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차문화사/1.다산의 떡차론(청태전론)


정민/한양대교수. 한양대학교 교양국어위원회 위원장ttp://www.hykorea.net/korea/jung0739/study_view.asp?catKey=2&subKey=s212&subtitle=조선후기%20차문화사&num=646




다산 선생이 마셨던 차는 어떤 차였을까? 잎차였을까, 떡차였을까? 2005년 7월 30일, 강진군이 개최한 〈다산정약용선생유물특별전〉에 흥미로운 내용을 담은 다산 선생의 친필 편지 한통이 출품되었다. 이효천 선생 소장 유묵으로, 다산이 69세 나던 1830년 강진 백운동 이대아(李大雅)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 속에는 흥미롭게도 떡차 제조방법에 대한 다산 자신의 친절한 설명이 나와 있다. 전문을 소개한다.

잠깐 눈 돌리는 사이에 세 해가 문득 지났네. 생각건대, 효성스런 마음이 드넓어 내가 미칠 바가 아닐세. 소식 끊겨 생각만 못내 아득할 뿐 안타까운 마음을 펼 길이 없네. 그간 편히 지내셨는가? 또 과거 시험을 보는 해를 맞으니, 비록 영화로운 이름에 뜻이 없다고는 하나 마땅히 글쓰기에 마음을 두고 있겠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가? 나는 나이가 들어 병으로 실로 괴롭기 짝이 없네. 기운이 없어 문밖에도 나갈 수가 없다네. 정신의 진액은 온통 소모되어 남은 것이라고는 실낱같군. 이래서야 어찌 살아 있다 하겠는가.
지난번 보내준 차와 편지는 가까스로 도착하였네. 이제야 감사를 드리네. 올 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茶餠]에 힘입어서일세.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 주기 바라네. 다만 지난 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알겠는가?
시험 보는 고을은 어디인가? 경과(慶科) 때에는 틀림없이 올라올 테니 직접 줘도 좋겠고, 그렇지 않으면 여름이나 가을에 연지(蓮池) 사는 천총(千摠) 김인권(金仁權)의 집으로 보내주게나. 즉각 내게 전해올 걸세. 이현(泥峴) 사는 조카는 청양(靑陽)에 고을 원이 되어 나간지라, 서울 안에는 부탁할만한 곳이 없어 인편에 전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을 걸세. 잠시 줄이고 다 적지 않네. 삼가 쓰네.
경인년(1830) 3월 15일 먼 친척 아무개 돈수.
(轉眄之頃, 三霜奄過. 伏惟孝思廓然, 靡所逮及. 消息頓絶, 思路遂渺, 耿耿之懷, 無以悉喩. 比來起居佳勝. 又當科年, 雖曰無意於榮名, 亦當留神於佔畢. 所做何工? 戚記年固巍矣. 病實苦哉. 委頓不能出戶外. 精神津液都已耗盡, 所存菫一縷耳. 尙何云生世也. 向惠茶封書, 間關來到, 至今珍謝. 年來病滯益甚, 殘骸所支, 惟茶餠是靠, 今當穀雨之天, 復望續惠. 但向寄茶餠, 似或粗末, 未甚佳. 須三蒸三曬, 極細硏, 又必以石泉水調勻, 爛搗如泥, 乃卽作小餠然後, 稠粘可嚥, 諒之如何? 試邑定是何邑? 慶科時, 似必上來, 袖傳爲好, 否則或夏或秋, 入送于蓮池金千摠仁權之家, 必卽傳來耳. 泥峴族姪, 年前出宰靑陽, 京中無可付之處耳. 不宜轉付於風便也. 姑略不宣. 謹狀. 庚寅三月十五日, 戚記逋頓首.)1)

