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계마을의 옛지도

전라도 장흥부 지도 全羅道長興府地圖 - 규장각 소장 장흥도호부지도[1872년] -

이 지도는 조선시대 왕실도서관이며 국가통치기록 보관처인 규장각[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채색지도이다. 1872년께 조선왕조가 팔도(八道)와 그 군현(郡縣)별로 제작한 지도로 모두 461장이 전한다. 이 지방지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조선이 국방을 강화하고 사회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작됐다. 따라서 각 군현 지도에는 진보(鎭堡)와 같은 국방시설이 상세히 표시돼 있다. 그리고 산천을 비롯한 자연요소, 읍치 등의 관청건물과 소속 동리와 같은 행정적 요소, 창고. 시장. 역원(驛院). 도로 등의 사회경제적 요소, 제단. 누정(樓亭). 서원. 고적과 같은 문화적 요소를 망라하고 있다. <조선후기지방지도 : 전라도편>(민창문화사, 1996) 등으로 영인본이 나왔다. 장흥부 지도(奎 10439) 크기는 118cmx74cm이다.

장흥부는 지금의 전남 장흥군 장흥읍, 관산읍, 대덕읍, 부산면, 안양면, 용산면, 유치면, 장동면, 장평면과 보성군 웅치면, 회령면 그리고 완도군 금당면, 생일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장흥군 장흥읍 남동리 일대에 있었다. 백제시대부터 고려말기까지 관산 대덕일원에 정안현[오차현, 오아현, 회주목], 장흥읍 일원에 수령현[고마미지현, 마읍현], 장동 장평 일원에 장택현[계천현, 계수현], 회천 웅치 일원에 회령현[마사량현]이 있었다가 합해졌다. 장흥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예양강이 고을을 돌아 나간다.

지도는 회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산의 봉우리와 기암절벽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장흥부 읍성을 장령성(長寧城)이라고 부르는데 보통의 읍성과는 달리 평지성과 산성을 겸하고 있다. 지도상에도 천연의 암벽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산 정상의 봉수대에는 조응관계를 자세히 수록하기도 했다. 북쪽 가지산 아래쪽의 보림사는 보조선사가 세운 절로서 신라 말기 선종 수산문(九山門)의 하나였으며, 9세기에 조성한 삼층석탑과 석등, 보조선사창성탑비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동쪽의 벽사도(碧沙道)는 9개의 속역을 거느린 찰방역이다. 남쪽 해안가에 있는 회령진성은 조선초기에 축조된 수군만호진성으로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는 수군 진영이었다. 동쪽 해안의 해창에도 전선, 병선 등이 정박하고 있는데 돌로 쌓은 진성도 나타난다. 모두 270여개의 명칭이 표기되어 있다.


□ 호계마을 사람들과 살림집_ 우리들의 삶이 영글어 있는 곳

호계리 살림집 62호 사진[이름, 택호] / 옛 사진


□ 歷史 호계마을의 역사

마을 인근에 고인돌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엽 장전동(현 뒷들보)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는 구전이 있으며, 한때는 삼별초군의 본거지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조선 태종 때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한 김린金麟이 모함을 받아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장흥부사로 임명되었는데, 단종이 폐위된 뒤 사육신과 함께 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부임하지 않고 1458년에 현재의 동백정 자리에 가정사假亭舍를 짓고 머물렀으며, 후손들이 주변에 세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510년경에는 정릉참봉 김중기金重器가 장동에서 이곳으로 분가하여 입촌하였고 서산유씨, 낭주최씨, 천안전씨, 장흥임씨 등이 그 뒤를 이어 입촌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호계마을은 본래 장항, 만수 등과 함께 용계면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호계천을 사이에 두고 호계는 부산면으로, 장항과 만수는 장동면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돌담길_ 구불거림이 아름다운 우리 마을의 자랑

