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 문학평론가

출처: http://www.namdou.com/%B5%BF%B9%E9%C1%A4%C0%C7%20%B9%AE%C7%D0%BB%E7%C8%B8%C7%D0%C0%FB%20%BF%AC%B1%B8.htm


<목 차>

Ⅰ. 서론

Ⅱ. 부산면 지역의 사회문화적 특징

Ⅲ. 부산면 지역의 누정과 시회 양상
1. 누정의 현황
2. 시회의 현황과 시회 활동 양상
가. 난정회(蘭亭會)
나. 풍영계(風詠契)
다. 상영계(觴詠契)
라. 정사계(亭 契)

Ⅳ. 동백정의 문학과 시회 활동
1. 동백정의 문학 활동
가. 활동 문인
나. 기문(記文)과 시문(詩文)
다. 시문집
2. 동백정의 시회 활동
가. 동백정에서의 시회 양상
나. 동백정에서의 시작(詩作) 활동
다. 지역 시회에서 동백정의 역할

Ⅴ.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기능과 의의
1.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기능
2.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의의

Ⅵ. 결론

〔참고 문헌〕

Ⅰ. 서론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일어나는 감흥을 노래나 시로 표현했다. 한자로 문자생활을 했던 선비들은 한시의 형태로 각자가 자기의 뜻을 드러내어 흥취를 달래기도 했다. 경치를 완상하기 위한 모임이나 연회에서 돌려가며 한시를 짓던 모임은 시회(詩會), 또는 시계(詩契), 시사(詩社)라고 하였다.

선비들이 시회를 가졌던 대표적인 곳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서당이나 학당을 비롯하여, 향교, 서원, 성균관, 독서당 등 교육의 전당이요, 또 하나는 산수나 누정 등 자연의 승지이다. 전자는 독서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이러한 데의 참여로 시우로서의 인연이 맺어지고 그들과 시적 교우의 정의가 깊어져서 시회로서 서로의 정분을 두텁게 하던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 후자는 흔히 유람취승(遊覽取勝)이나 은일한거(隱逸閑居)하고자 하여 찾았던 곳이다. 시회는 계회의 조직을 통해 모이는 예가 많았다. 주로 사대부 문인들의 참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문인계회(文人契會)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구로회(九老會), 금란사(金蘭社), 옥계시사(玉溪詩社) 등에 이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등장하여 모든 시사의 흐름을 통합하기도 했는데, 1793년에 한양에서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시회(蘭亭詩會)를 기념하여 연 시회는 유명하다. 그 후로도 1870년대 변진환의 해당루(海棠樓)에서 창립이 된 육교시사(六橋詩社)나 1853년 최경흠(崔景欽)과 유재건(劉在建)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직하시사(稷下詩社) 등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서울에서는 우이시회(牛耳詩會)나 난사시회(蘭社詩會) 등이 있어서 작시를 하고 있기도 하다.

경상북도 안동 하회에서도 매년 음력 7월 백중 무렵이면 부용대 밑을 흐르는 강 위에서 불꽃놀이를 하며 선유시회(船遊詩會)를 가지기도 했다.

누정에서 시사의 결성은 호남 지역은 16세기에도 있었다. 나주 금사정(錦沙亭)의 십일계회(十一契會), 창주정(滄洲亭)의 진솔회(眞率會), 담양 지정(池亭)의 백발회(白髮會) 등이 호남 누정 시단의 발전에 기여한 주요 시사로 주목된다. 시사는 근대 후기 내지는 20세기초에 이르러 한층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전남지역에서는 지리산을 끼고 있는 구례지역이 가장 활발하다. 매월음사(梅月吟社)나 용호정시계(龍湖亭詩契), 운흥정시사(雲興亭詩社), 방호시사(方壺詩社), 반천시사(蟠川詩社) 등이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목포에는 유선시사(儒仙詩社), 목포시사(木浦詩社) 등이 있는데 목포시사는 최근까지 춘추 200여 회의 시회를 가져왔다. 또한 광산에 있었던 만귀정시사(晩歸亭詩社)나 광주의 해양시사(海陽詩社)도 들 수 있다.

장흥지역 또한 탐진강변의 여러 누정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시회가 존재했었다. 시계(詩契)를 조직하여 매년 정해진 날에 모여 시를 지으며 밤을 새기도 했다. 1853년에 창립된 난정회(蘭亭會)를 비롯하여 1924년에 조직이 된 풍영계(風詠契)와 1962년에 조직된 정사계(亭 契), 그리고 창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영계(觴詠契) 등 다양한 시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학세대의 퇴조로 작시모임이 친목모임으로 변질은 되었지만, 이 중에 풍영계나 정사계는 최근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1580년대에 중건된 장흥 동백정(冬柏亭)을 중심으로 한 문학활동과 탐진강변 정자들, 예컨대 용호정(龍湖亭), 경호정(鏡湖亭), 독우재(篤友齋), 부춘정(富春亭), 농월정(弄月亭), 서륜당(敍倫堂) 등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던 시회의 조직과 운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아보겠다.

동백정을 거쳐간 많은 문인들과 그들이 왜 동백정에 머물며 문학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그들이 남긴 시문과 기문을 분석해 보고, 또한 동백정과 그 주변의 정자들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교유 양상과 시회의 운영에 관해서도 문학사회학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시회의 양상에 대해 자세히 궁구해 보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남아 있는 동백정의 누정제영과 시회에서 생산되었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범위를 한정하고, 시회는 창립 취지와 회원, 수계일과 장소를 중심으로 알아보되 남아 있는 시축을 중심으로 시회에서 생산되었던 작품 등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겠다.

전남 지역의 가단이나 누정, 누정제영에 관한 연구는 정익섭, 박준규 등의 업적이 남아 있으며,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에서는 1985년부터 91년까지 7년여에 걸쳐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하여 천착한 바가 있다. 그 결과물이 {호남문화연구}14집부터 20집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시회나 시사에 관한 선행연구로는 강명관의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등에 이어 그 외의 연구 논문들이 있다.

Ⅱ. 부산면 지역의 사회문화적 특징

부산면(夫山面)은 전라남도 장흥군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장흥군 3읍 7면 중 하나로 동쪽으로는 장동면, 남은 장흥읍, 서는 유치면, 북으로는 유치면과 장평면에 닿아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수령현(遂寧縣)의 일부에 속했고 1414년(조선 태종14년) 현재의 부산면에 속한 용반, 지천, 금자, 호계리가 용계면(龍溪面) 관할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계면의 호계(虎溪), 효자(孝子), 금장(金莊), 관한( 閑), 성자(成子), 홍단(洪丹), 용동(龍東), 용서(龍西), 심천(深川), 유정(柳亭), 지동(枝洞)의 11개 동리와 부동면(府東面)의 행내리(杏內里) 일부를 병합하여 부산면을 이루었다. 지금은 내안, 구룡, 유량, 지천, 용반, 금자, 호계, 기동, 부춘의 9개 법정리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용호정이나 독우재 등의 누정이 있는 용반이나 금자, 또는 호계가 한 때는 부산면이 아닌 용계면이라는 다른 행정 구역으로 되어 있었다가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부산면으로 재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호계마을과 호계천이라는 냇가를 사이에 두고 있는 동백정만큼은 인근의 장동면에 편입됨으로써 면의 소재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동백정은 소유권이나 생활권이 모두 호계리의 청주김씨 문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면의 북쪽에는 용두산(龍頭山)이 있고 전남의 3대 하천 중 하나인 탐진강(耽津江)이 영암군 금정면의 국사봉에서 발원하여 면의 중심부를 흐르고 있다. 탐진강은 유치면, 부산면, 장흥읍에 이르기까지 대소 20개 하천이 합류되어 사인암(舍人巖)에 이르러 영암군 월출산에서 발원한 금강천과 합류하여 강진만으로 흐르는 총연장 56㎞의 강줄기이다. 이를 일명 예양강(汭陽江)이라고도 하는데 강유역에는 용반들, 부산들 등의 비옥한 평야가 전개되어 있어 농산물이 비교적 풍부하다. 최근에는 부산면 지천리와 유치면 일대에 탐진댐이 축조되어 전남 서남부 지역의 식수원으로 사용할 예정으로 저수를 하고 있다.

부산면에는 자작일촌의 동족마을이 많다. 용반리의 낭주최씨(朗州崔氏), 용반리, 금자리의 인천이씨(仁川李氏), 기동리의 장흥위씨(長興魏氏), 호계리의 청주김씨(淸州金氏), 유양리 용동의 진주강씨(晋州姜氏), 내안리와 구룡리의 영광김씨(靈光金氏), 내안리, 구룡리, 부춘리의 청풍김씨(淸風金氏), 구룡리의 강릉유씨(江陵劉氏) 등이다. 이들 성씨는 대부분 각자 자기의 누정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의 조성은 용반리가 고려시대에 성촌이 되었고 대부분은 조선초나 중엽에 성촌이 되어 동족마을을 형성한 듯하다.

이 지역은 역사의 소용돌이 때마다 그 격랑의 한 복판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이 나와 의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전남 지역의 동학의 포접(包接) 61개 중 부산면에 용반접과 부산접이 있어서 이방언(李邦彦) 접주가 거느린 장흥 지방 동학군은 부산접, 용반접을 중심으로 관군과 맞서기도 했다. 부산면 금자리에서 출토된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사용했던 대포가 이를 증명한다.

예술은 작자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어떤 작가의 작품이든 그 작품의 밑바탕에는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환경과 조건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품의 사상이나 정조, 표현 형식 등도 예외는 아니다. 백옥과 같이 오염되지 않은 탐진강 물줄기가 구비구비 흘러가며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을 만나 빚어내는 절경은 저절로 시심을 일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절경 속에 선인들은 누정을 앉히고, 그 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시국을 논했을 것이다. 탐진강을 따라 펼쳐진 10여 개의 누정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머무르게 한다. 유치면을 거쳐 부산면의 중심을 흐르며 부산들을 적시는 탐진강은 빼어난 산수와 기름진 평야를 제공함으로써 이 곳에 터전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순후한 인심을 갖고 의리와 학문에 젖어들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누정을 중심으로 문인들의 시회가 이루어지고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Ⅲ. 부산면 지역의 누정과 시회 양상

1. 누정의 현황

누정(樓亭)은 누(樓)·정(亭)·당(堂)·정사(精舍)·각(閣)·재(齋)·헌(軒)·암(菴)·대(臺) 등의 이름이 있다. 재·헌·암은 주거 공간에 딸린 닫혀진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수반하며, 대는 건축물보다는 높은 장소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단순히 시문 제작의 측면만을 고려할 때는 누·정·당·정사·각에서의 활동이 재·헌·암·대에서보다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전남에는 광주, 담양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 많은 누정이 분포되어 있다. 전남의 누정은 1687개소, 장흥의 누정은 현존 29개, 현재는 없는 누정 55개를 합해서 84개이다.

탐진강은 주변의 경치가 수려하여 강변의 풍광이 좋은 곳에는 많은 누정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용호정(龍湖亭), 경호정(鏡湖亭), 부춘정(富春亭), 창랑정(滄浪亭), 독취정(獨醉亭) 등이 주류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류인 호계천변에는 동백정(冬柏亭)이 있고, 강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사인정(舍人亭)이 있다. 영귀정(詠歸亭)은 유치면에 있다가 탐진강댐이 축조되면서 수몰지가 되어 이설했다. 이 외에도 주변에는 시회를 가졌던 여러 곳들이 있다. 독우재(篤友齋), 서륜당(敍倫堂), 농월정(弄月亭), 감모재(感慕齋), 영효재(永孝齋), 서경당(書耕堂), 영모재(永慕齋), 구음재(龜陰齋), 구양재(龜陽齋), 경모재(敬慕齋), 추원재(追遠齋), 승유재(承裕齋), 첨모재(瞻慕齋), 월만재(月滿齋), 덕림재(德林齋), 즉효재(則孝齋), 반룡재(盤龍齋), 죽림재(竹林齋) 등 이루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편이다. 또한 장흥읍 남산공원에는 영회당(永懷堂)과 최근에 건립된 흥덕정(興德亭)과 수녕정(遂寧亭)이 탐진강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호계마을 뒷산에 있던 병간정(屛澗亭)은 얼마 전에 소실되어 버린 정자이지만 풍영계의 수계장소나 후학 양성의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 중에서 부산면 지역이나 그에 인접한 지역의 누정은 문중의 소유로 자손들이 관리를 하고 있으며 정자별로 돌아가면서 시회를 가졌던 유풍은 지금도 여전하다.

2. 시회의 현황과 시회 활동 양상

탐진강을 끼고 많은 누정이 들어서 있는 장흥군 부산면 일대는 일찍이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아 그들의 시심을 불태웠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문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서 그들은 일정한 날에 정해진 누정에 모여 음풍농월하며 자연을 완상하고 시대를 한탄하는 시회로 발전시켜 나갔다. 조선시대 말에는 금장산가단(金莊山歌壇)이 형성되어 그 중심에 가사 [장한가(長恨歌)]를 지은 우곡 이중전(愚谷 李中銓, 1825∼1893)이 있기도 하였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시회는 1853년에 조직된 난정회(蘭亭會)를 비롯하여 풍영계(風詠契)나 상영계(觴詠契), 정사계(亭 契) 등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부산면 지역에서는 팔정회(八亭會)나 향사회(鄕社會)와 더불어 낙양회(洛陽會), 죽계회(竹溪會) 등의 이름도 나오나 이 지역에 실재로 존재한 시회였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20세기를 전후하여 금계 이수하의 뒤를 이은 금강 백영윤, 소천 이인근, 만천 김진규 등이 이 지역 출신으로 지역의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효당 김문옥은 1940년대 잠깐 이 곳에 머물면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면 이러한 문인과 제자들이 참여한 다수의 시회들이 운영되었던 듯하다.