겉봉에는 ‘강진백운동(康津白雲洞) 이대아서궤경납(李大雅書几敬納)’이라 적혀 있다. 발신인에는 ‘두릉후장(斗陵侯狀)’으로 적었다. 수신인 이대아는 다산이 강진 시절에 직접 가르쳤던 막내 제자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을 가리킨다. ‘척기(戚記)’라 한 것으로 보아 사제간에 앞서, 먼 친척 뻘 되는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17년 이시헌의 아버지인 이덕휘(李德輝, 1759-1828)에게 보낸 다산의 또 다른 편지에는, “그대와 아드님의 공부가 모두 아주 근실하고 도타워 더 권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먹는 것이 너무 박해서 병에 걸릴까 염려되니, 이것이 걱정입니다.”라 한 내용이 있고, 보내준 닭과 죽순, 그리고 여러 가지 반찬과 약유(藥油) 등에 대해 감사하는 언급이 있다.2) 두 편지로 볼 때 다산은 강진시절에는 이덕휘의 집에서 보내온 이런저런 먹거리를, 해배(解配)되어 서울로 올라간 뒤에는 백운동에서 부쳐온 차를 받아서 먹었음을 알 수 있다.
편지에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대목은 바로 떡차에 관한 언급이다. 보내준 떡차를 한참 만에 어렵게 받아 잘 먹었다는 말, 떡차로 겨우 몸을 버텨 살고 있으니, 햇차를 따면 새로 만들어 더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배달 사고라도 날까 봐 전달하는 방법까지 시시콜콜히 적은 것을 보면, 차에 대한 다산의 강한 집착이 느껴져 슬그머니 미소를 띠게 한다. 이때 다산은 강진 다신계(茶信契)에서 매년 보내는 차 양식 말고도 초의의 차까지 받아서 먹던 터였다.
다산은 ‘차병(茶餠)’이라고 했다. 떡차가 아니라 ‘차떡’이라고 말했다. 그냥 차가 아니라 곡물 가루를 섞어 떡으로 만든 것인가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제조법을 보면 떡차(餠茶)를 이렇게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들어 전달하는데 적어도 몇 달씩 걸리는 노정을 생각한다면, 곡물을 빻아 차잎과 함께 찧어 만든 떡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저 먹는 떡일 경우 도중에 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
다산이 말한 떡차의 제조법은 이렇다.

1. 차잎을 딴다.
2. 삼증삼쇄(三蒸三曬), 즉 세 번 쪄서 세 번 볕에 말린다.
3. 아주 가늘게 빻는다.
4. 돌샘물로 반죽한다.
5. 진흙처럼 완전히 뭉클어지도록 찧는다.
6. 작은 떡으로 만든다.

이러한 떡차 제조의 방식은 기존에 알려진 떡차 제조법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다만 다산은 여기서 세 번 쪄서 세 번 볕에 말리는 삼증삼쇄(三蒸三曬)를 말하고, 가루가 고와야지 거칠면 안 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또 석천수(石泉水) 즉 돌샘물로 진흙처럼 뭉클어지게 짓찧어 작은 떡으로 만들라고 했다.
2006년 10월에 역시 강진군에서 열린 제 2회 〈다산정약용선생유물특별전〉에도 1816년 다산이 우이도(牛耳島)의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가 출품되었다. 편지에서 다산은 그해 세상을 뜬 중씨 정약전(丁若銓, 1760-1816)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상대의 후의에 감사하는 내용을 전했다. 그리고 보내준 전복에 대한 답례로 ‘다병오십송료(茶餠五十送了)’라 하여 떡차 50개를 보내고 있다.3)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 〈도다변증설(荼茶辨證說)〉에 다산의 떡차에 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오늘날 차로 이름난 것은 영남의 대밭에서 나는 것을 죽로차(竹露茶)라 하고, 밀양부 관아 뒷산 기슭에서 나는 차를 밀성차(密城茶)라 한다. 교남(嶠南) 강진현에는 만불사(萬佛寺)에서 나는 차가 있다. 다산 정약용이 귀양 가 있을 때, 쪄서 불에 말려 덩이를 지어 작은 떡으로 만들게 하고, 만불차(萬佛茶)라 이름지었다. 다른 것은 들은 바가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차를 마시는 것은 체증을 해소하기 위해서이다.
(今茶之爲名者, 出於嶺南竹田, 名以竹露茶. 出於密陽府衙後山麓産茶, 名密城茶. 嶠南康津縣, 有萬佛寺出茶. 丁茶山鏞謫居時, 敎以蒸焙爲團, 作小餠子, 名萬佛茶而已. 他無所聞. 東人之飮茶, 欲消滯也.)4)

영남 대밭에서 나는 죽로차(竹露茶), 밀양의 밀성차(密城茶)와 함께 다산의 만불차(萬佛茶)를 조선의 명차로 꼽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체증을 내리기 위한 약용으로 차를 마신다고 한 대목이 중요하다. 앞서 편지에서 다산도 체증이 심해져서 떡차가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고 직접 말한 바 있다.
만불사는 초당이 있던 강진 만덕산 백련사를 가리킨다. 다산은 증배(蒸焙)하여, 즉 찌고 말려 덩이로 지어 작은 떡을 만들게 했다고 했다. 다산의 차가 소단차(小團茶), 즉 작은 크기의 떡차였음이 다시 한번 입증되는 셈이다.
물론 다산이 떡차만 마셨던 것은 아니다.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松南雜識)》 〈화약류(花藥類)〉의 〈황차(黃茶)〉항목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신라 역사에, 흥덕왕 때 재상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얻어 지리산에 심었다. 향과 맛이 당나라보다 낫다고 한다. 또 해남에는 옛날에 황차(黃茶)가 있었는데,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정약용이 이를 알았으므로, 이름을 정차(丁茶) 또는 남차(南茶)라고 한다.
(羅史興德王時, 宰相大廉, 得種於唐, 種智異山. 香味優於唐云. 又海南古有黃茶, 世無知者. 惟丁若鏞知之, 故名丁茶又南茶)5)

