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춘/전남대학교


1. 서론
2. 淸州 金氏의 由來 및 世系圖
3. 호계리 소장 교지
4. 功臣都鑑과 振武原從功臣錄券
5. 결론 및 제언


1. 서론

본 연구는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청주 김씨 가에 대대로 전승하고 있는 교지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金希敏에게 功臣都鑑에서 내린 󰡔振武原從功臣錄券󰡕을 분석한 글이다.

2. 淸州 金氏의 由來 및 世系圖

청주 김씨는 大輔公 金閼智의 후손으로 신라의 宗姓이다. 원래 청주는 마한 땅으로 백제시대에는 상당현이라 하였고, 낭비성(娘臂城)으로도 불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이후로 지방행정조직이 9주 5소경(九州五小京) 제도로 정비되면서 신라 신문왕 5년(685)에 하식 김원태를 서원소경(청주)에 처음으로 소경장관을 삼으며 도민정책에 의해 경주중앙귀족을 집단이주하게 하고 함께 파견되었던 외관들도 임지에서 그대로 정착하도록 하였다. 후삼국시대에는 지방 세력이 가장 강한 청주지역에서 金勤謙은 왕건의 고려 건국에 선력부위한 개국공신으로 수사도삼중대광의 벼슬을 받았고, 김언규는 고려개국 충현지사로서 첫 조각자리에 등용되었다. 김극진의 두딸은 각각 고려 혜종과 정종이 왕비로 삼은바 있으며, 김근겸의 7세손으로 김덕겸은 고려 전기에 근 세력을 떨친바 있다. 김병종과 김희일은 사촌간으로 당대등직을 지냈고, 김희일은 현재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두사 청종간(청주시 남면로 이가 소재)의 주건을 맡아 완성하였다. 고려 중기에 김보는 섭교위를 거쳐 금오위대장군을 지냈으며, 무신난 이후로는 청주 구봉산하 오동촌에서 세거해 왔으며, 그 후손들은 전라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등지로 분산 전거해 온 명문의 귀족으로 전해온다.

3. 호계리 소장 교지

3.1 金敬義

父는 溥, 母는 靈光 金씨로 嘉靖 丙午(1546)에 태어나 辛亥(1611) 12月 20일에 졸하였다. 字는 子宜이며, 벼슬은 慶州判官을 지냈다. 死後 天啓 6年(1626) 閏6月 20일에 通政大夫刑曹叅議에 추증되었으며(그림 1), 두 번째 부인인 水原 白氏 역시 天啓 6年(1626) 閏6月 20일에 貞夫人에 추증되었다(그림 2).

3.2 金希敏

父는 金敬仁, 母는 晋州 河氏이며, 萬曆 壬午(1582)에 태어나 甲戌(1634) 正月 1일 졸하였다. 원래 生父 金敬義와 母 光山 金씨 사이에서 3남 1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나 伯父인 金敬仁에 出系하였다. 字는 汝一이며, 萬曆 34년(1606) 武科에 합격하여 萬曆 45년(1617)에 正五品인 忠義校尉(그림 1), 萬曆 46년(1618) 正月 從四品인 定略將軍(그림 2, 3, 4), 萬曆 46년(1618) 5월 慶尙道 所非浦權管(그림 5), 萬曆 48년(1620) 從三品인 保功將軍(그림 6)이 되었다. 仁祖 2년(1624년) 李适의 亂이 일어나자 都元帥 張晩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서울 근교의 길마재(鞍峴)에서 李适의 군을 대패시켜 반란 평정에 큰 공을 세웠다. 이괄의 난이 완전히 평정된 후 김희민은 振武原從功臣 1等의 功을 인정받아 한 계급이 加資되어 正三品 禦侮將軍이 되었고, 이때 下賜받은 󰡔振武原從功臣錄券󰡕이 현재 호계리 청주 김씨가에 소장되어 대대로 전승되고 있다. 이어 天啓 6년(1626) 全羅道左水營虞侯가 되었고(그림 7), 崇禎 3년(1630) 錦南 鄭忠信 장군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椴島12)에 있는 胡賊들을 격파하였으며, 崇禎 6년(1633) 11월 廣梁鎭 僉節制使가 되어(그림 8) 明將 牟承錄과 함께 椴島에 있는 殘賊들을 토벌하다가 崇禎 7년(1634) 正月 一日 陣中에서 순직하였다.