가. 난정회(蘭亭會)

난정회는 독우재주인 미천 이권전의 {독우재집유고(篤友齋集遺稿)}에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보면 난정회는 해마다 봄을 맞이하여 경치가 좋은 곳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짓는 모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지회(蘭亭之會)'를 본받아서 '비록 문장은 왕희지보다 못하지만 경치를 즐기는 것은 같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난정회'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왕희지의 중국 회계산 난정에서의 모임이 계축년 봄이었음을 강조하면서, 같은 간지인 계축년(1853년)에 20여인이 모여서 난정회를 창립한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끝 부분에는 7언율시가 실려있는데 진나라의 왕희지를 흠모하며 뜻깊은 시계를 시작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며 즐거워하고 있다.

蘭亭會記

夫會有慕古者多宋富鄭公慕樂天九老之會爲耆英會我東蘇應天慕東坡七月之遊爲赤壁遊今古以來慕古而遊不亦樂乎王逸少蘭亭之會眞古今之勝事也於玆嘗竊有恨不同時之歎矣幸癸丑之暮春適丁今年雖地非山陰年維癸丑則今之遊其猶古之遊乎是月也暮者春服旣成同我人士二十餘輩 往觀乎至其遊也列坐其次者少長也群賢也皆不知其何者爲主何者爲賓也脩 其事者風乎也浴乎也盖取諸其淸斯濯纓斯濯足矣茂林脩竹不下於古地之勝 絲竹管絃亦無具于今夕之嘉會然而暢敍之情足爲一觴一 感慨之志奚係視今視昔吾 雖有愧於逸少之文章而無愧於逸少之勝遊則同年暮春之樂亦一異代蘭亭之會也逸少之陳迹輝映會稽之山水而照人耳目赫赫若前日事今人傳繼豈不同美哉故詠而歸 其事焉末賦四韻

난정회기

모임에 옛사람을 사모함이 많으니 송나라 부정공은 백락천의 구로회를 사모하여 기영회를 만들었고, 우리나라 소응천은 소동파의 칠월에 놀던 것을 사모하여 적벽유를 만들었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옛사람을 사모하여 노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왕일소의 난정회는 참으로 고금에 훌륭한 일이라. 항상 동시대에 함께하지 못함을 탄식하였더니 다행스럽게도 왕일소가 놀았던 계축년 모춘이 마침 금년에 해당되니 땅은 비록 산음이 아니지만 해는 계축년이니 오늘의 놀음이 그 옛날의 놀음과 같지 않겠는가.

이 달 그믐에 봄옷이 완성되면 우리 이십여 인사는 어찌 가서 놀지 아니하랴. 그 자리에 차례로 앉아 있는 이는 젊은이와 늙은이며 여러 현인들이라. 모두 그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며 그 모임을 하는 목적은 바람을 쐬고 목욕을 하는 일이라. 아마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뜻을 취함이리라. 우거진 숲과 긴대가 옛 땅의 경치만 못하지 않고, 거문고 피리 등 여러 악기들이 오늘저녁 모임에 갖추어지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회포를 풀면서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니 그 감격스런 뜻이 지금 사람들이 옛 사람들을 보듯이 하고, 또 후세 사람들이 지금 우리들을 보듯이 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이 왕일소의 문장에는 부끄러움이 있으나 왕일소의 흥취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니 금년 늦봄의 즐거움은 또한 그때의 난정회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왕일소의 옛 자취가 회계산수에 남아 있어 사람들의 이목에 비친 것이 꼭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니 지금 사람들이 그것을 이어가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읊으면서 돌아와 그 일을 서술하며 사운일수를 짓는다.

佳辰適値永和春 아름다운 때가 마침 영화춘을 당하였으니
吾輩風流慕晋人 우리들의 풍류는 진나라 사람들을 사모하네.
芍藥謠傳遺俗舊 작약노래 전해오니 남겨진 풍속이 예스럽고
芳蘭會續此遊新 꽃다운 난정회 이어가니 이 놀음이 새롭구나.
餠生香氣詩成韻 떡에서는 향기가 나고 시는 운치를 이루며
觴引淸波酒到巡 술잔에 맑은술 따르니 잔은 돌고 도네.
是日登山脩 樂 이날 산에 올라 계를 치르는 즐거움을
願將歌鼓奏頻頻 원컨대 가고를 가져다 오래도록 울리고 싶네.

이 시회는 1853년에 창계한 이듬해인 갑인년(1854년) 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는데 이권전의 시 [속난정회]에 잘 나타나 있다. 계축년에 이어서 열린 난정회에서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회원들이 정자에 빙 둘러앉아서 취흥에 겨워 시작을 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續蘭亭會(甲寅暮春)

歌鼓紛紛永夕同 노래소리 어울린 속에 저녁까지 함께 하니
去年餘會又春風 지난해 남은 여흥이 춘풍을 맞아 다시 살아나네.
初逅樽酒傾 綠 처음 술잔을 돌리니 푸르름은 기울고
滿地花枝剪綵紅 천지 가득 꽃가지는 붉은 비단을 재단해 놓은 듯.
衣袖聯携華席上 옷소매 이어대고 앉으니 자리는 더욱 빛나고
江山倒入畵屛中 강산은 그림병풍 속으로 들어오는 듯하네.
逢今不樂何時樂 이 좋은 시절이 아니라면 어느 때 즐길 것인가
半是松陰到老翁 소나무 그늘은 절반쯤 이 늙은이를 덮고 있네.

1847년에 독우재를 창건하고 나서 미천은 이 곳에서 당시의 문우들과 자주 어울렸다. 아마도 이 난정회는 독우재에서 창립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 당시 각 문중 소유의 누정을 돌아가며 시회를 가졌던 것으로 보아, 이 시도 독우재나 1828년에 창건한 용호정, 남평문씨의 소유에서 1838년에 청풍김씨의 소유로 넘어간 부춘정 등에서의 시회 중 하나를 그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폐허 상태로 있다가 1872년에야 중건한 동백정은 난정회 창계 당시에는 이용할 수 없는 누정이어서 동백정에서의 시회는 아니라고 보겠다. 시축(詩軸)이나 그 외의 또 다른 시는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언제까지 이 시회가 이어지고 어느 곳에서 누가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상태이다.

나. 풍영계(風詠契)

풍영계는 1924년 5월 3일 영모재(永慕齋)에서 창립했다. 풍영계안이 남아 있고 지금도 계속 모임은 이루어지고 있다. 창립계원은 모두 15명으로 문낙중(文洛中, 字 道均, 1877년생), 최창희(崔昌熙, 字 鳳集, 1878년생), 최동민(崔東珉, 字 民玉, 1878년생), 김장수(金章洙, 字 章煥, 1879년생), 이행근(李行根, 字 春大, 1879년생), 김석권(金錫權, 字 順度, 1880년생), 임종래(林鍾來, 字 馨振, 1880년생), 강신황(姜信晃, 字 德五, 1881년생), 김병흡(金炳翕, 字 亨彬, 1881년생), 이정권(李正權, 字 允中, 1882년생), 이인근(李寅根, 字 景祉, 1883년생), 백영윤(白永允, 字 重彦, 1884년생), 김태식(金邰植, 字 敬章, 1887년생), 김용규(金容圭, 字 德三, 1886년생), 임승현(任承鉉, 字 奉禹, 1891년생)이 참가했다.

풍영계는 매년 돌아가며 유사를 맡은 이의 누정에서 수계(修契)를 했는데 날을 새워가며 시회를 가졌다. 강신일은 3월 그믐날이며 계안에는 다음과 같은 풍영계 조례가 있다.

조례(條例)

1. 각원은 돈 5냥씩을 수합해서 계를 치른다.
2. 강신일은 매년 3월 그믐으로 한다.
3. 창립회원 외에는 회원을 받지 않는다.
4. 해당유사는 10여일 전에 회의 장소와 회비 납부록을 회원들에게 통지한다.

1925(乙丑)년에 문락중이 유사를 하여 서경당에서 최초로 모임을 가졌고, 다음 해에는 독우재에서 유사를 맡았으며 그 다음해인 정묘년에는 동백정에서 맡았다. 풍영계 장소로 주로 이용되었던 곳은 동백정이나 독우재 등이었다.

풍영계의 시축은 남아 있지 않으나 소천 이인근의 {소천유고}에는 1925년 서경당 풍영계부터 1947년 구음재 풍영계까지 그가 지은 13편의 시가 실려 있으며, 만천 김진규의 {만천시고}에도 1934년 그가 풍영계에 참여하여 지은 7언율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이전에도 때때로 만나 시를 읊던 사람들이 비로소 특정한 날을 잡아 유사를 치르며 계금을 걷어 공식적으로 풍영계란 조직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계속해서 수계는 하고 있지만 시를 지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사회는 갖지 않고 있다.

계답으로는 1931년에 금자리 66번지 논 1두락과 기동리 밭 8두락, 호계리 논 5승락이 있었으나 지금은 기동리와 호계리 것만 남아 있다. 현 회원은 16명으로 후손들이 대를 이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3대째 내려오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風詠契序

夫會人者同而命名取意皆有不同也故有蘭亭香社與夫洛陽竹溪之事是耳惟我鄕隣士友克守世分惠好同歸者 亦不鮮而皆可謂修愼好古之流一歲而四時每 簪一月而旬望且 袖然則聲氣固已相孚豈復有結契爲樂哉然若無定所無期日則殆難齊接矣玆以乙丑春僉議詢同會于一堂以修名案收若干財是緣於會資也而其時卽暮春乃將錫名因其時想古事蓋曾賢詠歸之辰故一言蔽曰風詠詠之義至矣善矣四賢之所撰夫子於點也特許之則其趣味氣像高而遠矣顧此  末學何敢容喙於其間而又望企及於其下當此叔季摘埴迷途無人振作而恐使吾 於箇中風詠才說欲效則庶或近於鄒聖能言拒之訓乎切宜勉之且有一說此樂以暮春會友以友人餞春旣醉旣吟以作二日之樂可謂足矣而如使以千日不足苦短添更爲快則末矣明朝卽行夏之時吾友同來同歸豈不謂從天時解送迎之道也哉

풍영계서

무릇 사람이 모인 것은 동일하되 이름을 명하여 뜻을 취함은 모두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난정회, 향사회와 더불어 낙양회, 죽계회 등이 있다. 우리고을 사우들이 능히 세상의 분수를 지켜 서로 좋은 방향으로 함께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아니하니 모두 몸을 닦고 행실을 조심하며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년 중 사시에 서로 모이고 한 달에 초하루 보름으로 소매를 연하니 그렇다면 성기가 이며 서로 통하니 어찌 다시 계를 결성하여 즐거움을 추구하랴. 그러나 만일 일정한 장소와 기일이 없다면 함께 만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을축년 봄에 여럿의 의논이 동일하여 한곳에 모아 계명부를 작성하고 약간의 계금을 거두니 계의 자본금을 만들기 위함이라. 그때가 곧 늦봄인지라. 이에 계이름을 짓되 그때로 인하여 옛일을 상상해 보니 증석이가 읊으며 돌아온 때라. 그래서 한마디로 풍영회라 이름하니 풍영이란 뜻이 지극히 좋음이라. 사현의 말 가운데 공자가 증점을 특별히 허용한 것은 취미와 기상이 높고 멀어서이다.

돌이켜보면 하잘 것 없는 사람이 어찌 그사이에서 입을 놀릴 수 있으며 또 그 아래라도 미치기를 바라겠는가. 이 말세를 당하여 어지러울 때에 어느 사람하나 진작시킴이 없어 우리 무리들로 하여금 풍영으로 본받게 하면 맹자께서 말씀하신 "말만 잘하는 사람은 거절한다"는 가르침에 가깝지 않겠는가. 절실히 힘써야 할 것이다.

한 말씀을 더하자면 늦봄에 벗을 모으고 벗과 함께 봄을 보내어 취하고 읊어서 한 이틀쯤 즐기면 만족할 것이거늘 혹 여러 날도 부족하게 여겨 여러 날을 놂으로써 쾌족함을 삼는다면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내일 아침이면 곧 여름이 시작하는 때라. 우리 벗들이 함께 와서 함께 돌아가니 어찌 천시를 따르고 보내며 맞이하는 방법을 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이 서문에는 풍영계란 이름을 명명한 이유부터 시기 운영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내력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가 있다.

일년 중 사시에 서로 모이고 수시로 한 달에 초하루 보름으로 무작정 만나다 보니 일정한 날과 장소를 정할 필요를 느껴서 계금을 거출하여 비로소 체계적으로 운영하게 된 것이다. 명칭은 공자의 제자인 증점의 일화에서 취했으며 또한 계일이 농번기로 들어서는 늦봄이므로 1박 2일도 아껴 천시에 맞추려는 배려도 엿볼 수 있다.