이 언급에 보이는 황차(黃茶)가 떡차인지 잎차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황차라 한 것으로 보아 정차(丁茶) 또는 남차(南茶)로도 불린 해남황차(海南黃茶)는 가마솥 덖음차가 아닌 발효차가 분명하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면서 제자들과 맺은 다신계(茶信契)의 절목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곡우일에 여린 잎을 따서 볶아 1근을 만든다.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2근을 만든다. 이 잎차 1근과 떡차 한 근을 시 원고와 함께 동봉한다.
(穀雨之日, 取嫩茶, 焙作一斤. 立夏之前, 取晩茶, 作餠二斤. 右葉茶一斤, 餠茶二斤, 與詩札同封.)6)

여린 첫 싹은 볶아 잎차를 만들고, 곡우 이후 입하 사이에 딴 늦차로는 떡차를 만들었음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는 1823년 다산이 초천으로 찾아온 제자 윤종삼(尹鍾參)과 윤종진(尹鍾軫)에게 기념으로 써준 친필 글씨 속의 다음 대목으로도 확인된다.

“올 적에 이른 차를 따서 말려두었느냐?” “아직 못했습니다.”
(“來時, 摘早茶付晒否?” 曰: “未及.”)7)

이른 차를 따서 볕에 말려두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산의 잎차는 햇볕으로 자연 건조 발효시킨 반발효차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량이어서 그 즉시 마시는 용도였고, 1년의 차 양식은 모두 떡차로 해결했다. 더구나 잎차의 경우는 삼증삼쇄나 구증구포의 찌고 말리는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고, 약한 불에 찌거나 햇볕에 말려 반발효시킨 것이었다.
이상 새로 발굴된 다산 선생의 친필 편지와 기타 문헌 속의 단편적 언급들을 근거로 다산 선생께서 즐겨 마셨던 차가 떡차였음과, 구체적인 법제 과정을 밝혔다. 다산 선생은 올차[早茶]는 반발효의 잎차로도 마셨는데 소량에 그쳤고, 이 경우는 찌지 않고 건조시켜 발효하는 반 발효의 황차(黃茶)였다.
다산의 제다법과 관련해 끊임없는 논란이 되고 있는 구증구포(九蒸九曝)는 다산의 위 편지에서 말한 삼증삼쇄(三蒸三曬)와 더불어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다음 호에서 따로 논하겠다. 다산의 떡차에 관한 결론도 다음 글에서 맺기로 한다.

1) 이 편지는 2005년 7월 강진군이 펴낸 〈다산정약용선생유물특별전〉 도록 8쪽 하단에 사진이 실려 있다. 필자는 《문헌과해석》 2006년 겨울호(통권 37호, 문헌과해석사, 11-27면)에 실은 〈차를 청하는 글 -다산의 걸명(乞茗) 시문〉에서 다산의 걸명 시문을 논의하면서, 이 편지를 소개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위 편지를 다산이 이시헌의 아버지인 이덕휘에게 준 것으로 보았으나, 이덕휘의 생몰 연대를 확인한 결과, 이 편지는 다산이 이시헌에게 준 것임을 새롭게 확인했다. 이에 따라 번역의 어투를 새롭게 고쳤다.

2) 이 편지는 도록에는 수록되지 않은 이효천 선생 소장의 또 다른 유묵이다. 해당 부분의 원문은 이렇다. “高友及令胤功夫, 俱甚勤篤, 無用加勉. 但所食極薄, 恐致痎病, 是爲悶然. 楚辭一冊, 杜詩一冊. 可讀者送之如何. 惠來鷄芛, 山廚動色. 深荷深荷. 藥油謹受, 而其滓則作丸服. 如已棄之, 更求數十枚, 惠之如何.”

3) 이 편지는 2006년 10월에 간행된 제 2회 〈다산정약용선생유물특별전〉 10쪽 하단에 해당 편지의 실물이 실려 있다.

4) 이규경, 〈도다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동국문화사 영인본, 1955) 권 56(제 4책, 809면).

5) 조재삼, 〈황차〉, 《송남잡지》(규장각 영인본), 1480면.

6) 석용운 편, 〈다신계절목〉, 《한국차문화강좌》(초의학술재단, 2002), 119면.

7) 영인본 친필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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