우리 마을의 고샅길은 모두 돌담길로 이어져 있다. 돌을 이용해 담을 쌓고 그 경계 안에 가족의 보금자리를 만든 것이다. 호박덩굴이 한길 높이의 돌담을 올라타고 담쟁이덩굴이 돌담을 완전히 감싸 담장인지 생울인지 모를 정도이다.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편안하고 넉넉한 여유를 갖게 한다.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온 돌담길은 나무들이며 살림집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새색시가 빨래터에 갔다가 구불구불한 돌담길에서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돌담길은 우리 마을의 자랑이며, 길이 보존해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生業생업_ 우리들의 땀방울이 맺혀 있는 농업도구

이곳에 터를 닦고 500여 년을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한 방울의 땀방울이라도 헛되이 흘리지 않고 고스란히 땅에 뿌렸다. 땅은 고된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해마다 풍년으로 보상해주었다. 이랴이랴 쟁기 꼭지 꽉 잡은 채 보습날 깊이 박아 땅을 일구었다. 써레질로 논을 골라 모내기를 하고, 들판에 벼단풍이 물들면 낫을 들고 나가 정성스럽게 곡물을 수확했다. 이삭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달구지 가득 나락 가마니 싣고 와 곳간에 쌓아 놓으면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렇게 한 해가 저물면, 언 땅이 녹기를 기다려 다시 소를 몰고 들판으로 나갔다. 헛간에 웅크리고 앉아 지나간 세월만을 그저 반추하고 있는 쟁기, 써레, 멍에, 지게 같은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그 시절로 돌아가는 듯하다.


□ 風俗풍속_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삶의 여백

일년 열두 달 일상생활 속에서 펼쳐온 풍속이 있다. 이 풍속은 오랜 세월동안 생활문화로 정착되면서 바쁜 일상의 여백이 되어주었다. 1월에는 설과 대보름을 쇠면서 액맥이, 망월보기, 더위팔기, 부럼먹기, 노두놓기, 찰밥먹기, 쥐불놀이, 지신밟기, 줄다리기를 했다. 2월에는 콩볶아먹기, 칡캐기, 썩은새끼로 목매달기, 입춘축 붙이기, 미룡알 잡아먹기를 했고 3월에는 화전놀이를 했다. 4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 공을 들였고 5월 단오에는 상추물로 화장하기, 그네뛰기, 씨름을 했다. 6월 유두에는 장원술, 보리술, 뚜께비떡, 닭죽을 먹었고 7월 백중과 복날에는 밀개떡과 보양탕을 먹었다. 8월 추석에는 올벼심리, 강강술래, 중로보기를 했고 9월에는 귀일차례, 국화주 담기를 했다. 10월에는 시제를 모셨고 11월 동지에는 동지죽, 시루떡, 호박떡을 해 먹었고 12월에는 베짜기, 빚갚기를 했다. 그리고 윤달이 끼면 묘손질, 이장, 수의장만, 이사, 집수리를 했다.


□ 信仰신앙_ 우리들의 삶을 지켜온 민속신앙

집과 마을을 떠난 삶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삶은 집과 마을이라는 공간 안에서 형성되고 유지되어왔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과 생업의 풍요를 기원하는 별신제를 모셔오고 있으며,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오랜 동안 당산제를 모셔왔다. 이와 함께 각 가정에서는 부녀자를 중심으로 가족의 안위를 위한 신앙행위를 이어왔다. 우리는 가족들의 안녕과 행복을 지켜주는 신들이 집안 곳곳에 있다고 믿어왔으며, 이런 믿음을 통해 우리의 집을 단순한 삶의 공간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만들어왔다. 지금은 가옥구조가 개선되면서 대부분 사라졌지만, 우리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지앙단지, 지석오가리, 조왕보세기, 지앙상, 칠성, 부적을 모셔왔다.