풍영계는 대를 이은 회원들이 18곳의 장소를 돌면서 62회의 모임을 가지며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풍영계책이 두 권이 있으며 여기에는 풍영계 조례가 실려있고 매년 수계를 하여 계금을 정리한 내용과 장소, 강신일, 참가자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시회에서는 동백정과 독우재의 역할이 컸다고 보여지는데, 이는 역시 동백정의 김진규나 독우재의 이인근과 같은 문인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인근이 풍영계 시회에서 남긴 세 편의 시를 소개해 본다.

乙丑暮春晦日會于書耕堂 - 을축년 늦봄 그믐날 서경당에 모이다

殘花飛蝶謝靑陽 쇠잔한 꽃에 나는 나비 봄을 보내니
樽酒詩筵 恨長 술 마시며 시를 읊조리니 슬픈 한이 남아있네.
寒士同懷遙往跡 빈한한 선비 같은 마음 옛 자취 아련하고
故人宿契 淸香 친구와 맺은 오랜 계는 맑은 향기 간직했네.
愼他世外千尋浪 저 세상 밖 천길 풍랑을 조심하고
養我胸中半畝塘 나의 가슴속엔 조그만 양심을 기른다네.
此會年年風致美 이 모임 해마다 운치가 더욱 아름다우니
名亭隨處借辰良 명정은 곳을 따라 어느 때인들 좋지 않으리오.
1925년(을축년) 이인근

丙寅三月晦日篤友齋暢懷 - 병인년 삼월 그믐날 독우재에서 회포를 풀다

花已成泥柳拂烟 꽃은 이미 지고 버들이 안개에 흔들리니
高軒詩酒坐群仙 높은 초당엔 술과 시 속에 뭇신선 둘러있네.
松濤剩送長鳴  소나무 바람은 길게 우는 피리소리 보내오고
山雨 添未斷泉 산 비는 솟는 샘물 끊기지 않게 하네.
可惜殘春無奈別 애석하다 남은 봄을 어찌할 수 없으니
願言今夜不須眠 원컨대 오늘밤은 잠을 이루지 말게나.
聊將遊樂相尋約 오로지 유락을 가져다 서로 찾으니
人事天時似舊年 사람의 일과 하늘의 때가 지난해와 같구려.
1926년(병인년) 이인근

冬栢亭風詠會暢和丁卯三月二十九日 - 동백정 풍영회에서 회포를 풀다

晩拾殘紅拖出門 붉게 지는 꽃가지 나는 문에 걸쳐 있으니
郭南斜日訪溪村 노을녘에 성남의 시내마을 찾아드네.
爰流石瀨穿籬近 느리게 흐른 돌여울은 울타리 밑을 지나가고
老大庭梢覆閣昏 잘 자란 뜨락에 나뭇가지는 집을 덮어 어둡네.
每到良辰元有會 매양 좋은 때를 당하면 원래 모임이 있었으니
幾回行夜只勞魂 몇 번이나 홀로 있는 밤 꿈을 꾸었던가.
層欄斗酒孤燈夕 높은 난간 외로운 등불아래 술잔을 기울이며
舊誼新篇各細論 옛정과 새로운 시로 서로의 심중을 얘기하네.
1927년(정묘년) 이인근

소천 이인근은 풍영계에서 자신이 지은 시를 꼼꼼히 모아두었다. 시축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문집인 [소천유고]에 실려 있는 1925년(을축년)부터 1947년(정해년)까지 지은 13편의 풍영계 관련 시는 이 계가 시회로 운영되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첫 해는 서경당에서 이듬해는 독우재, 그리고 다음 해엔 동백정으로 옮겨가며 꽃이 핀 어느 봄날에 지역문인들이 함께 밤새 시회를 즐겼음을 잘 보여준다.

甲戌暮春晦日龜岡齋風詠契會 - 갑술년 구강재에서 열리는 풍영계에 참석하다.

此會勝名已有年 이 모임의 훌륭한 이름을 들은 지 오래이니
于今參得虎溪邊 이제야 호계 가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했네.
白酒數樽臨水石 하얀 술 두어 동이는 물가에 놓여있고
淸詩一軸管風烟 맑은 시 한 두루마리는 풍광을 모두 썼네.
帝子深愁花日暮 제자들은 늦은 봄날이 저물어감을 걱정하고
王孫餘恨草堤連 왕손들은 해마다 풀 돋아남을 한하네.
晩到龜岡詠歸席 구강재에 늦게 당도하여 시 읊는 자리에
流鶯復在綠楊天 버들가지에 꾀꼬리는 오락가락 하는구나.
1934년 김진규

만천 김진규가 풍영계에 참석하여 지은 시로서 그의 문집인 [만천시고]에 실려 있다. 이 시를 보면 동백정이 풍영계의 주된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동백정이 소재한 마을인 호계에 살았던 만천은 1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만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계원들에 비하면 연소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호계 마을에 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시에는 '청시일축(淸詩一軸)'이라 하여 참가자들이 돌려가며 지은 시를 두루마리에 적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의 시축을 포함한 그 외의 풍영계 시축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시에서는 갑술년(1934년) 회소가 구강재로 되어 있으나, 풍영계안이나 이인근의 시에는 죽림재로 나와 있어 만천의 착오인 듯하다.

다. 상영계(觴詠契)

상영계는 탐진강을 사이에 두고 이 지역 문인들이 이름난 정자를 돌며 시회를 가졌던 풍영계와 같은 또 하나의 조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안이나 시축이 남아 있지 않아서 계의 역사나 운영, 참여자 등에 관해 자세한 내용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상영계는 {만천시고}에 실려 있는 김진규의 시를 보면 40여 년 전까지 중복 무렵의 여름날을 잡아 시회를 갖는 모임으로 운영이 되었던 듯하다. 이 시회도 만천, 삼계, 연파 등 주도적으로 작시를 할 수 있는 문인들이 작고함으로써 그 대가 끊긴 경우로 볼 수 있겠다. 1957년과 1960년에 감모재(感慕齋)와 용호정에서 상영계 시회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만천 김진규의 세 편의 시가 있다.

丁酉七月 中伏 感慕齋 觴詠契會 - 1957년 7월 중복 감모재 상영계회

主翁先世別開基 주인이 세상을 뜨며 터 닦아 놓은 곳에
感慕齋成後裔思 감모재 지은 후예들은 선인을 생각하네.
滿座詩談歸却忘 자리 가득한 시담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는데
下山樵笛暮方知 하산하는 초동의 피리소리에 날은 저물어가네.
暢情正好春花節 화창한 정은 봄꽃 피는 시절 같이 좋거늘
修契猶宜夏月時 상영계 치르기엔 여름철이 마땅하지.
得日勝遊天必借 승유의 날을 잡으려거든 하늘을 빌려야 하니
長霖數朔 晴爲 수개월 긴 장마에 잠깐 날이 개누나.

龍頭山下 川邊 용두산 아래 관천의 냇가에
觴詠優遊日夜連 상영회 넉넉하여 밤낮으로 이어지네.
好雨知時來四野 때 맞춰 단비가 온 들판에 내리니
田村七月占豊年 농촌의 칠월에 풍년을 점쳐보네.

관한마을의 감모재에서 만천이 남긴 두 편의 시이다. 위의 7언율시는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며 시회를 열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긴 장마가 끝난 중복 날에 시우들과 모여 시담을 나누는 여유로운 정경이 나타나 있다. 아래 7언절구는 같은 날 밤에 지은 시로 '連, 年'을 운으로 뽑아 낮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상영계 시회의 여유로움과 풍년을 기원하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庚子 龍湖亭 觴詠契會 - 1960년 용호정 상영계회

會期有約共登欄 모임의 약속 지켜 함께 난간에 오르니
老少齊朋座次團 노소간 벗님네들 자리에 둘러앉았네.
談笑津津觴又詠 담소 무르익는 가운데 술잔 들고 읊조리며
渾忘塵慮覺心安 세상일 모두 잊고서 마음 편안해짐을 느끼네.

용호정에서 지은 7언절구는 여름날 정자에 모여 탐진강 맑은 구비를 내려다보며 상영계원들이 노소간에 모두 정자에 둘러앉아 술잔을 돌리며 선경에 취해있음을 잘 보여준다.

라. 정사계(亭 契)

정사계는 임인년(1962년) 8월 10일에 경호정에서 조직이 되었다. 뒤늦게 만들어진 시회이기는 하지만 가장 늦게까지 시를 짓는 모임으로 존재했고 지금까지도 비록 온전한 형태로 운영이 되는 친목적인 모임이기도 하다. 동백정(冬栢亭-淸州金氏), 용호정(龍湖亭-朗州崔氏), 경호정(鏡湖亭-長興魏氏), 농월정(弄月亭-光山金氏), 서륜당(敍倫堂-仁川李氏), 영귀정(詠歸亭-長興魏氏), 지천정(知川亭-仁川李氏, 1966년 탈퇴), 독우재(篤友齋-仁川李氏, 1968년 가입)에서 각 성씨의 대표 5인 정도씩이 참여하여 창설하였는데, 지천정이 탈퇴하자 또 독우재가 가입하여 항상 7개 정자가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를 두고 '칠정계(七亭契)'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영귀정은 탐진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의 위기에 처하자 2001년 탈퇴를 하였다. 지금은 6개의 정자만이 참여를 하고 있다. 또한 1박 2일에 걸쳐 계를 치르며 시회를 갖던 모습은 사라지고, 시회 없이 당일로 수계를 하며 친목만을 다지고 있다. 강신일도 처음에는 대서(大暑)일로 하였으나 혹서를 피하기 위해 1982년부터는 입추(立秋)일로 변경하여 실시해 오고 있다. 참여 숫자는 정자당 3명 정도로 하고 있다.



정사계 모습(2005년 입추일)


조약(條約)은 다음과 같다.

1. 계명은 정사계라 칭함
1. 계의 취지는 선조의 유적을 보전함을 목적으로 함
1. 매년 벼 1섬씩을 수합하여 계를 치름
1. 강신일은 매년 대서일로 함
1. 계원은 각 문중에서 5인 이내로 한함
1. 유사에게는 벼 1섬을 부조함
1. 계자금 이자는 수시로 의논해서 정함

창계를 할 때 각각 벼 1섬 3말씩을 거출하여 9섬 1말이 걷혔으며, 계묘년(1963년) 음력 6월 초3일 대서일에 동백정에서 최초로 정사계가 열려 유사비용으로 1섬을 지출하고 남은 8섬 1되는 유사가 채부하였다.

이 때 작성한 시축이 남아 있는데 계원들이 시회에서 지은 작품으로 경암 위계염(警菴 魏啓炎) 2수, 징헌 최병원(澄軒 崔炳元) 1수, 죽파 위인환(竹坡 魏仁煥) 2수, 극재 김정규(克齋 金貞圭) 2수, 소당 이윤기(小堂 李閏基) 2수, 신당 이제근(愼堂 李濟根) 1수, 일계 김좌규(逸溪 金佐圭) 1수, 만휴 김병택(晩休 金炳宅) 1수, 김종근(金鍾根) 1수, 김종관(金鍾款) 1수, 김은규(金殷圭) 2수, 김행규(金倖圭) 1수 등 모두 12명이 참가하여 17수의 시를 남겼다. 갑진년(1964년)에는 용호정에서 두 번째 정사계를 가졌고, 이후로 매년 시회를 가졌다.

유사는 며칠 전에 계일을 통보하고 시의 주제와 운자를 계원들에게 알려주며 시회가 끝나면 다음 유사를 정해 시축과 계책을 전달한다. 2005년을 기준으로 동백정에서 7회, 용호정 7회, 경호정 7회, 농월정 6회, 서륜당 6회, 영귀정 5회, 독우재 5회 등 고루 돌아가며 유사를 치르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매년 정사계를 가져 총 43회를 치렀다.

1972년 6월 13일 농월정 정사계에서는 벼 23섬을 들여 부산면 호계리 415번지 논 508평을 매입하여 계답으로 삼았다. 계원들 간에 유고가 있으면 벼 5되 정도를 부의하기도 하였다.

1986년과 1987년 정사계 때는 시축지대로 벼 5되 정도를 지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시회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89년부터는 이 계가 1박 2일에서 계일 당일에 산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때부터는 시회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이다. 2005년에는 경호정에서 입추일에 수계를 하였는데 20여명이 참석하여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계가 이어졌다. 정사계원들은 고기, 술 과일 등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방담을 나누었는데 작시는 하지 않았다. 다만 친목적인 성격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는 각 정자당 2명씩의 대표가 있다.

