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원/호남대학교 고문



1. 虎溪里의 沿革
2. 虎溪里의 地理的 位置 發生史
3. 虎溪里의 文化的인 側面 考察
4. 虎溪里, 獐項 사람들 앞으로 注意하고 하여야 할 일
5. 結論

여기서 말씀드릴 내용은 가정이나 허위가 아니고 사실만을 실재화하여 구사한 것이며, 돌아가신 분들의 휘자나 살아있는 분들의 함자는 존칭어를 생략하겠으니 양지하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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虎溪里는 장흥 東北方의 龍頭山과 帝岩山 골짜기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며, 주변에는 十長生 동물들의 명칭이 있는 곳이고, 장흥-보성으로 통한 도로가 인접해 있는 山紫水明한 곳이다.

여기서 虎溪里의 沿革을 알려면 장흥의 역사부터 알아야 한다.

高麗 第十七代 仁宗時 恭睿太后 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처음으로 長興府라 하였고, 그후 여러 해를 거듭하여 숙종 14년에 18坊에 속하여 夫山, 長東, 龍溪坊에 속하다가 1914년 4월 1일로 龍溪面에서 虎溪里는 夫山面에 獐項은 長東面으로 분리되었다. 虎溪里는 일명 ‘범계’, ‘벙개’라고도 한다. 虎溪里와 獐項은 비록 面은 다를지언정 옛날부터 同一面에 속해 있었고, 上下村으로 한 부락 같이 생활해 왔다.

그러면 夫山面은 왜 夫山이라 命名하였을까? 이웃 마을 內洞 서북쪽에 지아비 바위가 있는데 멀리 떠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부인과 같이 생겼으며, 또한 億佛山에 있는 며느리 바위와 마주보고 있으며 이 바위 이름을 따서 夫山이라 命名하였다.

虎溪里의 沿革을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1399年경 金麟(長興元-, 원님)이 地理學에도 능하고 陰陽五行說에도 해박하여 어느 날 하루는 친구들, 幹部級들과 함께 자기의 生前死後 터전을 잡으러 지금의 장흥읍에서 耽津江을 따라 오르다가 지금의 夫山面 內安里[흥룡동, 내동]에 터를 잡았는데, 친한 친구인 지금의 灵光金氏 中始祖가 “자네는 地理學에 능하니 이 자리를 나한테 주고 다른 곳을 잡으라”고 애원하여 할 수 없이 그곳을 친구에게 주었다. 이곳이 바로 夫山面 內安里에 있는 灵光金氏의 中始祖 터인 것이다. 따라서 長興에 居住한 모든 灵光金氏들은 淸州金氏의 中始祖인 金麟과의 연고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날 耽津江을 따라 오르다가 자라번지(자래번지)에 이르러 북쪽을 보니 산으로 모두 막혀 있고, 동쪽을 보니 帝岩山이 높게 보이고 맑은 시냇물이 흘러 내려옴으로 거기서 동쪽으로 향하여 걸어가보니 지금의 虎溪里 서남쪽 案山밑에 자리를 잡고 또 냇가를 따라 오르니 지금의 蛇谷에 이르러 死後 墓터를 잡았다.

새터를 잡기 전에는 虎溪里 獐項은 張氏들이 살았고, 그들의 묘가 萬守마을에 지금도 存在해 있다. 虎溪里 마을터는 屛澗沼와 다리 사이 제방이 없을 때 시냇물이 마을쪽으로 흘렀으나, 그곳에 제방을 쌓은 후 지금과 같은 마을터가 생긴 것이다.