□ 生活생활_ 우리들의 손때가 묻어 있는 생활용품

우리 마을 어느 집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집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는 오래된 물건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마당귀 수돗가에는 오래된 확과 맷돌이 세월의 더께를 끌어안고 있고, 뒤꼍 장독대에는 어머니의 손맛을 전해주는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부엌 선반에는 유기그릇과 사기그릇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고, 안방 벽장 속에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고리와 삼합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낡은 책상과 책꽂이도 그대로 있고 교과서, 반짇고리, 다듬잇돌, 인두, 요강, 화로 같은 물건들도 여기저기서 금세 얼굴을 내민다.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것도 있지만, 삶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 있는 그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수십 년 전의 추억 속으로 어느덧 빠져들고 만다.


□ 別神祭별신제_ 300여년을 이어온 우리 마을의 신앙

우리 마을 별신제는 1702년(숙종 28)부터 시작되었고, 1715년(숙종 41)에는 마을민의 친목과 상부상조를 위해 대동계를 만들었으며,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년 정월 대보름 자정에 모셔오고 있다. 제를 모시는 장소는 마을 북쪽 호계천 둔치에 형성된 자갈밭으로, 해마다 깨끗한 곳을 골라 막차幕次를 치고 금줄을 두른 다음 흐리상을 만들어 나락, 보리, 콩, 팥, 목화씨, 무, 삼실과, 시루떡, 닭, 술 등의 제물을 올린다. 별신제의 집례 절차는 서립序立, 초헌례初獻禮, 독축讀祝,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예필禮畢 순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천제天祭라고도 부르며, 천 ․ 지 ․ 인 삼위를 받들어 모시면서 마을의 안녕과 국태민안 그리고 풍년과 무병을 기원한다. 우리 마을 별신제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고유한 마을신앙으로, 우리는 성심을 다해 길이 보전하고 전승해나갈 것이다.


□ 冬柏亭동백정_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마을의 자랑

동백정은 호계천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수령 300년에 이르는 홍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조선 태종 때 의정부 좌찬성과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한 김린(金麟, 1392~1474)이 단종이 폐위된 뒤 사육신과 함께 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1458년에 현재의 동백정 자리에 가정사假亭舍를 짓고 머무른 데서 유래하며, 1584년 그의 후손인 김성장金成章이 가정사를 중건하면서 동백정冬柏亭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95년(고종 32)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1985년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였다. 원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이었는데, 우측에 1칸을 증축하여 정면 4칸을 이루고 있다. 동백정은 인근 마을의 강학소로 사용되어 왔는데, 효당 김문옥曉堂 金文鈺 선생이 이곳에서 후학을 훈육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부산면에는 동백정을 필두로 한 칠정계七亭契가 조직되어 매년 돌아가면서 시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동백정에는 그간 이곳을 방문했던 시인묵객들의 시문과 기문 등을 새긴 현판 17개가 걸려 있으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 人物인물_ 명량대첩의 일등공신 김억추 장군

김억추金億秋 장군은 1548년(명종 3) 강진군 작천면 박산촌에서 청주김씨 김충정金忠貞의 장자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고 무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강진 금곡사와 우리 마을의 동백정에서 무술을 연마하여 1577년(선조 10)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진산군수, 순창군수, 안주목사 겸 평안방어사, 진주목사, 만포첨사, 장흥부사, 담양부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97년(선조 30)에는 전라우수사가 되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김억추 장군은 군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울돌목에 쇠사슬을 설치하는 전법을 진두지휘했다. 이순신 장군은 왕에게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영남보존은 호남에 있고 호남보존은 김억추 장군의 방략에 있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역사적인 평가는 이순신 장군에게만 집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장군은 명량대첩 이후 여러 곳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1605년(선조 38)에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1618년(광해군 10)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택幽宅은 강진군 작천면 평기리에 모셔져 있다.


□ 장흥 호계리 동계와 별신제 관련 문서

장흥 호계리 동계와 별신제 관련문서는 조선시대 후기(1702년/1715년)부터 전해오는 기록물(동계안, 집강록, 제관록, 홀기, 풍물부의 등 관련 문적 17책과 상서 2건, 절목 1건)로서 동계창설과 운영 등 마을사의 변천, 그리고 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운영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들 문서들은 지금까지 300년의 역사를 두고 기록되어 온 것들로서 별신제뿐만 아니라, 마을사 전체를 조명해 줄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가 자못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면 대동계라는 마을총회를 열어 별신제의 결산은 물론 이정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자료는 마을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문서는 다른 마을에서 더 오래된 동계자료들이 확인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의 의미는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현재까지도 호계리는 살아 있는 전통으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호계리 동계와 별신제 관련 문서는 모두 20건으로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연번

문 서 명

연도

크기

1

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

1715, 1721

35.0x30.0

2

大洞禊案(甲寅二月十五日)

1734(?)