冬柏亭遊此日遲 동백정 시회의 날은 한 없이 길어지고
終宵絃誦少人知 밤 늦도록 노랫가락 읊어도 알아주는 이 드물겠지.
當日設契誰誰計 오늘 열린 계는 누구누구의 계획이런가
願使餘生不易移 원컨대 남은 생이 이처럼 바뀌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
愼堂 李濟根 신당 이제근

栢林斜日客 遲 해질녘 동백나무숲 찾는 사람 더디어
舊誼深深不問知 옛 정 깊고 깊음은 물을 것이 없도다.
因志題詩情未盡 시 한 수 읊어도 이 마음 허전하니
聯衿此夜莫相移 오늘 밤은 옷깃 이어 떨어지지 말세나.
小堂 李閏基 소당 이윤기

雨林草路客 遲 장마 끝 우거진 풀길은 찾는 이 기다리니
松末根音子篤知 소나무에 이는 바람소리 그대의 독실함을 알아주네.
柏亭契事誰誰會 동백정 정사계에 누구누구가 모였는가
傾夜詩情斗柄移 밤이 기울도록 넘치는 시정에 북두칠성이 옮겨 가네.
金鍾根 김종근

이제근과 이윤기, 김종근의 시이다. 작성 연대가 정확히 나타난 것은 김종근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 세 개의 시축 중에서 이 시축밖에 없다. 1962년에 발의하고 1963년에 정사계를 창립하여 동백정에서 처음 시회를 가지며 만들어진 것이다. 장마가 끝난 여름날(대서일)에 동백정에서 정사계를 열어 밤이 늦도록 취흥에 겨워 시를 읊는 장면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김종근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마을의 어른들 사이에 끼어 이 시회에 참여를 했으며 참가자들이 지은 시를 시축에 일부 옮기는 일도 했다고 한다. 위 시의 작자 중 소당이나 신당 등 대부분의 인물들은 작고하였으나 이 시회에 참여한 김종근, 김종관 형제 등은 지금도 생존해 있다. 이들은 젊은 나이에 어른들과 노소동락하는 자세로 시회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시축에는 모두 12명이 참가하여 17수의 시를 지었는데 운자는 '遲, 知, 移'가 주어졌다. 유사가 계일 10여일 전에 사전에 준비해야 할 계금과 함께 이 운자를 통지해 주게 된다.

Ⅳ. 동백정의 문학과 시회 활동

1. 동백정의 문학 활동

동백정은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에 있는 누정으로서 부산면 호계마을과 호계천(虎溪川)이란 냇가를 사이에 두고 서 있다. 탐진강(耽津江)의 상류인 호계천변 소나무숲이 우거진 학등(鶴嶝)에 자리하고 있어서 경치가 수려한 곳으로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 1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곳은 조선시대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동촌 김린(桐村 金麟, 1392∼1475)이 장흥읍재(長興邑宰)로 전보되면서 관직을 은퇴하고 터를 잡아 가정사(假亭舍)를 짓고 거처한 곳이다. 그 뒤 1583년 무렵 그의 후손인 운암 김성장(雲巖 金成章, 1559∼1593)은 선조를 기려 여기에 새로 정자를 짓고 뜰 앞에 선조 동촌이 심어 놓았던 동백나무의 이름을 따서 동백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872년 김이한(金履漢), 김윤현(金潤賢) 등이 발의하여 청주김씨(淸州金氏) 문중에서 중건하였고, 1895년에 김익권(金益權)이 앞장서 중수를 하였으며, 그 후 1985년에 후손 김종근(金鍾根) 등이 개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정면3칸, 측면2칸 집이었으나 뒤에 우측으로 1칸을 증축하여 현재는 정면4칸의 건물이 되었다.

많은 선비들이 이 동백정에 모여 학문을 연마하고 시인묵객들은 음풍영월하면서 시재를 겨루기도 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한 이 정자에는 건물 내부에 17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동백정과 관련된 작품으로는 왕자사부(王子師傅) 박광전(朴光前) 등의 기문(박광전찬 외 18건)과 상량문(김윤기), 중수기(김익권찬 외 1건), 원운 내지 차운(김윤현 외 153건) 등이 있다.

또한 호계리 동계안을 보면 동백정은 숙종 때(1715년)부터 청주 김씨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대동계의 장소로 쓰이고 마을 별신제의 준비장소로도 이용되면서 동정의 역할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 활동 문인

조선 선조 때 동백정기를 지은 박광전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백정을 거쳐간 문인들은 많다. 20세기 중반까지도 동백정과 인근 영모재(永慕齋)에는 한문서당이 있어서 아동과 청년들에게 사서삼경 등 한학을 전수했다. 누정이 18세기 이후에는 문각제실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문중의 자제를 교육하는 강학소의 기능을 겸하는 곳이 많았다. 1947년부터 1956년까지 금강 백영윤(金岡 白永允)이 영모재에서 학생들을 훈육하였고, 부산면 호계마을의 병간정(屛澗亭)에서는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소봉 백남진(小峰 白南振)이 후진 양성을 했으며, 그 무렵에 효당 김문옥(曉堂 金文鈺)도 동백정에 몇 년간 머물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이들을 포함하여 동백정과 인연이 있는 문인들 몇 사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죽천 박광전(竹川 朴光前, 1526∼1597)은 진원박씨(珍原朴氏)로 보성에서 태어나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의 문인이 되어 수학했고,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왕자사부, 함열현감, 회덕현감 등을 지냈다. 그는 퇴계의 학통을 이은 호남의 학자로 {죽천문집(竹川文集)}을 남겼으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화순에서 적을 크게 물리치기도 했다. 김성장과 가까이 교유하였기에 그의 부탁으로 [동백정기]를 짓게 되었다.

미천 이권전(媚川 李權銓, 1805∼1887)은 인천이씨(仁川李氏)로 문학과 선행이 높아서 남사(南士)로 추앙받았다. 평생을 명예를 구하지 않고 독학우애(篤學友愛)에 힘써 초당 향리인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에 독우재(篤友齋)를 짓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필사본 {독우재집유고(篤友齋集遺稿)}가 한 권 있다. 이 문집에는 [독우재서(篤友齋序)], [호계청주김씨동백정(虎溪淸州金氏冬栢亭)], [차부춘정운(次富春亭韻)] 등이 실려 있다.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1836∼1905)의 자는 화옥(華玉)으로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충청남도 회덕(懷德)에서 출생하였다. 1884년에 고종이 대사헌에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그 해 국권피탈에 통분하여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을사오적의 처형, 을사조약 파기 등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는 청주김씨인 김윤진(金潤珍)의 청으로 [동백정기]를 썼다. 남은 문집으로는 {무계만집}, {연재집}이 있다.

심석 송병순(心石 宋秉珣 1839∼1912)은 순국지사로 자는 동옥(東玉)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형인 병선(秉璿)과 함께 큰아버지인 송달수(宋達洙)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다. 충남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세우고 문인들을 양성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선포하여 민족정기의 앙양과 국권회복을 호소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한 후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저서로 15권의 문집과 {학문삼요(學文三要)}, {사례축식(四禮祝式)} 등이 있으며, [차동백정운]을 남겼다.

후석 오준선(後石 吳駿善, 1851∼1931)은 본관이 나주로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으며, 경술국치일을 맞이하여 두문불출하였다. 만년에는 광산 삼도면에 용진정사(聳珍精舍)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25권 12책으로 된 {후석유고}가 전하며 거기에는 [과동백정(過冬柏亭)]이 실려 있다.

복재 위계민(復齋 魏啓玟, 1855∼1923)은 장흥위씨로 장흥군 유치면 단산리에서 태어났다. 송병선,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에게 배웠고 만년에는 유치면 단산리 고향에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학문을 닦고 시문을 교유하면서 소일했다. 6권 3책 별책1권으로 된 {복재집}이 전한다. [영귀정십경(詠歸亭十景)], [한장무철호창수우동백정(韓丈憮哲灝唱酬于冬柏亭)], [말경일부춘정피서(末庚日富春亭避暑)] 등의 시를 남겼다.

금계 이수하(金溪 李洙夏, 1861∼1931)는 인천이씨로 부산면 금자리에서 태어나 송병선과 최익현에게 배웠고 그의 제자인 김진규(金珍圭), 노대식(盧大植), 임맹진(任孟鎭), 위정환(魏正煥), 이병교(李炳敎) 등과 아들인 이정권(李正權)이 주도하여 4권 2책으로 된 {금계집}을 1975년 간행했다. 이 책에는 [유경호정], [유용호정], [근차독우재운(謹次篤友齋韻)], [팔정회수창(八亭會酬唱)], [여향중노소자동백정지부춘정연일수창(與鄕中老小自冬柏亭至富春亭連日酬唱)], [참강정시회(參江亭詩會)] 등이 실려 있다.

소천 이인근(小川 李寅根, 1883∼1949)은 인천이씨로 부산면 금자리에서 태어났다. 일생동안 은거하면서 자연 속에서 살았고 풍영계(風詠契)를 조직하여 인근 정자를 돌며 유람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백영윤, 봉우 임승현(奉禹 任承鉉), 김용규(金容圭) 등과 교유하였다. 필사본으로 {소천유고}가 한 권 전한다. [행자부춘정환(行自富春亭還)], [차유용호정(次遊龍湖亭)], [동백정운]과 풍영계에서 읊은 시들이 남아 있다.

금강 백영윤(金岡 白永允, 1884년생)은 본관이 수원으로 청주김씨 세장산 아래에 있는 영모재에서 1947년부터 1956년까지 후학을 훈육하기도 하였다. 영모재에서의 풍영계 창립에도 참여하였으며 이 마을의 연파 김병현(蓮坡 金炳玹)과 삼계 김병좌(三溪 金炳佐), 김진규 등과 교유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시축에 그의 시가 몇 편 실려있다.

만천 김진규(晩川 金珍圭, 1894.7.30∼1962.12.10)는 청주김씨로 호계마을에 살면서 많은 동백정 시편들을 남겼다. 호계리에 남아 있는 시축에 여러 편의 시를 남겼으며 상영계나 풍영계에 참석하여 지은 시도 남아 있다. 1932년부터 1961년까지 그가 남긴 글들이 {만천시고(晩川詩稿)}로 엮어진 바 있다.

효당 김문옥(曉堂 金文鈺, 1901∼1960)은 자가 성옥(聖玉)으로 본관은 광산이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5세 전에 사서오경을 마치고 율계 정기(栗溪 鄭琦, 1879∼1950) 문하에 들어가 고당 김규태와 동문수학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의 학통을 이어받아 당시에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현산 이현규(玄山 李玄圭)와 함께 한말 3대 경학문장가로 추앙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투사들을 은닉한 죄로 순창감옥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만취 위계도(晩翠 魏啓道) 등 호남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동백정에서 몇 년간을 기거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16권 9책으로 된 {효당문집}이 그의 후손과 문인들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그 문집에는 [동백정차판상운(冬柏亭次板上韻)] 등의 시가 실려 있다.

고당 김규태(顧堂 金奎泰, 1902∼1966)는 본관이 서흥(瑞興)으로 경남 현풍에서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 1454∼1504)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율계 정기를 스승으로 모시고 김문옥과 동문수학했으며, 20대에 스승을 따라 구례로 이거하여 경학을 탐구하였다. 또한 그는 서예에 정진하여 명필로도 유명한데 명승지의 누정 등에 유묵이 많이 남아 있다. 그가 죽은 1년 후 {고당문집}이 16권 6책으로 간행되었다. [동백정], [등김씨부춘정], [위씨경호정] 등의 시가 남아 있어 부산면과 인연이 깊다.

나. 기문(記文)과 시문(詩文)

누정문학은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축적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랜 시간을 거쳐오는 동안 누적되어 형성된 것이 누정문학이요, 그것이 바로 누정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현재 누정에 남아있는 시문들은 시간의 계기적 연속성과 관련이 깊다. 따라서 누정문학 연구도 어느 한 시대에 한정 짓는 것보다는 통시적인 관찰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며, 정치사, 사회사 등과 연관지어 논의하는 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누정문학이 생성되는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문학 외의 여러 관계들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누정문학은 설화, 가사, 시가, 한시 등 여러 장르를 포괄한다고도 하지만 본고에서는 기문과 시문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동백정에는 17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10편의 시문과 2편의 서(序), 3편의 기(記)에 1편의 중수기(重修記)와 1편의 상량문(上樑文)이다. 현재 남아 있는 동백정과 관계가 있는 문장은 서, 기 등이 19건, 상량문이 1건, 중수기가 2건, 원운(原韻) 또는 차운(次韻)이 154건 정도이다. 김봉규(金奉圭)에 의해 1932년에 엮어진 {동백정기운집(冬柏亭記韻集)}이란 책과 만천 김진규의 문집인 {만천시고(晩川詩稿)}에 대부분의 기문과 시가 실려있다.

1) 기문(記文)

동백정은 운암 김성장(雲巖 金成章)이 선조의 거처에 건물을 새로 짓고 뜰에 심어진 동백나무의 이름을 따서 동백정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로 200여 년간 잘 보존되다가 그 후로 문세가 약화되면서 황폐화된 건물을 1872년에야 중건을 하였다.

동백정에는 22편의 기문이 남아 있다. 위에서 든 7개의 현판 외에도 황용현(黃容顯)의 [동백정기], 성암 윤석희(誠庵 尹錫熙)의 [동백정기], 이기형(李基馨)의 [동백정중수기], 이병운(李柄運)의 [동백정기], 유상대(柳相大)의 [동백정명(冬柏亭銘)] 등이 있다.

누정기의 서술 유형은 서사체(敍事體)와 의론체(議論體)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서사체란 지형, 승경, 누정의 외관, 제도, 누정의 역사, 공역의 전말, 전인의 고사, 누정에서의 연유, 서술자와 서술청탁자의 인연을 다루는 것을 지칭하고, 의론체는 누정의 명의, 효용성, 수조의 공덕 등을 주로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유형에 따라 동백정의 기문 중에서 박광전과 김윤현, 김이한, 송병선의 기문을 시대순으로 고찰해 본다.

왕자사부를 지낸 죽천 박광전은 김린의 후손인 김성장을 가르쳤다. 박광전의 문하에서 수업한 김성장은 동백정을 중건하면서 그의 스승에게 동백정기를 부탁하였다.