虎溪里 문화와 관련하여 이웃 獐項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 마을 뒤에는 高麗때 三別抄亂 神義軍의 抗蒙전 基地이며, 지금도 돌화살촉들이 있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앞들과 萬年里 들판까지는 東學亂의 激戰地로 東學軍(長平, 웅치, 會泉)들이 官軍과 싸우고 감나무재를 경유하여 장평, 웅치로 退行했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동백정은, 소재지가 長東面 獐項里 707番地로 獐項마을 백호등인 속칭 ‘황새고개’의 鶴嶝에 자리 잡고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을 ‘冬柏亭’으로 쓰는데, 冬柏은 잣나무로 측백나무를 말할 때 도는 침엽수일 때 이 字를 쓰고, 동백은 溫帶林으로 분류되어 여기서는 ‘冬栢’으로 써야 옳은 表現이다.

冬柏亭의 歷史的 沿革은 議政府 左瓚城 金麟(김린은 어떤 분인가? 1355년 함경북도에서 출생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좌찬성에 이르렀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절친한 사이이며 호는 동촌, 뢰은이라 함)이 반대파의 謀陷으로 長興邑제에 外補되어 정자를 세워 거처하면서 손수 冬柏을 심어 冬柏亭이라 命名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단종이 손위하던 시기라 비록 사육신과 같이 행동하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절개를 지키고 동백나무 같이 사시사철 푸르름으로 독야청청한다는 뜻과 청렴결백을 의미한 상징수로 심었다고 한다.

장흥에는 산수의 경치가 빼어난 곳이 많으나 동백정 또한 빼어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예양강 상류인 虎溪川이 옷깃처럼 정자 앞을 흐르고 뒤로는 龍頭山을 끌어 당겨 鎭山으로 삼고, 정자 주위에 녹음으로 우거진 老松들이 더 없이 푸르고 싱싱하여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한다.

金麟이 官界에서 은퇴한 후로는 많은 선비들이 이 동백정에 모여 학문을 講磨하고 詩人墨客들이 음품영월하면서 詩才를 겨루기도 하였다고 전해 내려오니 이는 필시 主賓이 서로 소요하면서 여중동락하였음이 분명하다. 생각건대 太平盛世가 되니 文章家들이 오래도록 품었던 關羽, 張飛가 桃李園에서 다짐하듯 誼로써 사귀었을 것이 분명하다. (冬柏亭 金奉圭 爲한 八道文章家들이 지은 모음집 책이 있음.)

또한 이 정자는 王子師傳 朴光前 이 지은 記文에 따르면 “桐村 金麟의 후손인 光澤과 成章이 나와는 從遊한 벗으로 記文을 청하기에 지었다”는 年度가 宣祖 癸未(1583)이므로 이 무렵에 그들이 重建하고 나서 記文을 청하였을 성싶고, 그후 壬辰倭亂(1592)이 일어나기 전부터 주숙인 判書公 金億秋 廬侯公 萬秋 등과 함께 弓術을 연마하던 활터로도 이용되었다 한다.

여기에서 金成章 등이 重建했다는 것을 뒷받침할 증거로 淸州金氏 大門中 『傳掌記』에 따르면 1583년에 朴光前이 記文을 지은 203년 후인 丁未(正祖 11년, 1787) 12월 28일에 文契를 치르면서 禾穀 12石 10斗中 2斗를 동백정하기로 除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중건한 亭子가 200여 년 동안이나 서 있다는 것 같다.

현 건물은 高宗 壬申(1872)에 후손 金潤賢ㆍ金履漢 등이 중심이 되고 一門둘이 서둘러서 重建된 건물로 그후 乙未(1895)에 후손 金履漢이 서둘러 重修하였으며, 또 한 차례 지난 1986년 金鍾換ㆍ金鍾根ㆍ金光源 등이 主幹하여 重修한 것으로 正面 四間, 側面 二間의 맞배지붕이며, 平面 구성은 서쪽으로부터 전면에 누마루 一間과 후면에 방 一間, 다음 中央間에는 전후로 툇마루를 두고 가운데에 방을 그리고 끝으로는 증축된 부분까지 대청으로 꾸몄으며 전체적으로 평면형태가 특이하고 복잡하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 형식이며 초석은 자연주초석을 놓았고 기둥은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위로는 공구 구성없이 창방을 걸고 主頭를 놓았으며 창방 위로는 柱間마다 3具씩의 소로받침을 두었다. 架構는 5樑架이며 측면 중심으로부터 大樑 위로는 충량을 걸었으며, 처마는 모두 부연을 둔 겹처마이다.