44.0x29.0

3

虎溪村中執綱案(第二)

1752-1777

34.0x28.0

4

虎溪村中執綱案(第三)

1781-1831

35.5x25.5

5

大洞契村案(第四 壬辰二月初一日)

1832-1858

34.0x26.0

6

虎溪里執綱案(第五 戊午十二月 日)

1858-1873

35.0x27.0

7

虎溪里執綱案(第六 甲戌正月十五 日)

1873-1894

31.5x29.0

8

虎溪大洞案(第七 乙未正月十五 日)

1895-1932

30.5x28.5

9

虎溪大洞中(第八 歲癸酉正月十五日)

1933-1953

38.0x27.0

10

虎溪大洞案(第九 甲午正月十五日)

1954-1984

30.0x26.0

11

虎溪大洞案(第十 甲子正月十五日)

1985-2002

31.0x27.0

12

虎溪洞案(戊戌年正月 日)

무술

32.5x28.0

13

虎溪洞案(丙申春正月小望)

병신

23.0x25.5

14

虎溪洞中金鼓扶儀冊(庚寅正月初六日)

1890

31.0x27.0

15

祭官錄(戊午歲首旣望瞻書)

경진

30.0x26.5

16

別神祭祭需傳掌記(西紀一千九百二十一年辛酉正月)

1921

20.0x21.0

17

虎溪大洞別神祭笏記(幷祝文)

25.0x 9.5

18

上書 1(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정미

59.0 x 93.5

19

上書 2(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무신

58.0 x100.0

20

節目(龍溪面香徒除減節目)

갑술

113.5x 48.0

□ 전시 설명문


o 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

1715년(을미)과 1721년(신축)에 기록된 것으로 대동계 임원과 계원 명단, 그리고 8조의 완의가 수록되어 있다. 표제가 ‘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로 되어 있는데 숙종 41년은 1715년이다. 표지에 창계(刱契)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대동계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수재 이민기(1646-1704)의 󰡔만수재집󰡕 권5에는 虎溪新基祝文, 虎溪地神祝文, 獐項地神祝文, 虎溪別神祝文 등이 나오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1702년에 호계리 별신제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o 大洞禊案(甲寅二月十五日)

대동계서(序)와 완의(完議)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계의 배경과 목적과 마을에 관련된 제반 규율과 의무 등 일종의 자치규약 34개조에 대해서 적고 있다. 상부상조를 회피하는 자에 대한 처벌, 기강을 어지럽히는 자에 대한 처벌, 춘추강회의 실시, 마을의 공동납 등 대동계를 운영하고 마을을 교화하기 위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표제가 ‘大洞禊案(甲寅二月十五日)’으로 되어 있는데 갑인년은 1734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o 虎溪村中執綱案(第二)

1752년(임신)~1777년(정유)의 계 임원 명단이다. 표지가 결락되어 있다. 임원은 1년 단위로 교체 되었는데, 1754년~1758년 등 유임의 기록도 함께 보인다. 촌장(1), 도유사(1), 공사원(2), 유사(2), 직월(2) 등의 임원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1752년부터 대동계에 촌장을 비롯한 마을의 대부분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그 조직 기반도 확고해져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o 虎溪村中執綱案(第三)

1781년(신축)~1831년(신묘)의 대동계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문서 앞부분에 1787년(정미)에 작성된 완의 2종이 있다. 완의는 마을 공동 소유의 상여 활용에 관한 내용이다. 1787년의 완의는 춘추강회를 실시할 때 힘을 보태지 않은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으로, 따르지 않으면 마을에서 쫒아 내도록 하는 규정이다. 또 계원들 가운데 상을 당한 사람이 생기면 상사를 치룰 때 부의금을 거두어 주도록 하였다.