3.3 金聲一

父 金希敏과 母 草溪 卞氏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次男으로 生沒年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위로 두분의 누님이 있고, 한동안 嫡子가 없었던 金希敏이 金希達의 次男 金益振(1601∼?)을 系子로 맞이한 이후 聲一과 聲運이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그의 형인 益振과 본인, 동생 聲運이 仁祖 6년(1628)년 실시한 武科에 모두 급제한 것을 고려해 볼 때 1605년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崇禎 元年(1628) 5월 武科에 급제하여(그림 1) 동년 10월 8일 正九品 效力副尉가 되었고(그림 2), 여러번 진급하여 왕을 近侍하는 宣傳官이 되었다. 특히 그는 廣梁鎭 僉節制使인 父 金希敏이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의 椴島에 있는 殘賊을 토벌 중에 1634년 진중에서 순직하자 천리를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長興郡 安良面 蓼谷의 고향산에 安葬하였다.

3.4 金聲運

父 金希敏과 母 草溪 卞氏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3男으로 生沒年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위의 金聲一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위로 두 분의 누님이 있고, 系子인 長兄 益振(1601∼?)과 親兄 聲一과 함께 仁祖 6년(1628)년 실시한 武科에 모두 급제한 것을 고려해 볼 때 1605년 전후로 출생하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는 崇禎 元年(1628) 5월 武科에 급제하여 동년 10월 8일 正九品 效力副尉가 되었고(그림 1), 여러 번 진급하여 왕을 近侍하는 宣傳官이 되었다.


3.5 金益徽

父 金希達과 母 寶城 宣氏 사이에서 3남 1녀 가운데 長男으로 萬曆 戊戌(1598)에 태어나 丁未(1667) 正月 15일 졸하였다. 字는 君美이다. 崇禎 원년(1628) 5월 武科 乙에 及第하여(그림 1) 崇禎 원년(1628) 10월 承義副尉(그림 2)로 처음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어 順治 원년(1644) 4월 效力副尉 守門將(그림 3), 順治 원년(1644) 7월 修義副尉(그림 4), 順治 3년(1646) 6월 21일에는 宣略將軍行龍驤衛副司果武臣兼宣傳官(그림 5), 順治 4년(1647) 정월에는 秉節校尉行龍驤衛副司果武臣兼宣傳官(그림 6), 順治 4년(1647) 11월에는 保功將軍行武臣兼宣傳官(그림 7), 順治 4년(1647) 10월에는 敦勇校尉行武臣兼宣傳官(그림 8), 順治 4년(1647) 10월 忠毅校尉(그림 9), 順治 5년(1648) 정월 7일 禦侮將軍行鏡城13)鎭管防垣兵馬萬戶(그림 10) 등을 지냈다.

4. 功臣都鑑과 振武原從功臣錄券

4.1 功臣都鑑과 功臣錄券

4.1.1 功臣都鑑

공신도감은 조선시대 공신 책록을 위하여 그 업적 등을 조사하던 임시관서로 1392년(태조 1) 8월에 처음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1434년(세종 16)부터 공신도감을 공신들의 관부로서 충훈사(忠勳司)라 개칭하고, 다시 1454년(단종 2) 충훈부(忠勳府)로 승격시켜 공신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공신을 정할 일이 있으면 임시로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여기서 의정부·삼사(三司)와 함께 봉군(封君) 대상자 훈공(勳功)을 심사하여 1·2·3등으로 나누어 훈호를 내리게 하였다. 공신도감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공신들에게 녹권을 찍어 사급(賜給)하여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기 위해 비교적 일찍부터 활자 새기는 장인과 인쇄용 물자를 갖추고 운영해왔는데, 이와 같이 공신도감의 장인들이 각종 녹권(錄券)과 회맹록(會盟錄)을 찍기 위해 만든 목활자를 공신도감자(功臣都監字)라고 한다. 이 공신도감자의 성격은 당시의 훈련도감자 및 실록자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공신도감은 일찍부터 활자를 새기고 인쇄하는 장인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실록청이 1603년(선조 36)에 역대 실록을 찍을 때 협조하여 주기도 하였다.

현재 공신도감자본으로는 1605년 인출의 󰡔호성원종공신녹권(扈聖原從功臣錄券)󰡕과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1625년(인조 3) 인출의 󰡔정사원종공신녹권(靖社原從功臣錄券)󰡕과 󰡔진무원종공신녹권(振武原從功臣錄券)󰡕, 1628년 인출의 󰡔영사원종공신녹권(寧社原從功臣錄券)󰡕과 󰡔19공신회맹록(十九功臣會盟錄)󰡕, 1646년 인출의 󰡔영국원종공신녹권(寧國原從功臣錄券)󰡕과 󰡔20공신회맹문(二十功臣會盟文)󰡕 등이 남아 있다.