冬柏亭序

以柏爲號者抑何義歟托物寓意別有所取若西山之薇歟淇奧之竹歟 嘗聞之桐村金先生麟以魁傑特達之資小有立志之超卓當端廟遜位一片丹心貞確無貳竟被奸細之 斥自喉院貳相補外長興仍居於長田之蛇洞不復官意構此亭植以柏尙其大冬挺出之意噫缺陷人間泡沫靡常超然勇退養德隆邵余於是知其有所托寓後之登斯亭者想像其志操矣其後孫光澤成章從余遊者年矣一日請以亭記辭而不獲略修數行之文爲其雲仍者遊於斯講於斯 顧名思義歟
萬曆癸未十一月上澣 王子師傅 朴光前書

동백정서

정을 동백으로 부른 것은 무슨 뜻인가? 물건에 의탁하여 뜻을 붙인 것은 특별히 취한 바가 있으니 서산(수양산)의 고사리나 기오(기수의 외진 곳)의 대 같은 것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동촌 김선생 린이 특출한 인물로 젊어서부터 초탁한 뜻을 품고 단종이 손위할 때 일편단심으로 뜻이 바르고 굳어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간악한 자들의 모함을 받아 외지인 장흥으로 전보되자 장전의 사동에 눌러 살면서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이 정자를 짓고 동백을 심었는데 이는 엄동설한에도 꺾이지 않고 특출함을 숭상한 것이다.
아, 결함있는 인간은 물거품 같은데 이를 초월하여 용퇴하고 높은 덕을 길렀으니 내 여기에서 물건에 의탁하여 뜻을 붙임을 알겠고, 후일 이 정자에 오른 사람들이 그 지조를 상상하여 알 것이다.
그의 후손 성장이 나와 교유한 지 오래여서 어느 날 와서 정기를 청하므로 사양하다가 약간 몇 줄의 글을 지었으니 그 자손된 자 여기에서 놀고 글을 강하면서 어찌 아니 정명을 우러러보고 뜻을 생각지 않겠는가. 만력 계미(선조16년 1583) 11월 상한 왕자사부 박광전서

단종에 대한 충성심과 절개를 잃지 않고 세조의 왕위찬탈에 협조하지 않던 김린은 결국 외지인 장흥으로 좌천되고 만다. 이에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지금의 동백정이 있는 장전사동으로 들어와 정사를 짓고 기거한다. 그의 후손 운암 김성장이 동백정을 중건하고 나서 동백정기를 부탁하자 1583년에 박광전은 [동백정서]를 짓는다. 김린에 대하여 칭송하면서 그가 심은 사철 푸르른 동백의 절개를 기리어 정자명을 동백정이라 명명한 데 대하여 찬양하며, 엄동설한에도 굴하지 않고 푸르름을 유지하는 동백의 기상을 후손들도 대대로 이어받기를 권유하고 있다. 서술자와 서술청탁자의 인연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일종의 서사체 형식의 기문으로 볼 수 있겠다.

후손 김윤현과 김이한은 100여 년 가까이 방치되다시피 한 동백정을 문세를 일으켜 1872년에 중건하면서 [동백정기]를 써서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숭모하고 있다. 문중에서 재원을 마련하여 건물을 지은 후에 임란 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분연히 의병으로 나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했던 김성장, 김억추 등 선조의 덕도 기리고 있다.

冬柏亭記

鄕山水之最名勝者多而龍峯虎溪亦其一也衿汭陽而爲紀控帝巖而作鎭中有嵬然一亭子冬柏亭也此地卽吾十五代祖贊成公補位於玆邑仍居于此土而十三代祖參奉公墓下也八代祖主簿公與判書公虞侯公習射於此亭之址當壬辰倭 主簿公與霽峯高公倡義立節判書公與忠武李公舟師破賊虞侯公與張元師死節從功則其功烈凜凜若冬柏之亭亭世所稱冬柏亭因其節之如彼而名焉者歟欲起數間亭子於先祖遊憩之所以伸追慕之情者幾數百年而未及創始者緣於門勢之不贍也古人曰先祖之事知而不傳亦罪也先祖杖 之址終付於樵牧之場則其罪有所歸矣於是門議發鳩聚如干財而肯 之規模始成雖曰財力之綿連其在後孫之道無 矣登斯亭也則東望贊成公之同所後臨參奉公之瑩域則其奠瑩之誠感愴之情猶倍於甄氏之思亭王氏之春雨亭也棟宇旣成工匠告記日與酒友詩朋 暢嘯 而追感之心寓之山水吾將老於山水主人也夫
崇禎紀元後五 壬申秋 淸州 金潤賢謹書

동백정기

장흥향중에서 산수의 경치가 빼어난 곳이 많은데 용두산과 호계 또한 그 중의 하나이다. 앞으로는 예양강이 옷깃처럼 흐르고 제암산을 끌어당겨 진산을 삼으니 그 가운데 높이 솟은 한 정자가 있어 동백정이라 한다.

이 땅은 곧 우리 15대조 찬성공이 이 고을에 원님으로 오셔서 여기에서 살았는데 공의 손자이신 참봉공(학지)의 묘하이다. 8대조 주부공(성장)이 판서공(억추)과 우후공(만추)으로 더불어 이 정자터에서 활쏘기를 익히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주부공이 제봉 고경명과 함께 창의입절하고 판서공은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수군이 되어 적을 대파하였으며 우후공은 원사 장만과 함께 순절하여 공을 세웠으니 그 공렬의 늠름함이 동백의 싱싱함과 같으므로 정자 이름을 동백정이라 함은 그 절개를 두고 이름이 아닌가 싶다.

수칸 정자를 선조들이 놀던 터에 세워 추모의 정을 펴고자 하였으나 거의 수백 년이 지나도록 공사를 일으키지 못한 것은 문세가 넉넉하지 못한 까닭이다. 고인이 말하기를 선조의 사행을 알고도 전하지 못한 것이 또한 죄라 하였으니 선조가 거닐던 터가 마침내 초목의 장이 된다면 그것이 자손의 죄가 아니겠는가? 이에 문의가 일어 약간의 재물을 모아 기공을 하고 정자가 비로소 이룩되었다. 재력은 다소 들었으나 그 후손들의 도리에는 서운함이 없다.

이 정자에 오르면 동쪽으로 찬성공의 묘소를 바라보고 뒤로 참봉공의 묘소를 임한즉 그 전배의 정성과 감창한 정이 오히려 견씨의 사정과 왕씨의 춘우정에 못지 않도다. 정자를 지어 준공을 하니 날로 술친구와 시의 벗들과 글을 읊으며 회포를 풀고 선조 추모하는 마음을 산수에 부치니 나는 장차 늙도록 산수주인이 되고자 한다.

숭정기원후 5년 임신(1872) 중추 하순 김윤현이 삼가 서문을 쓰다.

김윤현의 기문은 크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앞부분에서는 용두산 아래에 터를 잡고 앞으로는 제암산을 진산으로 삼고 탐진강을 굽어보고 있는 동백정이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자리에 앉았음을 예찬하고 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선조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순국한 주부공과 판서공, 우후공을 추모하고 있다. 셋째문단에서는 문세가 기울어 그 동안 정자를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다가, 비로소 재물을 모아 중건하게 됨으로써 후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된 점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내용이 실려 있다. 마지막에는 선조의 묘하에 지어진 동백정에서 선조를 추모하고 시우들과 산수를 완상하는 여유를 누리겠다는 포부가 나타나 있다. 동백정의 지형이나 승경, 누정의 역사, 공역의 전말, 선조들의 고사 등이 잘 나타나 있는 서사체 기문이다.

冬柏亭記

亭以柏名志其節也排雷之直幹負霜之貞心皆先德所稱而吾七代祖主簿公神峯雋拔持義不局習射於此亭之址當壬辰倭 與霽峰高公倡義殉節其忠烈之凜凜有如大冬嚴雪挺然 秀之柏也經數百年開場林木尙且無恙則爲其子姓者烏得無瞻慕之 功乎(하략)

동백정기
정명을 동백이라 함은 그 절개를 뜻함이다. 우레와 상설에도 꺾이지 않는 직간과 정심은 다 선덕들이 칭한 바인데 우리 7대조 주부공(휘 성장)의 기상이 빼어나고 뜻이 넓어서 활쏘기를 이 정자 터에서 익혔다. 임진란을 당하여 제봉 고경명과 함께 창의순절하니 그 충절의 늠름함이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홀로 빼어난 동백과 같음이 있다. 수백 년을 지나서도 활터의 임목이 푸르르니 그 자손된 자가 어찌 첨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을 것인가? (하략)
임신(1872) 8월 상순 김이한 삼가 서하노라

김이한의 기문에서도 또한 7대조인 주부공 김성장의 기상을 추모하고 있다. 선조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동백정에서 활쏘기를 익히던 김성장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경명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절하고 말았다. 이 기문은 곧 동백의 푸른 기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의리와 절조를 지키다 간 조상의 덕을 예찬하는 글이다.

또한 구한말 을사늑약에 분개하며 자결을 하였던 연재 송병선은 1889년에 쓴 그의 기문에서 청주김씨 윤진(潤珍)이 찾아와서 선조들이 놀던 곳에 동백정을 지었으니 기문을 청하여 응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冬柏亭記

夫物有名同而義異者鄭人以玉爲璞周人以鼠爲璞中國以巖穴  者爲洞而我東則京城內亦有洞號此類不一而足名雖同而其實天淵也淸州金潤珍嘗謁余曰諸父兄就先祖贊成公遊息之地築一亭因其庭樹而名之曰冬柏願賜一言以記其楣余謂冬柏自是別樹而非眞松伯之柏則亦一璞洞之類奚足貴焉夫子曰惡紫恐其亂朱也惡秀恐其亂苗也吾恐假柏又渾眞柏而亂之也況世衰道微朔南易位穹壤到置之際乎則其不剪伐之也幸反取而名之過矣雖然時有大小勢有輕重豺狼當道不問狐狸鯨 觸舟不憂  人之常情也今天下  是豺狼鯨 則凡以誦法爲名者雖有小大差失而不相合固當맹勉保和而不問可也 乎彼風雨霜雪之中不屈其節不濡其色而亭亭愈碧者乎嗚呼然則不論其眞其假亦足爲可貴之物也凡爲先公後承者必恭敬止護其根 其枝則歲寒後凋之象庶可見於無窮矣聊以是爲子勉焉
己亥 淵齋 宋秉璿記

동백정기

대개 사물이 이름은 같되 뜻은 다를 수가 있으니 정나라 사람은 옥을 박이라 하고 주나라 사람은 말린 쥐를 박이라 하니 중국에서는 암혈 깊은 골짜기를 동이라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의 행정구역을 동이라 부르니 이런 류가 하나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비록 이름은 같아도 그 실상은 다르다.

청주김씨 윤진이 일찍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여러 부형들이 선조 찬성공(휘 린)이 놀던 곳에 정자를 짓고 그 정수로 연유하여 이름을 동백정이라 한다며 기문을 청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동백은 별난 나무로 진짜 송백의 백이 아닌즉 또한 박과 동의 류니 어찌 귀할 것이냐?

공자가 이르기를 자를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주를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에 있고, 강아지풀(구미초)을 미워함은 참소리쟁이를 어지럽힐까 두려움이라 하였으니 나는 가백이 진백을 혼돈해서 어지럽힐까 두려워한다. 하물며 세도가 쇠잔하여 남북의 위치가 바뀌고 천지가 거꾸로 된 즈음에 백을 베어 없애지 않고 다행히 그 동백으로 이름함은 과한 일이다.

그러나 때는 크고 작음이 있고 세는 경중이 있으니 중앙의 높은 관리가 흉포를 부리면 지방의 낮은 관리의 죄는 묻지 않고 고래가 배를 부딪치니 미꾸라지 같은 작은 미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 천하가 모두 승냥이나 고래와 같은즉 송법으로서 이름하는 것이 비록 작은 차실이 있어 서로 합당하지 않으나 진실로 마땅히 보화를 힘써 묻지 않음이 옳다.

하물며 저 동백이 풍우나 상설에도 그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면 그 빛을 더럽히지 않고 정정히 더욱 푸르를 것이라.

아, 그런즉 그 진가를 논의하지 않는 것이 또한 족히 가히 귀한 사물이 될 것이다. 선공후사 하는 자 반드시 동백의 뿌리와 줄기를 보호하면 추워지고 나서 시들지 않음에서 무궁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애오라지 이로써 그대를 위하여 권면하노라.

기해(1889) 연재 송병선기

연재 송병선의 기문은 앞의 세 편의 기문과는 다르다. 김윤진이 찾아와 기문을 청하자 그는 대개 사물이 이름은 같되 뜻은 다를 수가 있는 것이고 동백은 별난 나무로 진짜 송백(松柏)의 백(柏)이 아니므로 귀하게 여길 수가 없다고 한다. 가백이 진백을 혼돈해서 어지럽힐까 두려워한다는 것으로 세도가 쇠잔하여 남북의 위치가 바뀌고 천지가 거꾸로 된 시국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고종이 대사헌에 임명하였어도 응하지 않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그 해 국권상실에 통분하여 을사오적의 처형, 을사늑약의 파기 등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아우인 심석 송병순(心石 宋秉珣)과 함께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이 [동백정기]는 이러한 그의 성품이 그대로 반영된 의론체 기문으로 볼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선비들이 누정을 건립하면, 동료 사족이나 후학들이 학문의 도를 익히고자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선비들의 교유에는 흔히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의 모임이 이루어졌다. 16세기에 건립한 후 19세기 중반에 중수를 한 동백정에도 수많은 문인들의 숨결이 오고 갔음을 그들이 남긴 시문과 기문에서 엿볼 수 있다. 후손들이 중건을 기념하여 직접 기문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는가 하면 다른 문인에게 기문을 청탁하기도 하였다. 1580년대 중건 시에는 김성장이 그가 존경하는 박광전에게 기문을 부탁하였고, 1872년 중수 시에는 김윤진이 송병선에게 의뢰하기도 했던 것이다.