o 大洞契村案(第四 壬辰二月初一日)

1832년(임진)~1858년(무오)의 임원에 관한 기록이다. 촌장, 도유사, 공사원, 유사 등의 직임인데, 1847년(정미)부터 1853년(계축) 사이는 공사원과 유사 대신 별유사기 기록되고 있어 조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o 虎溪里執綱案(第五 戊午十二月 日)

1858년(무오)~1873년(계유)의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촌장 1인, 도유사 1인, 공사원 2인, 유사 2인인데, 1867년~1870년 사이는 공사원이 3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o 虎溪里執綱案(第六 甲戌正月十五 日)

1873년(계유)~1894년(갑오)년 사이의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표제에는 갑술년(1874년)이지만 실제 그 전해인 1873년부터 기록하고 있다. 조직이 유사 중심에서 직월 중심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o 虎溪洞中金鼓扶儀冊(庚寅正月初六日)

1890년(고종 27) 마을에서 금고(농악기)를 마련하면서 부의를 받은 내용을 일일이 수록했다. 마을 주민은 물론 인근 면과 마을, 보림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희귀한 문서이다.


o 祭官錄(戊午歲首旣望瞻書)

호계별신제의 제관록이다. 1918년(무오)의 호계대동별신제향 회유문 등의 기록과 함께 있다. 표제의 ‘戊午歲首旣望瞻書’라는 기록으로 보아 무오년에 처음 등서한 것으로 보인다.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해[歲次未攷]도 있으며, 1950년, 1953년, 1960년 등 서기가 함께 기록된 것도 있다.


o 虎溪大洞別神祭笏記(幷祝文)

호계리 별신제의 홀기이다. 김기권(金基權)이라는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만수재 이민기(1646-1704)의 󰡔만수재집󰡕 권5에는 虎溪新基祝文, 虎溪地神祝文, 獐項地神祝文, 虎溪別神祝文 등이 실려 있다.


o 上書(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정미)

정미년 7월에 성주(장흥부사)에게 올린 상서문으로 용계면 호계리 거주하는 화민 32명이 연명으로 올렸다. 내용은 폭우로 인해 전답이 유실되고 인명이 표류 익사하였으며 제방이 파손되고 마을이 물에 잠기는 피해가 있었는데 이를 구휼해 달라는 내용이다. 지세히 살펴서 원조를 하겠다는 제음(題音)이 있다.


o 上書(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무신)

무신년 정월에 성주(장흥부사)에게 올린 상서문으로 용계면 호계리 거주하는 화민 29명이 연명으로 올렸다. 내용은 전년 6월에 입은 태풍의 피해로 잠긴 제방을 보수하여 물이 소통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전년(정미년)에 올린 상서의 답신에 확인하여 처리한다고 했는데, 해가 바뀌고 농사철이 다가와도 안 되고 있어 장정을 동원해 보수해주고, 인근의 장서면(長西面) 상하점(上下店)과 와석정(瓦石亭) 홍거리(洪巨里) 등의 주민도 동원해 달라는 내용이다.


o 節目(龍溪面香徒除減節目)

갑술년에 용계면의 향도역을 감제하는 절목이다. 용계면에 부과된 향도역을 순찰사가 조정해 주었는데 시일이 지나 다시 부과되자 고통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이에 대해 감제해 줄 것을 청하였고, 그에 따라 감제해준 절목이다.


o 振武原從功臣錄券

仁祖 2년(1624년)에 일어난 李适의 亂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金希敏이 振武原從功臣 1等의 功을 인정받아 下賜받은 󰡔振武原從功臣錄券󰡕은 功臣都鑑에서 만든 목활자본 1책으로 선장 형태로 제책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33.6×22cm이다. 표지의 서명은 ‘振武原從功臣錄券’으로 墨書되어 있다. 녹권의 첫머리에는 수취자명, 문서발급의 목적 등이 적혀 있다. 본문에는 李适의 亂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끝부분은 문서의 발급일자와 포상내용, 발급기관, 담당관원의 職銜과 성씨 등이 수록되어 있다.