4.1.2 功臣錄券

고려‧조선시대에 공신을 책봉하고 이들의 공훈을 등재하여 공신수봉자(功臣受封者)에게 분급(分給)한 문권(文券). 현존 최고본으로 이화(李和)에게 지급한 개국공신녹권이 있다. 공신책봉의 제 과정은 왕조실록에 많이 서술되어 있는바 즉, 각 시대의 공신을 책봉하게 되는 전말과 공신녹권에 표기된 내용으로서 주장 관서인 도감의 설치, 공신 대상원의 절목 선정과 포상 절차 및 상작의 의정, 녹권의 작성과 이의 반사(頒賜), 예문관에서 공신호와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마련하는 일, 공신을 책봉하고 부대적인 행사로서 예조를 주장 관서로 하여 집행되는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와 공신연 및 제익일(祭翊日)의 반축례(頒軸禮: 入叅功臣과 嫡長孫이 手決한 공신회맹록과 화맹제문을 頒賜받는 일)를 마치고, 참제신구공신(叅祭新舊功臣)과 집사관(執事官) 및 백관이 전정(殿庭)에서 왕의 향연을 받는 사온사(賜倍事) 등 다양하다. 특히,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는 해당 공신들의 책봉 전말을 일정별로 구체적으로 기록, 보존하여 공신에 관한 법전적 근거가 되는 구실을 하였다.

조선 초기 공신책봉의 통할 관서는 이조이며, 공신도감과 함께 양사가 주관하였다. 공신전담 관부로서 충훈부(忠勳府)가 설립된 이후 공신책봉이 필요할 때 녹훈도감을 개설하였다. 이곳의 주무자(主務者)는 도감관(都監官)이었다. 이들 전담 관서는 이조·예조 등 유관 관서와 연결, 모든 과정을 추진하면서 공신녹권의 반사와 그 부대 행사를 마칠 때까지 업무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각 공신책봉의 전 과정을 <녹훈도감등록(錄勳都監謄錄)>으로 작성하였다. 공신 관부인 충훈부에서도 <충훈부등록(忠勳府謄錄)>에 중요한 일들을 기록하였다. 조선시대는 개국공신을 비롯, 28회에 걸쳐 공신을 책봉하였다.

녹권의 삭탈을 보면, 연산조의 위사공신(衛社功臣: 처음은 保翼功臣)은 선조 10년 전원이 삭탈 당하였다. 광해조의 위성공신(衛聖功臣)·익사공신(翼社功臣)·정운공신(定運功臣)·형난공신(亨難功臣) 등은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모두 폐적(廢籍)당하였다. 경종대의 부사공신(扶社功臣)도 영조가 즉위하자 폐적되었다. 이 밖에 추후에 삭탈 또는 적몰(籍沒)되어 공신호와 녹권을 잃은 자는 상당수에 달한다. 조선시대 실명공신의 총수는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 : 영조대에 충훈부에서 편찬)에 따르면, 701인으로 되어 있다.

4.2 振武原從功臣錄券

4.2.1 녹권의 발급 배경

李适(1587∼1624)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규(白圭), 병조참판 육(陸)의 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좌랑, 태안군수를 지냈다.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기 직전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 축출을 결심,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유(金瑬)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仁祖)을 새 임금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반란계획이 누설되자 망설임 끝에 합류 장소에 늦게 도착한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瑬)를 베려다가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는 등 김류(金瑬)와의 갈등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인조반정 뒤 한성판윤·포도대장의 벼슬을 받는 데 그치자 불만이 더욱 커졌다. 같은 해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방에 파견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천거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었다. 왕에게 포차(砲車) 사용과 요충지 방어를 건의한 뒤, 평안도 영변에 나아가 군사를 훈련시키고 성책을 고치는 등 국경경비에 힘썼다. 3개월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봉해졌다. 인조반정 뒤 공신들간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1624년 아들 전(旃),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등과 함께 반란을 꾀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괄은 인조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므로 심문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영변의 군중(軍中)에 머물고 있던 아들 전은 모반의 사실여부를 가린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붙잡혀 가게 되었다. 이에 쌓였던 불만이 폭발, 서울에서 파견된 의금부도사 고덕상(高德祥), 선전관 김지수(金芝秀) 등의 목을 베고 휘하의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역시 모반혐의로 서울로 압송되고 있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간에서 구출한 뒤 서울로 진격, 황주·마탄·임진 등에서 관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서울을 점령했으며,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다음날 뒤쫓아 온 장만 등의 관군에게 파주 길마재에서 크게 패하여 광주·이천으로 후퇴하던 중 부하 장수 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翼獻) 등에게 죽음을 당했다.