2) 시문(詩文)

누정에서 이루어지는 시는 제작자가 미리 해당 누정명이나 주변 경관 및 다른 사람의 원운 등 특정한 제명을 의식한 동기의 유발이라는 전단계적 과정을 거쳐 제작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한 관습 아래 제작된 일련의 누정시를 누정제영(樓亭題詠)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 때 지어진 시는 대부분 풍류 정신을 읊거나 자연에 대한 완상, 과거에 대한 회고,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등을 주제로 한다. 누정시의 주제적 양상을 자연완상(自然玩賞), 고사회고(古事懷古), 기탁풍유(寄託諷諭), 회포술의(懷抱述義), 연군송덕(戀君頌德)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예로부터 동백정에서 경승을 읊은 시는 많이 있다. 용두산록 학등에 자리잡은 정자 아래로 예양강의 상류인 호계천이 흐르고 있으니 동백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는 계절마다 운치가 있다.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눈으로만 보아 넘길 수 없던 문인들은 한 편의 시로 절경을 노래했다. 심석재 송병순(心石齋 宋秉珣)의 [차동백정운(次冬柏亭韻)], 후석 오준선의 [과동백정(過冬柏亭)], 복재 위계민의 [한장무철호창수우동백정(韓丈憮哲灝唱酬于冬栢亭)], 미천 이권전의 [호계청주김씨동백정(虎溪淸州金氏冬柏亭)], 추당 송영대(秋塘 宋榮大)의 [근차동백정원운(謹次冬栢亭原韻)], 김성채(金成采)의 차운, 김익검(金益儉)의 차운, 계암 김윤황(溪菴 金潤璜)의 차운, 이재만(李載晩)의 차운, 오익영(吳益泳)의 차운, 김윤홍(金潤鴻)의 차운, 운곡초부 김익한(雲谷樵夫 金益翰)의 차운, 김형권(金炯權)의 [동백정운], 김봉규(金奉圭)의 [봉화원운(奉和原韻)], 이상구(李相求)의 [근차동백정운(謹次冬柏亭韻)], 춘헌 위계반(春軒 魏啓泮)의 [차동백정원운(次冬柏亭原韻)], 효당 김문옥의 [동백정차판상운(冬柏亭次板上韻)], 고당 김규태의 [동백정], 금계 이수하의 [여향중노소자동백정지부춘정연일수창(與鄕中老小自冬栢亭至富春亭連日酬唱)], 소천 이인근의 [동백정운], 금강 백영윤, 만천 김진규의 시편 등 무수한 시들이 남아 있다. 최근까지도 동백정에서는 시회가 이루어졌으며 동백정에서의 감회와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들이 생산되어 왔다.

154편의 시들은 대개 동백정의 명칭이나 자연경관을 예찬하거나, 과거의 선인들에 대한 추모의 내용을 담고 있다.

주제의식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들을 분석해 보면 대개 동백정의 명칭, 자연 경관의 예찬과 풍류 정신, 선인들에 대한 추모의 내용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동백정의 명칭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으로는 김윤현, 김이한, 송병순 등의 시가 있고, 동백정과 호계천의 자연 경관을 예찬하며 풍류 정신이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는 이상구, 김봉규, 송영대, 오익영, 이재만, 김익검, 김성채, 김윤황, 김형권 등의 시가 있으며, 또한 선인들에 대한 추모의 내용은 이덕균(李德均), 이기정(李基定) 등의 시에 나타나 있다. 또한 동백정에 문우들이 모여 시회를 가지며 다투어 시를 짓는 모습이 나타나 있는 김윤홍(金潤鴻) 등의 시도 있다. 이 작품들 중에서 이같은 주제로 묶어서 몇 편을 분석해 본다.

먼저 동백정의 명칭과 유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김윤현의 원운과 김이한의 차운이 있다.

冬柏亭原韻

惟吾事業肇基前 오직 우리 사업이 이 터전에서 비롯하니
因舊名亭以紀年 옛일 따라 정자 이름을 짓고 유래를 기록하였네.
 祿相承知茂葉 복록을 서로 이어가니 자손이 번창할 것이요
焄 自 炷香煙 추모하는 마음 간절하니 향연이 영원하리.
江山管領無餘樂 강산을 즐기는 일 말고는 다른 낙이 없고
花竹經營未假眠 화죽을 경영하느라 낮잠도 못 이루네.
默坐斜陽占易罷 사양에 묵묵히 앉아 만상의 변화를 생각하니
三分是俗七分仙 몸은 비록 세속이나 마음은 곧 신선이로다.
金潤賢 謹稿 김윤현 근고

이 시는 1872년 8월 문중에서 발의를 하여 동백정을 중건하는데 앞장섰던 김윤현이 지은 동백정기의 후미에 붙어 있는 작품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덕성이 온화하며 효성 또한 지극하였는데,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폐허화된 동백정을 중건하고 이 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00여 년간이나 돌보지 않아 퇴락해 버린 정자 옆에 선조가 심어 놓은 동백나무만 푸르게 서 있는 것을 보며 이를 중건하고옛 명칭 그대로를 살려 동백정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난 후 선조를 추모하고 자손의 번창을 축원하고 있다.

一區冬柏護來前 한 지경 동백이 앞일을 보호하니
名命相傳未 年 정자를 앉히기 전에 동백이라 이름했네.
夜雨初收依檻月 밤비가 그치니 달이 난간을 비추고
洞雲朝散宿 烟 아침에 흩어지는 마을 구름이 처마 끝을 두르네.
常餘樂意宜觴  항상 즐거워 술잔 들고 글을 읊조리니
晩保淸閒任悟眠 늙어감에 청한하니 멋대로 잠자리에 드네.
爲聽人間行路客 길가는 나그네에게 인간사를 청해 들으니
仙非仙也是眞仙 이 곳 주인이 바로 신선이라 하더라.
壬申中秋 金履漢 謹序 1872년 중추 김이한 근서

이 시도 두련(頭聯)에서 동백정의 명명에 관해 언급을 하고 있다. 김이한의 자는 정여(偵汝)이고 호는 야은(野隱)인데 여려서 부친과 사별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렇지만 예의가 바르고 법도를 어기지 않았고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그는 집안의 어른인 김윤현을 존경하고 따랐으며 노년에는 그와 함께 동백정을 중건하는데 앞장섰다.

다음으로 동백정과 호계천의 자연 경관을 예찬하며 풍류를 읊고 있는 작품을 본다.

奉和原韻

碧水 廻抱檻前 푸른 물이 감돌아 정자 앞을 흐르니
斯亭卜築已多年 이 정자 지은 지 이미 오래더라.
滿庭花影三分月 뜰에 가득 찬 꽃 그림자는 삼분월이요
細雨林梢一抹烟 가랑비는 숲 끝에 한 가닥 연기더라.
翫客非徒來鶴髮 완객은 한갓 노인만이 온 것이 아니요
圖書不必借龍眠 도서는 반드시 용면만은 아니더라.
先人遺業長追慕 선조의 유업을 길이 추모하여
逐日登臨曷願仙 날로 이 정자에 오르니 어찌 신선을 원하리요.
甲申仲春 後孫 奉圭 謹稿 1932년 중춘 후손 봉규 근고

동백정 원운은 '前, 年, 烟, 眠, 仙'이기 때문에 원운과 차운으로 남겨진 작품들은 대부분 두련에서는 운자인 '前, 年'에 맞추어 동백정의 역사와 유래에 관해서 언급하고 뒤에서는 운자인 '眠, 仙' 등에 맞추어 풍류나 신선사상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후손들이나 방문객들을 막론하고 그들이 남긴 시편들의 대부분은 절경에 자리잡고 있는 동백정을 예찬하며 그 곳에서 느끼는 신선다운 흥취를 노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바로 운자의 배치에서 기인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은 동백정에 행초서 현판으로 걸려 있는 [봉화원운(奉和原韻)]인데 1932년 청주김씨 후손인 김봉규가 지었다. 그는 현판으로 남아 있거나 여기저기 문집이나 시축 등에 흩어져 전해지던 동백정 관련 기문과 시들을 모아서 {동백정기운집}이란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謹次冬柏亭韻

石溪淸澈繞亭前 돌 계곡에 맑은 시내 흘러 정자 앞을 두르니
一別靈區二十年 이 좋은 곳을 한 번 이별한 지 20년이라.
絶壁雲開衡嶽雨 형악에 비가 오니 절벽에는 구름이 피어오르고
平郊日落洞庭烟 들녘의 해는 동정호 연기와 함께 지네.
居人已辦流觴樂 주인은 이미 곡수에 술잔 띄워 시를 준비하는데
遠客猶客借榻眠 원객은 오히려 자리 빌려 잠자리에 드네.
物態如今無恙否 만물의 모습이 지금 같이 병이나 없지 않을까
痴心直欲挾飛仙 어리석은 마음으로 비선이 되고자 하네.
邵城人 進士 李相求 稿 소성인 진사 이상구 고

시냇가의 정자에서 주인과 손이 술잔을 띄우고 풍류에 젖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진사 이상구가 동백정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할 때 주인이 술병을 들고 와 나그네인 그에게 술을 대접하자 이에 화답하여 지은 시로 현판에 걸려 있는 작품이다.

누정에서의 제영이 이루어지는 계기는 주로 누정이 건립된 후에 주인과 교유를 하는 사람들이 누정을 방문하여 풍류를 즐기며 시를 남긴 경우가 있다. 이 시는 그러한 부류로 볼 수 있겠다. 또한 현장의 왕래 없이도 누정 주인의 부탁이나 그에 대한 칭송으로 지은 누정 시문도 있으며, 그냥 나그네로서 이름 있는 누정을 유람하면서 누정제영을 남긴 경우도 있다.

次韻

龍頭在後虎溪前 용두산은 뒤에 있고 호계는 앞을 흐르니
起廢孤亭卽此年 낡은 고정을 금년에 일으켰도다.
先世遺芬 歲月 선조가 끼친 향기는 세월이 길고
主人淸賞管風烟 주인의 맑은 복은 풍연을 관리하네.
靑靑冬柏名專美 푸르고 푸른 동백은 이름이 아름답고
白白江鳩客借眠 희고 흰 갈매기는 손과 함께 졸고 있네.
一室三賢堪壽世 한 집안 세 현인이 능히 오래 사니
何須物外更求仙 어찌 모름지기 물 밖에서 다시 신선을 구하리요.
星山人 李德均 성산인 이덕균

次韻

英雄烈烈可推前 영웅이 열열하여 옛적부터 추앙하였더니
依舊靑山二百年 청산은 변함없이 이백년이 되었도다.
伊昔三賢同射地 옛날 삼현이 함께 활 쏘던 터전에
至今千樹鬱含烟 이제 많은 숲이 울창하게 우거졌네.
先生已辦龍蛇義 선생은 이미 임진란에 의를 세웠는데
吾輩堪愁 鹿眠 우리들은 짐승같이 잠만 자니 근심일러라.
 域王濤無日定 우리나라 국권이 안정될 날 없으니
九原安得起公仙 저승에 가서 어떻게 돌아가신 공을 일으켜 볼까.
星州后人 李基定 성주후인 이기정

선인들에 대한 추모를 주제로 한 시들이다. 위 두 편의 시는 합천 출신의 이덕균과 성주 출신의 이기정이 지었다. 이들은 모두 성주이씨로 동백정 중건 이후에 여기에 들러 시를 남겼다. 이덕균의 차운에 나오는 '一室三賢'이나 이기정의 차운에 등장하는 '伊昔三賢'은 임진왜란 때 이 곳 출신 의병장인 김성장과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수군이 되어 왜적을 물리쳤던 김억추, 또한 임진왜란 때 순절한 김만추 등 세 사람을 가리킨다. 한 집안에서 세 명의 현인이 나와 나라에 공을 세운 유업을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누정문학은 현실 생활과의 관련성 속에서 작품 활동이 이루어지고 일반 시가와는 구별되는 문학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하여 누정은 한국 문학의 산실로서 역사적으로 오랜 기능을 해왔고 이를 통하여 동시대 문인의 교유는 물론 기문이나 제영시 등으로 선후대 문인들의 시적 교감도 이루어지는 통로였다고 할 수 있다.

