 차례대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정약용, 〈차운범석호병오서회십수간기송옹(次韻范石湖丙午書懷十首簡寄淞翁)〉, 《국역다산시문집》 3책 15면. 번역은 필자가 새로 한 것임.

2) 이유원 저, 《임하필기(林下筆記)》 중 〈호남사종(湖南四種)〉《임하필기》(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 1991), 808면 참조.

3) 이유원, 위 같은 글에서 호남의 네 가지 명물로 보림사의 죽전차와 해남에서 나는 박달나무 기름, 제주도의 수선화와 황차(黃茶)를 꼽았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면 추사가 제주도에서 만들어 마셨다는 황차는 빈랑(檳榔) 잎으로 만들었던 듯 하다.

4) 이유원의 《임하필기》 중 〈삼여탑(三如塔)〉(위 같은 책, 804면)에 보면 초의 스님이 스승인 완호대사(玩虎大師)의 삼여탑을 세우면서 시는 홍현주(洪顯周)에게 부탁하고, 서문은 신위(申緯)에게 부탁했는데, 이때 예물로 보림차를 가져왔다고 적고 있다. 양연(養硯)은 신위의 별호다.

5) 이유원의 위 〈삼여탑〉 항목 끝에 이런 기록이 보인다. “내가 임신년(1872) 대보름날 사시향관(四時香館)에 고경선사(古鏡禪師)와 함께 보림차를 마셨다. 대화가 초의에게 미치자 탑명 서문을 적어 서로 보았다. 초의는 박금령(朴錦齡)과 가장 마음이 맞았다. 보림차는 강진의 대밭에서 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가는 차다.(余於壬申上元, 在四時香館, 與古鏡禪, 啜寶林茶. 話及草衣, 錄塔銘序相視. 草衣最有契於朴錦齡. 寶林茶産康津竹田, 爲東國第一品.)

6) 황산곡이 쌍정차를 끓여 소동파와 작별하며 〈쌍정차송자첨(雙井茶送子瞻)〉이란 시를 지어 준 일을 두고 한 말.

7) 운각(雲脚)은 차의 별칭이다. 또는 차를 끓일 때 구름발이 내려앉듯 끓는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상태를 가리키는 뜻으로 쓴다. 명나라 육수성(陸樹聲)의 《다료기(茶寮記)》에 “운각이 점차 내려앉고 유화(乳花)가 표면에 떠오르면 맛이 가장 좋다. 雲脚漸垂, 乳花浮面則味全”고 한데서 따왔다. 여기서는 차 맛이 가장 좋다는 뜻으로 쓴 것임.

8) 이유원, 〈죽로차〉, 《가오고략》(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 315책-137면).

9) 諸岡存․家入一雄 공저/ 김명배 역, 《조선의 차와 선》(보림사, 1991), 208면. 원문에 ‘일주야(一晝夜)’라 한 것을 김명배의 번역에서는 ‘일주일’로 잘못 옮겨 놓았다. 조판 과정의 오식으로 보인다. 일본어 원문을 참조하여 번역문을 조금 손보았다.

10) 諸岡存․家入一雄 공저/ 김명배 역, 《조선의 차와 선》(보림사, 1991), 2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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