4.2.2 振武原從功臣錄券

1) 녹권의 형태사항

振武原從功臣錄券 / 振武錄勳都監(朝鮮) 編
木活字本(功臣都監字 混入 訓鍊都監字)
振武錄勳都監, [天啓5년(1625) 9月 1日]
1冊(77張) : 四周雙邊, 半葉匡郭: 26×17.8cm, 10行18字(注雙行), 版心: 上下內向3葉花紋魚尾 ; 33.6×22cm.
印: 施命之寶.
卷首: 天啓五年(1625)七月二十六日 右承旨臣李楘敬奉.
卷末: 天啓五年(1625)九月初一日 左副承旨臣李植敬奉.


󰡔振武原從功臣錄券󰡕은 功臣都鑑에서 만든 목활자본 1책으로 선장 형태로 제책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33.6×22cm이다. 표지의 서명은 '振武原從功臣錄券'으로 墨書되어 있고, 권두서명은 '振武原從功臣錄券'이다.

이 책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쌍변으로 되어 있으며, 반곽의 크기는 26×17.8cm로 계측된다. 그리고 반엽을 기준으로 모두 10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행에는 18자씩 배자되어 있다. 인쇄면에는 계선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으며, 계선이 상하의 변란과 떨어져 있어 활자본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로 3엽화문어미가 내향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계선과 어미가 떨어져 있어 또한 활자본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책 전체가 부식이 심한편이다.


2) 녹권의 체제 및 내용

󰡔振武原從功臣錄券󰡕의 체제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가) 녹권의 첫 부분

○ 卷首題: 振武原從功臣錄券
○ 수취자명: 萬戶金希敏
○ 문서발급의 목적: 천계5년(1625) 7월 26일 우승지 李楘이 전지를 받들음
○ 印: 施命之寶


나) 본문

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은 녹권의 핵심 내용이 담겨있는 부분으로 <李适의 亂>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을 크게 3등급으로 분류하여 총 6176인의 명단이 실려 있다.

○ 振武原從功臣一等: 昇平府院君 金瑬 등 640인
○ 振武原從功臣二等: 折衝 許詳 등 1082인
○ 振武原從功臣三等: 折衝 姜進伯 등 4454인
○ 인: 施命之寶

다) 녹권의 끝부분

문서의 발급일자와 포상내용, 발급기관, 담당관원의 職銜과 성씨 등이 수록되어 있다.

○ 문서의 발급일자: 천계5년(1625) 9월 1일 좌승지 신 이식경봉
○ 포상내용: 각 등급에 해당되는 포상내용을 자세히 언급
○ 발급기관: 振武錄勳都監
○ 담당관원의 職銜과 성씨:
堂上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輔國崇祿大夫玉城府院君臣張晩
堂上竭誠奮威出氣振武功臣嘉義大夫晉陽君臣柳孝傑
郎廳奮忠贊謨靖社功臣通訓大夫行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臣兪伯曾

郎廳奮忠贊謨靖社功臣通訓大夫行議政府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臣朴炡

監校郞廳通訓大夫行掌評臣柳英

監造官通訓大夫行義盈庫直長臣張志漢


5. 결론 및 제언


○ 대대로 무과 출신이 많아 문집이 없는 관계로 관련 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나, 김희민 등에게 내린 敎旨 및 󰡔振武原從功臣錄券󰡕 등은 청주 김씨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 1張: 振武原從功臣一等에 들어있는 '漢南都元帥■■■' '洛興君■■■'와 같이 성명을 加墨하여 삭제하였다. 校勘 결과 1644년 반란죄로 처형된 '漢南都元帥沈器遠'14)과 1651년 역모죄로 처형된 '洛興君金自點'15)으로 역모로 인해 삭제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고려해 볼때, 加墨 시점은 1651년 이후임을 알 수 있다.

○ 2張: '前萬戶金希敏'에 簡紙가 있는데, 후손이 공경의 표시로 붙인 것으로 보임.

○ 이 책은 功臣都鑑字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활자의 부족으로 인해 훈련도감에서 만든 목활자(훈련도감자)를 혼입하여 인쇄하였다.

○ 책의 상태는 권수의 1장과 권말의 6장 정도가 책의 아래 부분이 부분 탈락이 있어 판독불가능 상태이며, 전체적으로도 책의 지질 및 본문의 내용이 매우 약화된 상태이다. 그뿐만 아니라 호계리에 소장하고 있는 교지를 포함한 모든 고문서와 문헌들이 보관 시설의 미비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부식이 진행되고 있으며, 지질 또한 매우 약화된 상태이므로 보존처리가 시급한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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