다. 시문집

동백정과 관련이 있는 문집으로는 {동백정기운집}과 {만천시고}를 들 수 있다.
{동백정기운집}은 김봉규(金奉圭)에 의해 1932년 5월 17일에 빛을 보았다. 동백정과 연관이 있는 기문과 시편들을 모아서 엮은 책으로 황용현(黃容顯)의 [동백정기]로부터 시작하여 유상대(柳相大)의 [동백정명(冬柏亭銘)], 김봉규의 [추모재중수기(追慕齋重修記)], 성산 이기형(星山 李基馨)의 [근차운암공동백정운(謹次雲巖公冬栢亭韻)], 우선기(禹善基)의 차운, 권재춘(權載春)의 차운, 최순기(崔淳祺)의 차운 등 동백정기가 15편, 추모재중수기가 1편, 원운과 차운이 모두 81수가 실려 있다. 특히 이 문집에 실려 있는 박영수(朴泳銖)나 우하교(禹夏敎) 등의 시를 보면 전국 각지에서 문인들이 동백정을 찾았음을 보여준다.

大冬蒼柏立亭前 크고 푸른 동백이 정자 앞에 우뚝 서 있으니
勁節爲公挺萬年 공의 굳은 절개는 후세 만년 빼어나고
奮氣 磨龍岳月 용두산 아래에서 연마하여 분기를 떨치니
捨身檄渡虎溪烟 목숨을 불사른 충혼이 호계의 안개에 서려 있네.
非徒先哲芳遺跡 한갓 선인 현철의 아름다운 발자취가 아닐지라도
亦使後生覺大眠 또한 후생으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네.
함出賢珍令表蹟 솟구쳐 나온 어진 보배 유적을 더욱 빛내고
精忠亘亘不朽仙 올곧은 충성심은 불후의 신선다운 경지에 이르도다.
進士 朴泳銖 謹呈 진사 박영수 근정

이 시는 평안도가 고향인 진사 박영수가 동백정을 방문하여 남긴 차운이다. 용두산록 아래에 우뚝 서있는 동백정을 찾아 이 곳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순절한 삼현을 추모하고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만천시고}는 금계 이수하(金溪 李洙夏)의 제자인 만천 김진규(晩川 金珍圭)가 1932년부터 1961년까지 지은 글들을 그의 사후에 엮은 책인데, 이 책에는 그가 주로 가까이 했던 삼계 김병좌(三溪 金炳佐), 연파 김병현(蓮坡 金炳玹)이나 금강, 효당, 고당 등과 어울리면서 지은 시와 그 외 만사(挽詞) 등이 실려 있다.

金岡三溪族叔蓮坡炳秋亭中聯吟
- 금강 삼계 족숙 연파 병추와 정중에서 이어 읊다

自愛幽庄買一家 스스로 깊숙한 터를 사랑하여 집 한 채 장만하니
庭梧月價夕增加 뜰 앞 오동나무에 걸린 달 저녁이면 좋아라.
早秋林露蟲鳴戶 초가을 이슬 속에 벌레는 문을 울리고
晩日 風鷺下沙 늦은 날 마름 바람에 백로는 모래사장에 내리네.
驅雀揮竿村落近 참새를 쫓느라 갈대 저으니 마을이 가까워지고
獵魚滿 市場  잡은 고기 어구에 가득하니 시장에다 내다 파네.
支離詩思 題軸 오랜 숙고 끝에 겨우 시 한 수 지은 후에
出望西天樹影斜 문에 나서 서쪽하늘 바라보니 나무그림자가 기우네.

만천은 금강 백영윤과는 동백정과 영모재를 오가며 자주 어울리는 사이였다. 또한 같은 일가인 삼계 김병추, 연파 김병현 등과도 수시로 동백정에서 만나 그들의 시심을 달래었다. {만천시고}에는 이들과 함께 운을 주고받으며 지은 시들이 여러 수가 실려 있다.

또한 이 문집 속에는 남원의 광한루나 서울의 남산공원, 부산 해운대, 평양의 부벽루, 모란봉, 연광정과 그리고 지리산, 해남 대흥사 등을 유람하면서 쓴 시들도 남아 있다. 1957년 5월 단오날에는 구례의 매월음사(梅月吟社)에 참여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다. 호계 마을에 있었던 병간정에서 시회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시가 남아 있으며 풍영계에 참석하여 지은 시도 한 편이 실려 있다. 특히 상영계와 관계된 시가 세 편이 실려 있어서 상영계란 시계가 존재했으며 또한 시회도 가졌던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하게 한다. 용계면의 향약회에 참여하거나, 예양서원(汭陽書院)이나 금강사(錦江祠), 만수사(萬壽祠)의 추향제에 참여하여 남긴 시편도 있다.

이상의 두 문집은 동백정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하는 것들이다. {만천시고}는 만천의 개인문집으로서 그가 동백정에 머물면서 문인들과 교유한 내용이나 개인적으로 유람한 내용, 그의 시 등이 골고루 실려 있다. 김봉규가 엮은 {동백정기운집}은 동백정 관련 기문과 시의 상당 부분을 수집하고 정리해 놓았다. 이 두 문집의 자료적 가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2. 동백정의 시회 활동

가. 동백정에서의 시회 양상

동백정은 부산면 지역의 많은 누정 중에서도 특별히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 곳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문학 활동과 시회 활동은 탐진강변의 문인들을 모이게 했고 이 지역 문학 활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누정은 일반적으로 시단의 기능을 지닌 전근대 사회의 상층지배계층의 문화가 발현되는 장소였던 만큼 특이한 목적으로 창건된 누정이라 해도 거의 예외 없이 담양의 식영정이나 송강정, 면앙정 등과 같이 시단을 형성하곤 했다. 누정을 정점으로 해서 문인들이 모이고 시가의 창작과 가창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지역에서 확인된 시회는 1853년에 조직된 난정회로부터 시작해 풍영계, 상영계, 정사계 등이 있다.

난정회는 독우재주인 이권전을 주축으로 계축년(1853년)에 20여인이 모여서 창립했다. 퇴락한 정자를 1872년에야 중건한 동백정은 난정회 창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누정이었기 때문에 이 시회는 주로 금장마을의 독우재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겠다.

그러나 풍영계는 1924년 영모재에서 창립한 후 얼마 뒤에 동백정에서 시회를 가졌다. 이 계는 그 동안 18곳의 장소를 돌면서 62회의 모임을 가졌는데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자세한 계의 내력이 두 권의 풍영계책에 실려있고 매년 수계를 하여 계금을 정리한 내용과 장소, 강신일, 참가자 등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시를 짓는 모임은 갖지 않지만 처음에는 시회로서 출발을 하였다. 이 시회는 동백정에서 9회의 시회를 여는 등 주로 동백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여기에 만천 김진규나 삼계 김병좌, 연파 김병현 등의 문인이 있었던 때문이다.

상영계는 김진규의 시를 보면 40여 년 전까지도 시회를 갖는 모임으로 운영이 되었던 듯하다. 1957년과 1960년에 감모재와 용호정에서 상영계 시회를 가지며 남긴 시가 있다. 이 시회도 동백정의 김진규 등 작시를 할 수 있는 문인들이 작고함으로써 그 대가 끊긴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정사계는 임인년(1962년)에 조직이 된 이후로 동백정에서 최초로 시회를 열었다. 동백정과 용호정, 경호정에서 가장 많은 모임(7회)을 연 것을 보면 이 시회는 동백정 등 이들 누정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뒤늦게 만들어진 시회이기는 하지만 1987년까지도 작시를 하였으며 지금은 친목적인 모임으로 변질은 되었지만 계답을 소유하고 매년 입추일에 수계를 하고 있다.

시회의 시축은 최초로 정사계를 연 동백정의 시축 외에도 동백정의 정주(亭主)인 김종근씨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두 개가 더 있는데, 작시자와 시만 적혀 있고 많이 훼손되어서 이들 시축이 어느 시회에서 남겨진 것인지는 연대와 장소를 알기가 어렵다. 다만 시축에 적힌 시인들의 면모를 보면 이는 정사계가 창설되기 바로 이전의 것으로 보인다.

정사계원인 최순섭(崔淳燮)씨에 의하면 오래 전에 어른들로부터 부산면 일대에 '팔정계(八亭契)'라는 시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문인이며 소파나 만천의 스승이었던 금계 이수하의 시에도 [팔정회수창(八亭會酬唱)]이란 시가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본다면 풍영계나 상영계의 시축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 밖의 팔정회와 같은 또 다른 시회가 있었거나 또는 시회와 상관없이 문인들이 우연히 동백정에 모여 시를 지으며 작성한 시축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을 해볼 뿐이다.

시축에 시를 남긴 작가들과 작품 수는 다음과 같다. 편의상 2개의 시축을 오래된 듯한 것부터 번호를 매겼다.

- 시축Ⅰ(237cm×25cm)의 작가와 작품수(6명 참가, 31수 창작)
三溪 金炳佐(1892.4.15∼1963.6.22) 8수
克齋 金貞圭(1907.10.4∼1977.8.21) 7수
蓮坡 金炳玹(1888.9.17∼1960.4.24) 7수
晩川 金珍圭(1894.7.30∼1962.12.10) 6수
農隱 白文圭 2수
金容圭(1900.10.6∼1970.6.18) 1수

- 시축Ⅱ(190cm×25cm)의 작가와 작품수(11명 참가, 25수 창작)
晩川 金珍圭 4수
三溪 金炳佐 4수
蓮坡 金炳玹 3수
小湖 崔元杓 2수
小坡 李炳敎(1904.2.16-1982.9.23) 2수
敬軒 李洙平(1900-1980.5.15) 2수
冠山 崔炳元(1901.6.25-1980.9.8) 2수
屛溪 金容大 2수
文在榮 2수
朴景玉 1수
金漢東 1수



시축에 있는 이 시들 중에서 훼손되지 않은 몇 작품들을 옮겨본다. <시축Ⅰ>의 만천, 연파의 시와 <시축Ⅱ>의 만천과 관산, 소파의 시이다.

雨中野路半成泥 빗속에 들길이 반쯤 진흙길이 되었으니
是日登亭滑石溪 이날 정자에 오름에 돌길이 미끄럽네.
推葉題情吟各異 운 맞춰 시 지으니 특이하게들 읊고
擧杯勸席醉相偕 술잔 들어 자리 권하며 함께 취하네.
園中鑑沼看魚躍 동산 속 연못 거울 같으니 고기 뛰노는 것 보고
庭上栽梧待鳳棲 뜰에 오동 심어 봉황 깃들기를 기다리네.
雲裡茅廬何代築 구름 덮인 띠집은 어느 때나 지었는가
山之爲北水之西 북쪽은 산이요 서쪽은 물이라네.
<시축Ⅰ> 晩川 金珍圭 만천 김진규

經旬一雨洞程泥 열흘을 내린비에 마을길이 질퍽하니
月滿書 水滿溪 달은 서창에 가득하고 물은 시내에 가득하네.
年少乘時傾 共 연소한 이들도 틈을 내어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老翁無事賦時偕 늙은이는 일이 없어 함께 시를 읊네.
竹林  新禽宿 죽림은 울울한데 새로운 새가 자고
松樹陰陰白鶴樓 소나무 그늘 속엔 백학이 깃들었네.
暑退凉生霖歇際 더위 물러가고 시원한 바람 일어 장맛비 개니
雲歸東峽日斜西 구름 떠가는 동편 산에 석양이 드리웠네.
<시축Ⅰ> 蓮坡 金炳玹 연파 김병현

<시축Ⅰ>로 명명한 이 시축에 실려있는 시는 모두 6명이 참가하여 지은 31수이다. 이 들 중 만천과 연파, 삼계 등은 특히 자주 어울렸다. 모두 청주김씨이며 삼계는 만천의 족숙이 된다. 용두산 아래로 흐르는 호계천을 건너 석양녘에 돌길을 올라 솔숲 사이의 정자로 오른다는 내용을 보면 이 시축을 남긴 장소는 동백정임을 알 수 있다.

夏日登亭步不輕 여름날 정자에 오르니 걸음 가볍지 않으나
綠陰植杖聽禽聲 녹음 아래 지팡이 꼽고 새소리 듣노라.
送君街路平郊望 그대 보낸 길거리에서 넓은 들 바라보니
映水雲光繞遠城 물에 비친 구름빛이 멀리 성을 둘러 있네.
<시축Ⅱ> 晩川 金珍圭 만천 김진규

一到仙庄興不經 동백정에 한번 오름에 흥취 가볍지 아니하니
詩而兼酒又碁聲 시가 있고 술이 있으며 또 바둑이 있네.
酒翁志趣今來得 주인의 고상한 취미를 이제 와서 알겠으니
老柏蒼松繞作城 늙은 동백과 푸른 솔이 빙 둘러 성을 만들었네.
<시축Ⅱ> 冠山 崔炳元 관산 최병원

滿庭蒼翠四時佳 뜰에 가득한 푸르름 사시절 아름다우니
一抹淸風拂面斜 한줄기 맑은 바람은 낯을 비껴 스치네.
凜然爽氣灑心臆 어엿한 서늘 기운 가슴을 씻어주고
曲曲溪聲枕上加 굽이굽이 시내소리 베개 맡에 들려오네.
<시축Ⅱ> 冠山 崔炳元 관산 최병원

客去君留誼不輕 손은 가고 그대 머무르니 정의가 가볍지 않네
憑欄半日聽溪聲 한나절을 난간에 의지하여 시내소리 듣노라.
昔人已占亭名好 옛사람이 이미 좋은 정자이름 지었으니
冬柏蒼蒼作樹城 동백이 푸르고 푸르러 나무 성을 만들었네.
<시축Ⅱ> 小坡 李炳敎 소파 이병교

<시축Ⅱ>에 실려 있는 만천과 관산, 소파의 시이다. 동백정에서 시회를 가지며 남긴 시축이다. 관산은 낭주최씨로 용호정이 있는 용반마을 사람이고, 소파는 인천이씨로 금장마을의 독우재 주인이며 소천 이인근의 아들이자 현 정사계원인 이태균의 부친이다. 이 시회에는 11명이 참가하여 25수의 시를 남겼다. 여름날 푸르른 녹음 아래에서 늙은 동백과 푸른 솔이 성처럼 정자를 둘러치고 있는 가운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두는 모습이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다.