o 敎旨 金敬義

父는 溥, 母는 靈光金氏로 嘉靖 丙午(1546)에 태어나 辛亥(1611) 12月 20일에 졸하였다. 字는 子宜이며, 벼슬은 慶州判官을 지냈다. 死後 天啓 6年(1626) 閏6月 20일에 通政大夫刑曹參敬義에 추증되었으며, 두 번째 부인인 水原白氏 역시 貞夫人에 추증되었다.


o 敎旨 金希敏

父는 金敬仁, 母는 晋州河氏이다. 1582년 生父 金敬義와 母 光山金氏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나 伯父인 金敬仁에 出系하였다. 1606년 武科에 합격하여 1617년 正五品인 忠義校尉, 1618년 從四品인 定略將軍, 1618년 慶尙道 所非浦權管, 1620년 從三品인 保功將軍이 되었다. 仁祖 2년(1624) 李适의 亂을 평정하여 振武原從功臣 1等의 功을 인정받아 正三品 禦侮將軍이 되었고, 이어 天啓 6년(1626) 全羅道左水營虞侯가 되었다. 崇禎 3년(1630) 錦南 鄭忠信 장군 휘하에서 椴島에 있는 胡賊들을 격파하였으며, 崇禎 6년(1633) 11월 廣梁鎭 僉節制使가 되어 牟承錄과 함께 殘賊들을 토벌하다가 崇禎 7년(1634) 正月 一日 陣中에서 순직하였다.


o 敎旨 金聲一

父 金希敏 母 草溪卞氏 사이에서 次男으로 태어났는데, 生沒年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위로 두 분의 누님이 있고, 한동안 嫡子가 없었던 金希敏이 金希達의 次男 金益振(1601∼?)을 系子로 맞이한 이후 聲一과 聲運이 출생했고, 형 益振과 본인, 동생 聲運이 仁祖 6년(1628)년 武科에 모두 급제한 것으로 보아 1605년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628년 5월 武科에 급제, 동년 10월 8일 正九品 效力副尉가 되었고, 여러 차례 진급하여 왕을 近侍하는 宣傳官이 되었다. 특히 1634년 父 金希敏이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의 椴島에 있는 殘賊을 토벌하다 순직하자 천리를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長興郡 安良面 蓼谷의 고향산에 安葬하였다.


o 敎旨 金聲運

父 金希敏과 母 草溪 卞氏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3男으로 生沒年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위로 두 분의 누님이 있고, 系子인 長兄 益振(1601∼?)과 親兄 聲一과 함께 仁祖 6년(1628)년 실시한 武科에 모두 급제한 것을 고려해 볼 때 1605년 전후로 출생하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는 崇禎 元年(1628) 5월 武科에 급제하여 동년 10월 8일 正九品 效力副尉가 되었고, 여러 차례 진급하여 왕을 近侍하는 宣傳官이 되었다.


o 敎旨 金益徽

父는 金希達, 母 寶城宣氏이다. 1598년 長男으로 태어나 丁未(1667) 正月 15일 졸하였다. 崇禎 원년(1628) 5월 武科 乙에 及第하여 崇禎 원년(1628) 10월 承義副尉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어 順治 원년(1644) 4월 效力副尉 守門將과 7월 修義副尉, 順治 3년(1646) 6월 宣略將軍行龍驤衛副司果武臣兼宣傳官, 順治 4년(1647) 정월 秉節校尉行龍驤衛副司果武臣兼宣傳官, 順治 4년(1647) 11월 保功將軍行武臣兼宣傳官, 順治 4년(1647) 10월 敦勇校尉行武臣兼宣傳官과 忠毅校尉, 順治 5년(1648) 정월 禦侮將軍行鏡城鎭管防垣兵馬萬戶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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