건축양식이나 그 당시 문인들의 업적, 왕래 등을 고려한다면 문화적인 가치가 매우 농후하다고 사료된다. 虎溪마을 洞契案을 보면 肅宗年代(1715)에 淸州金氏를 비롯한 한 마을 上ㆍ下民들이 참여한 大同契의 모임터로도 쓰이고, 마을 別神祭의 준비장소로 이용되면서 洞亭의 역할을 하였다 한다. (大同契와 大洞契의 구별, 별신제 설명)

동백정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순탄치 않은 逆境이 있었다. 1935년경 동백정을 비롯한 門中山, 祭閣, 田畓 전부가 법원의 競賣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虎溪ㆍ獐項 사람들 중에서 누구하나 이를 걱정하고 해결할 사람이 없었고 뜻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중 金奉圭, 金鍾宅 父子께서 私財를 모두 털고 家具도 팔고 또한 金鍾宅의 妻家 소유 黃牛 一頭까지 팔아 競賣資金을 마련하여 元 債權者인 安洪天 씨를 찾아가 그간의 모든 사정과 애원하는 심정으로 자세한 이야기를 하였더니 安洪天 씨께서도 개인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門中을 위하여 이렇게 큰일을 한다면서 크게 감동하여 쾌히 승낙하여 金奉圭씨 父子에게 競落하여 주었다. 그렇다고 이 분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도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안홍천 씨 녹음보유)

그리하여 同門中山, 祭閣, 田畓을 競落받아 개인의 소유로 登記하지 않고 門中에 喜捨하였다. 이 사건은 그 당시에는 청주김씨들이나 他姓들에게까지도 많이 알려졌으나 지금은 일부 老人들만 알고 있다.

또한 동백정 동산에 수백년 된 老松이 울창하게 生長되어 있던 중, 1970년 초에 特定人이 이 老松을 長興郡 山林組合을 통하여 산판업자(長東面 居開里 거주)에게 賣渡하였으나 그 후 이 소식을 들은 金光源이 장흥군 산림조합에 異議를 제기하여 원 상태로 환원시킨 바 있다. 이로 인하여 金光源 兄弟를 장흥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으며 모략ㆍ중상ㆍ비방 등으로 대처하였으나 事必歸正의 원칙에 의거 金光源 씨가 승소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청주김씨들이나 인근 주민들로부터 金光源 씨의 칭찬이 膾炙되고 있다(訴訟記錄 보유). 그리하여 오늘날 동백정이 全羅南道 文化財資料로 지정되고 후손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자아내고 있다.

이밖에는 左贊成公 김린의 비가 1801년 5월 3일에 세워져 있고, 神道碑가 있는데 이는 高宗 丙申(1896)에 후손 金益權이 주동하여 장항마을 앞 川邊에 桐村先祖의 遺德을 기리고자 세웠는데 이 神道碑가 光復 이후에 美駐屯軍들의 소행으로 銃彈 흔적이 7개 남아 판독이 어렵게 되자 지난 1971년에 후손들이 舊神道碑 옆에 새로운 神道碑를 세웠다.

虎溪里의 돌담을 보십시오. 그것은 個人所有 境界線도 되고 옛 선조들의 哀歡이 서려 있는 痕迹도 되며 또 盜賊의 侵犯을 막기 爲하여 쌓아놓은 것이다. 돌담은 確實完固하게 쌓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허술하게 쌓아 놓아야 盜賊이 넘어오다 곧 쓰러지기 쉽게 함이다. 이렇게 이 마을에는 文化的인 素材가 많은데도 아직까지 문화마을이나 觀光性이 있는 生態 구역이 안 되고 있다.

