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신문/314호2004년 5월 20일 목요일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 신북마을에서 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매우 중요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조선대학교 박물관(관장 이기길 교수)에 의해 2003년 7월부터 6개월 이상 조사되었으며, 도로 공사 범위인 6천여 평에서 동북아시아 후기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좀돌날몸돌(세석인석핵, microbladecore), 밀개, 새기개, 슴베찌르개, 창끝찌르개 등의 타제석기뿐 아니라, 흔히 신석기시대 이후에 볼 수 있는 간돌자귀, 갈돌과 갈린 판석, 숫돌 등 마제기법의 석기들이 함께 발견된 것.

이에 조선대 박물관은 2003년 11월 18일과 2004년 4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발굴 현장에서 지도위원회를 열어 유적을 평가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한 바 있다. 그리고 오는 6월 23, 24일에 “동북아시아의 후기구석기문화와 장흥 신북유적”이란 제목으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다음은 신북유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다.

● 조사 경위

장흥 신북유적은 국도 2호선 장흥-장동간 도로 확포장 공사 구간에서 2002년 5월 조선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동북아시아 후기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좀돌날몸돌, 밀개, 창끝찌르개 같은 타제석기들이 드러나 있었다. 이에 공사를 중지시키고 2003년 7월부터 7개월간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 조사 내용

조사 결과 신북유적은 유물 분포 범위가 최소 4만여 평이나 되는 “한국 최대의 후기구석기유적”으로 밝혀졌다. 조사 범위인 6천여 평에서 약 3만점에 이르는 석기들이 발굴되었으며, 6개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18,500∼25,500년전(B.P.)으로 통보되어 유적의 중심 연대는 약 22,000년전으로 추정된다.

사방 1m 범위에서 10여점의 서로 붙는 몸돌과 격지들이 나와 이 곳이 석기제작터일 뿐 아니라, 구석기인들이 떠난 후 유물들이 잘 보존되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화덕자리가 6개나 드러났고 이 중 4개가 사방 4.4x13m 범위 안에 밀집되어 있다. 구석기유적에서 화덕자리가 발견된 예로는 공주 석장리, 제원 창내, 대전 용호동, 진안 진그늘 유적 등으로 매우 드물다. 더군다나 좁은 면적에 4개나 몰려 있는 예는 처음으로 이것은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오래 살았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석기구성은 뗀석기(타제석기)가 주류이고 간석기(마제석기)가 일부 포함된다. 뗀석기 중 좀돌날(세석인)과 좀돌날몸돌, 새기개, 밀개, 긁개 등이 많이 나왔고, 슴베찌르개, 창끝찌르개, 칼(자르개) 등은 적다(뗀석기 사진). 이 종류들은 “좀돌날석기(microblade industry)” 단계를 대표하는 것들로, AMS 측정 결과인 22,000년전의 연대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좀돌날은 끼움날연장(composit tools)의 날로 쓰이는 것으로, 너비가 12㎜ 이하로 좁고 길이가 2배 이상 되며 두께가 1∼2㎜인 아주 얇고 날카로운 돌 조각이다. 이것은 나무나 뿔, 뼈 등에 홈을 파고 접착제를 묻혀 고정시키면 창이나 칼 같은 연장이 되는데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예들이 있다(좀돌날 사진 참고). 신석기시대에 등장하는 낫도 (ㄱ자 모양의 나무나 뿔에 홈을 파고 좀돌날을 끼워) 같은 방식으로 만든 것이다.

끼움날연장은 사용하다 날이 망가지면 그 부분의 좀돌날만 갈아 끼워 손쉽게 재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렇듯 끼움날연장의 주요 요소인 좀돌날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본다면 표준화된 부품인 셈이다.

따라서 이 기술은 이동생활하는 구석기인들이 좋은 돌을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바로 연장을 만들 수 있는 지혜의 결정체이다.

여기서 홈을 파는데 쓰인 연장이 바로 “새기개(조각기, burin)"이며, 이것은 유럽과 시베리아 일대에서 많이 발견되는 다양한 조각품을 제작하는데 널리 쓰였다.

이러한 새기개가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 중 가장 많이 나왔으며, 이와 함께 나온 좀돌날몸돌의 많은 수량을 고려할 때 신북유적에서 끼움날연장을 만드는 일이 매우 성행하였다고 추정된다.

슴베찌르개, 창끝찌르개, 끼움날 연장 등 다양한 사냥도구는 신북유적의 주인공들이 아주“발달된 사냥기술”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식칼 모양의 칼(자르개), 밀개, 새기개 등은 사냥한 짐승을 해체하고, 가죽을 손질하며, 뼈나 뿔을 가공하는데 쓰이는 연장들이다.

신북유적의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뗀석기의 돌감(석재)으로 유문암, 응회암, 석영맥암, 양질 규암은 물론 다른 유적에서 보기 힘든 수정과 흑요석도 사용되었다. 수정으로 만들어진 좀돌날몸돌은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된 것으로 수만 개의 후기구석기유적이 발굴된 일본에서도 아직 한 점도 나온 예가 없다. 희귀석재인 흑요석 또한 호남지역에선 처음 확인되어 구석기인들의 교류 범위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수정 좀돌날몸돌 사진 참고).

간석기의 종류는 간돌자귀, 숫돌, 갈린 판석, 갈돌, 둥근 홈석기, 이형석기 등이다(간석기 사진). 이것들은 발굴 지역의 남쪽 언덕 마루를 중심으로 드러났다. 이 중 “간돌자귀(adze)"는 대형짐승을 해체하거나 나무를 다루는데 쓰였을 것으로 일본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숫돌은 간석기를 만들거나 뼈와 뿔 연장을 만드는데, 그리고 갈린 판석, 갈돌 등은 열매나 단단한 것을 가는데 쓰였을 것이다. 둥근 홈석기는 테두리에 패인 흠집들이 있고 위, 아랫면 중앙에 오목한 홈이 있는데, 이것은 무언 가를 빻고 곱게 가는데 쓰였을 것이다.