여기 虎溪, 獐項 주민들은 굴뚝이 많은 産業化가 아니라 굴뚝이 없는 文化産業에 눈을 돌려야 한다. 中國의 茶文化를 보십시오. 단순한 貿易商品이 아니라 中國文化를 全世界에 퍼뜨린 소프트파워의 모델이 되고 있다. 오늘 落成式을 갖는 虎溪里 文化藝術會館을 토대로 앞으로 虎溪里, 獐項이 文化마을로 育成되어야 하고 꼭 되어야 한다. 다른 地方에는 素材나 資源이 많아 이를 開發하고 生産하는데 이곳은 特別한 商品이나 資源이 없다. 그러므로 文化的 資源을 찾아내야 한다. 文化라는 것은 人間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精神 속에서 캐내기 때문에 절대로 고갈되지 않는다. 그러나 굴뚝産業은 資源이 고갈되면 망한다.
虎溪, 獐項의 文化的인 것을 찾는다면, 다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古來 數百年前부터 내려온 別神祭
2. 冬柏亭에 관한 內譯과 史實들
3. 永慕齋 건축에 있었던 歷史
4. 고인돌 設置背景과 地理的 要件
5. 三別抄亂의 對抗地 背景
6. 東學亂의 激戰地 歷史的 背景
7. 朝鮮 순조때 全羅道 觀察使 한용구 救恤 흔적
8. 역태지역(옛날 말 기르는 곳) 주변 史實
9. 屛間岩의 由來
10. 마을 인근의 十長生이 있게 된 事由
11. 山亭家屋(書堂)이 建築하게된 動機
12. 虎溪橋 建築하기 前 로도이야기
13. 一名 虎溪川이 獐項 술거리에서 獐項 앞으로 흐르게 된 事由
14. 獐項 앞(술거리에서 황새고개) 길 이야기
(長平, 長東, 熊峙, 會泉 ~ 영암, 병영, 나주)
15. 월만과 虎溪里와의 얽힌 이야기
16. 사곡과 貯水池의 불가분의 관계
17. 동내(洞里) 샘에 얽힌 이야기
18. 虎溪里 돌담 쌓은 內譯과 얽힌 事由
19. 龍頭山과 龍溪川이 相扶相助한 理由


이렇게 많은 文化的인 資源이 있다. 虎溪 獐項 住民들이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1. 병간소를 따라 道路 위에 있는 山은 絶對 훼손해서는 안 되고 建築物도 세워서는 안 됩니다.
2. 마을에 쌓여있는 돌담은 絶對 허물거나 없애서는 안 됩니다.
3. 冬柏亭 위 황새고개 잘린 곳을 메워야 합니다. (불도저로 3일이면 완성될 것임.) 그래야 此後 虎溪里, 獐項에서 人物도 나오고 財物도 많아질 것입니다.
4. 獐項住民들은 冬栢亭에서 虎溪橋까지의 제방둑에 키가 큰 사철나무를 심으면 매우 좋을 것입니다.
5. 獐項 住民들은 동쪽에 있는 崔氏 집 뒤 못생긴 바위를 없애야 합니다.
6. 虎溪 住民들은 前에 있던 당산나무(도로변) 있는 곳에 제2의 당산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7. 虎溪里 마을 주위는 될 수 있는 한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합니다.
8. 冬栢亭 밑 沼는 될 수 있는 한 넓고 깊게 工事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끝으로 結論을 말씀드리자면, 이상에서 말씀드린 여러 文化資源을 토대로 이제 虎溪里 文化藝術會館이 完工되어 모든 遺物과 고증 資料가 蒐集 진열되었으니 보성 녹차밭 觀光圈, 강진 도요 및 다산유적圈을 있는 벨트의 中心으로 이 地域 觀光資源을 最大한 活用하여야 한다.
이곳을 發展시키기 위하여서는 事業推進委員會(郡關係者, 郡議員 2명, 道議員, 全南道廳 關係者, 全南大, 朝鮮大, 湖南大 關聯敎授 等) 構成하여 所期의 目的을 期必코 達成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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