구석기시대에 마제석기가 발견된 예는 세계에서 일본뿐이어서 그들은 “최고(最高)의 마제석기”라는 말을 써왔다. 일본의 경우 간석기는 3만∼2만년전에 만들어졌으며, 약 650여 점이 보고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선 진주 장흥리유적에서 나온 예가 있으며 그 연대는 약 2만년전이다. 구석기연구가 가장 앞서 있는 유럽에선 약 25,000년전 그라베티앙 시기에 돌을 갈아 만든 여인상이 있고, 라스코동굴에서 나온 갈아 만든 등잔 등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붉은 색의 "철석영 자갈"이 깨어진 채 드러났다(철석영 사진). 철석영은 일본 니이가타현(新潟縣)의 아라사와(荒澤)유적에서 많이 나온 예가 있으며, 적색 안료로 쓰였다고 보고 있다. 적색안료는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 보듯이 후기구석기시대에 그림물감으로, 그리고 이탈리아의 아레네 칸디데(Arene Candide)유적에서 보듯 죽은이의 영생을 기원하며 무덤 바닥에 뿌려진 예가 있다.

● 조사 의의

지금까지 살펴본 뗀석기와 간석기, 그리고 철석영 등의 쓰임새를 종합해보면, 이 유적은 석기를 만들고, 사냥한 짐승과 채집한 식물성 식량을 가공하며 화덕자리에 둘러 앉아 음식을 먹고, 붉은 안료를 이용하는 등 모든 일상생활이 이뤄졌던 “초대형급의 살림터(base camp)"라고 해석된다.

한편 신북유적이 자리한 보성강 최상류 지역(장동면, 장평면, 웅치면 일대)에는 지금까지 22군데의 구석기 출토지점이 확인된 바 있다. 이것들은 하나의 “유적군(遺蹟群)”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이 지역이 2만2천년전 무렵의 추운 기후 아래 좀돌날 석기 기술을 가진 후기구석기인들이 생활하기 좋은 자연환경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북유적은 후기구석기인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근 유적들에서 사용된 석재와 석기 만든 기술, 같은 형식의 유물, 유적의 규모와 분포 등을 통해 이동생활을 하였던 구석기인들의 활동 반경, 교류의 정도, 자연환경의 이용 방식까지 밝혀낼 수 있는 커다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신북유적은 이미 후기구석기시대에 갈기(마제)로 석기를 만들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이것은 마제기법이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널리 쓰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할 중대한 발견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신북유적은 세계 구석기학사에서 일본에 이어 후기구석기시대에 간석기가 나온 곳으로 기록될 것이며, 일본에서 출토한 간석기의 원류를 한반도와 연결지어 볼 실마리가 된 점에서도 “국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지도위원회”에서는 이 유적을 ▲도기념물 및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호 및 보존하고, ▲지정되지 못한 주변 지역에 대해 연차 시굴조사를 하여 전체 성격을 규명하며, ▲유적의 중요성에 걸맞는 전시관 건립으로 역사교육에 기여하고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한편 장흥군 주민들도 유적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김광원 장흥군의회 부의장, 김창남 전라남도의회 행정자치위원장을 중심으로 『장흥 신북 구석기유적 보존회』를 만들어 유적의 보존과 전남도 기념물 및 사적 지정 추진, 선양과 홍보, 전시관 건립 추진 등의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장흥 신북 유적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 담아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중요한 유적으로 최근 ‘판명’
-장흥신문314호2004년 5월 20일 목요일

장흥 신북 후기구석기유적은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유적임이 밝혀졌다.
2003년 7월부터 이 유적을 발굴 조사해온 조선대학교 박물관(관장 이기길 인문과학대학 사학과)에 따르면 신북유적은 유물 분포 범위가 최소 4만여 평이나 되는 ‘한국 최대의 후기구석기유적’으로 석기를 만들고, 사냥한 짐승과 채집한 식물성 식량을 가공하며, 화덕자리에 둘러 앉아 음식을 먹고, 붉은 안료를 이용하는 등 모든 일상생활이 이뤄졌던 ‘초대형급 살림터(base camp)’로 해석된다.

이와 더불어 신북 유적은 이미 후기구석기시대에 갈기(마제)로 석기를 만들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이것은 마제기법이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널리 쓰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할 중대한 발견으로 평가된다.
신북 유적은 세계 구석기학사에서 일본에 이어 후기구석기시대에 간석기가 나온 곳으로 기록될 것이며, 일본에서 출토한 간석기의 원류를 한반도와 연결하는 실마리가 된 점에서도 ‘국제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한편 신북유적이 자리한 보성강 최상류 지역(장동면, 장평면, 웅치면 일대)에서는 지금까지 22군데의 구석기 출토지점이 확인됐다. 이것들은 하나의 ‘유적군(遺蹟群)’을 형성하고 있어 이 지역이 2만2천년 전 무렵의 추운 기후 아래 좀돌날 석기 기술을 가진 후기구석기인들이 생활하기 좋은 자연환경이었음을 반증한다.

이기길 박물관장(조선대학교)은 “신북유적은 후기구석기인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동생활을 했던 구석기인들의 활동 반경, 교류 정도, 자연환경의 이용 방식까지 밝혀낼 수 있는 커다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며 “유적 보존 및 사적 지정과 더불어 전시관을 건립해 역사교육에 기여하고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신북유적의 중요성을 집중 조명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오는 6월 23·24일 이틀간 “동북아시아의 후기구석기문화와 장흥 신북유적”이란 주제로 장흥군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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