1963년 동백정에서 열린 정사계의 시축에는 만천, 연파, 삼계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정사계가 창립되기 전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시축Ⅰ,Ⅱ>는 정사계의 시축보다 연대가 좀더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동백정에서 가진 시회에서 쓰여진 시축으로 보이며 아마도 풍영계나 상영계의 시축인 듯하다.

나. 동백정에서의 시작(詩作) 활동

1458년 좌찬성을 지낸 김린은 현재의 동백정 터에 조그만 정사를 짓고 세상과 멀리하고 자연과 벗삼아 은거하였다. 그 후로 1583년 후손 운암 김성장이 정자를 중건한 후 청주김씨 후손들이나 지역 선비들의 교유의 장이 된 것이 이 곳이다. 200여 년이 지난 후 한동안 황폐화된 시기가 있었으나 1872년에 문중에서 문의를 일으켜 다시 중수할 때까지 동백정과 관련된 글로는 죽천 박광전의 기문 외에는 다른 누정제영들은 드물다. 그러나 중수한 이후 동백정에서 창작된 것이거나 동백정을 읊은 시들은 많다. 미천 이권전의 [호계청주김씨동백정], 심석 송병순 [차동백정운]을 비롯해서 후석 오준선, 복재 위계민, 소천 이인근, 금계 이수하의 시 등 많은 작품들이 있음은 앞에서 다룬 바 있다.

특히 20세기를 전후해서 동백정을 찾는 문인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고 이 곳에서 아예 유숙하면서 후진을 양성한 문인들도 있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금계 이수하, 금강 백영윤, 만천 김진규, 효당 김문옥, 고당 김규태 등이 동백정을 드나들며 후학을 가르치고 시우들과 어울렸다.

최근까지도 동백정에서는 시회가 이루어졌으며 동백정에서의 감회와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들이 생산되어 왔다. 만취 위계도(晩翠 魏啓道)는 1970년대 이 곳에서 열린 시회에 참여했을 때 [동백정유감(冬伯亭有感)]이란 7언율시를 지어 20여 년 전 그의 스승 효당 김문옥과 만천 김진규, 금강 백영윤의 교유와 풍류를 추념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무척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만천의 여러 편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연파, 삼계, 효당, 의재 위석한(毅齋 魏錫漢)과 함께 안중근의사를 배향하는 사당인 장흥군 장동면의 만수사(萬壽祠)를 유람하며 정담을 나누었던 내용이 다음과 같은 만천의 시에 나타나 있다.

蓮坡三溪曉堂金友文鈺毅齋魏錫漢遊萬壽祠
- 연파, 삼계, 효당 김문옥, 의재 위석한과 만수사를 유람하다

南風又過故人門 남풍이 또한 그대 집 문 앞을 스쳐가니
脩竹蒼松別有村 긴 대와 푸른 솔이 뒤덮인 특별한 마을이네.
邂逅逢場同白首 만나는 곳에 늙은이들 함께 했고
支離談話到黃昏 끝날 줄 모르는 정담은 황혼까지 이어지네.
幾年結構 誠力 정성을 다한 건물 어느 해에 지었는가
一夕留連穩夢魂 하루저녁 머무르니 꿈이 편안하구나.
此地  天所與 이곳은 아마 하늘이 내려준 곳이니
苦心靡可等人論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것 없네.

또 다음의 시는 만천이 절친하게 지내던 효당 김문옥이 3년여에 걸쳐 동백정에서 유숙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떠나게 되자 그 아쉬움을 달래면서 지은 시로 1950년경의 작품이다. 그가 아침 저녁으로 어울리던 문우와의 이별을 앞두고 열흘간이나 함께 두루 산천을 유람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효당이 능주로 떠나가기 전 슬픈 이별의 감정을 담고 있다.

惜別曉堂金友文鈺 - 효당 김문옥과 이별하다

好朋友集一旬偕 좋은 벗과 열흘을 함께 어울려
踏盡淸江碧岫崖 맑은 강 푸른 산을 두루 돌아다녔네.
偏愛書聲朝上塾 글소리 듣기 좋아 아침이면 서당에 오르고
難堪酒思暮巡街 술 생각 그지없어 석양이면 거리로 나서네.
樹陰綠漲村容僻 나무 그늘 짙으니 마을 모습은 더욱 촌스럽고
麥氣黃登野色佳 보리가 누렇게 익으니 들빛이 아름답네.
臨別蒼然路中立 이별을 앞에 두고 슬피 길 가운데 섰노라니
綾城冠岳故人懷 능주와 장흥사이에 그대 생각뿐이네.

이에 3년간 동백정에 기거하다가 능주로 떠나가는 효당도 또한 긴 이별시를 남겼다. 그는 삼계와 만천 두 사람에 대한 우정이 남달리 깊었다. 다만 위의 만천의 시와 다음의 효당이 남긴 시가 같은 시기에 서로 주고 받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만천의 시는 이별의 시점이 보리 익는 여름날인데, 효당의 시는 8월 중추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虎溪別諸友(三溪 晩川) 庚寅八月 - 호계에서 삼계 만천과 이별하며(1950년 8월)

我來榴花明 我去秋山碧 내 석류꽃 필 때 와서 가을 산이 물들 때 떠나게 되니
依依桑下情 悠悠萍水跡 서로 의지하던 도타운 정이 부평초와 같이 흐르는구나.
懸厓萬松靑 中藏一書屋 벼랑에 걸린 솔은 푸르른데 그 가운데 동백정 숨어있네.
淸風左右至 白雲窓戶宿 맑은 바람 좌우에서 이니 흰구름은 창문 밖에 머물고
江月逼人寒 江氣通曉白 강상의 달은 차가워 강기운 속에 새벽을 맞이하는 듯.
風塵夜不警 可但起居適 풍진의 밤을 놀래지 않고 다만 기거하기 적합하니
風流二詩人 爲我江海客 풍류의 두 시인이 나를 위해 친한 벗이 되었도다.
中秋月將圓 家在爾陵曲 중추의 달은 둥글어지는데 집은 능주에 있어
歸人渡野橋 送者依山郭 떠나는 이 다리를 건너고 보내는 이는 산자락에 의지하네.
擧手謝勿念 護護亭前柏 손 들어 염려마라 감사하니 정자 앞 동백을 잘 지키시길.

고당 김규태는 효당 김문옥과 함께 율계 정기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유학에도 밝았지만 명필로도 유명한 고당은 사형사제하는 효당이 몇 년간 동백정에 기거하자 그를 찾아 장흥까지 찾아온 것이다. 만천은 이들보다는 7, 8년 연상이었지만 문우로서 이들을 무척 가까이했던 듯하다. 다음의 시는 멀리서 찾아온 벗인 고당을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顧堂金友圭泰訪曉堂來亭 - 고당 김규태가 방문하였는데 효당이 정자에 왔다

百里高軒到此居 백리길 높은 수레 이곳에 도착하니
不嫌 僻一過余 궁벽함을 마다 않고 나를 찾아 주었네.
始醒白首無量酒 늙어서 무량으로 마시던 술 이제야 깨이고
晩悔靑春未讀書 젊어서 글 읽지 않아 늦게야 뉘우치네.
官道如天常馬轍 벼슬길은 하늘처럼 항상 말 바퀴자국 같고
山家有客每樵漁 산 속에 손이 있으니 매양 나무하고 고기 잡는다네.
吾生願得光明燭 내가 밝게 빛나는 촛불을 얻어서
隔歲煩懷仔細攄 여러 해 만나지 못한 번민을 펴고자 하네.

이러한 작품 외에도 동백정에서 개최된 여러 시회에서 다수의 시들이 창작되었다. 남아 있는 세 개의 시축에만 모두 73수( 시축Ⅰ-31수, 시축Ⅱ-25수, 정사계시축-17수)가 실려 있다.

다. 지역 시회에서 동백정의 역할

문화유적은 그 유적과 관련된 인물들이 사회세력으로서 기능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추적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지역에 누정이 건립되고 나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쇠락한다면 문중의 재력이 약화된 것은 아닌지,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한 것은 아닌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또는 번창을 하게 된다면 주된 후견인은 누구인지, 사회경제 배경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부산면 지역에서 행해진 4개의 시회 중 난정회를 제외하고는 풍영계나 상영계, 정사계가 모두 동백정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유독 동백정에서 시회를 주도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는 마을의 사회문화적 특성과 떼어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산면 지역의 여러 정자는 각 성씨 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낭주최씨의 용호정과 장흥위씨의 경호정이나 영귀정, 인천이씨의 독우재와 서륜당, 청풍김씨의 부춘정, 해평길씨의 창랑정, 영광김씨의 사인정 등이다. 탐진강변의 절경 속에 자리한 이 누정들은 선비들의 휴식처요, 문학 창작의 산실 구실도 했다. 문중의 흥망성쇠와 무관하지 않게 이 누정들도 부침을 했을 것이다.

부춘정은 그 역사로 보나 위치로 볼 때 중요한 누정임에도 불구하고 정사계, 풍영계 등 시회의 장소로는 등장하지 않음을 볼 때 문중의 역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부춘정은 애초에는 남평문씨 문희개(文希凱)가 '청영정(淸潁亭)'이란 이름으로 1600여년 무렵에 건립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이주하면서 청풍김씨 김기성(金基成)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러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청풍김씨의 제각으로 주로 사용하나 부춘정은 이러한 시회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다.

동백정이 있는 호계마을은 전보다는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60여호 정도 되는 마을이다. 이 마을 대동계의 역사는 약 300년 정도 된다. 1715년 창계된 대동계는 2002년까지 10권의 대동계안을 보유하고 있다. 이 마을에 사는 인구는 청주김씨가 대부분인데 인구 비율로 보면 약 80% 정도인 자작일촌(自作一村)이라 할 수 있다. 대보름날에는 지금도 별신제를 지내고 있다. 비교적 마을의 종적, 횡적 유대가 강한 마을이라 할 수 있겠다.

동백정에서 이루어진 시회의 시축만이 보관되는 것이라든지 {만천시고}와 같은 문집이 있어 시회에서 창작된 시가 기록되어 있는 것 등은 동백정의 중심적인 역할을 증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아마 효당, 금강 등의 학자와 청주김씨인 만천이나 삼계, 연파 등의 문인들이 동백정과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풍영계는 1924년 창립한 이래 18곳의 장소를 돌면서 62회의 모임을 가졌지만 동백정에서 9회로 가장 많은 시회를 열었다. 정사계 또한 창립이 된 후로 동백정에서 최초로 시회를 열었으며 용호정, 경호정과 함께 동백정이 가장 많이(7회) 시회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상영계 역시 김진규의 시에 의하면 동백정이 주된 장소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만큼 문중은 사회경제적인 후원자 역할을 하였고 또 한편으로 동백정에는 선각적 문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Ⅴ.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기능과 의의

1.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기능

문학사회학(文學社會學)은 문학과 사회의 구조적 상동성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설명과 이해의 변증법에 의거하여, 문학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를 통해 문학을 설명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며, 세 개의 요인 즉 사회경제학적 요인(전승자의 사회층)과 사회생태학적 요인(전승자의 지역성), 사회문화적 요인(전승자의 언어와 가치관)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는 설이 있다. 또한 이를 두 가지로 분류하여 문학작품과 사회구조와의 관련을 고찰하는 분야와 사회학의 논의의 전개를 위해 문학작품을 소재로 이용하는 분야가 있다고도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문학사회학이란 한 작가의 작품은 그가 속한 사회계층이나 사회적 이념, 경제적 여건, 독자 등 그 시대의 사회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도 하나의 사회 제도이자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맥락 속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문학적 현상이 사회적 현상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보통 누정의 기능은 강학강도(講學講道), 향약 등의 계회 및 씨족의 종회, 치적의 표방, 유관상경(遊觀賞景), 작시풍류(作詩風流), 활쏘는 사장(射場)이나 그 외의 별장, 재실, 치농(治農), 측후(測候), 전쟁 때의 지휘본부, 현관 및 승려들의 유휴처(遊休處) 등으로 다양하게 볼 수 있다. 또한 용호정처럼 후손들이 성묘하면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지은 것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백정은 상류 식자층의 지적인 문학활동의 공간이면서 호계리 주민들에게는 대동계의 집회장소로나 마을 공동제의인 별신제의 준비 장소로도 활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청주김씨 소유인 하나의 누정이 문인들이 모여 문학을 통해 교유하던 곳이면서 일반 주민들에게는 마을 행사의 장소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누정에서 향약이나 대동계를 치루었던 곳은 다른 지역에도 있다. 전남에서 가장 오래된 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영암 구림의 회사정, 영암읍에 있는 장암정이 있고, 향약이 이루어진 광주의 양과동정, 부용정, 나주의 쌍계정 등을 들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청렴하고 검소한 가운데 자연에 순응하면서 사는 자연인이자 생활인이었다. 그러기에 자연 속에서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강해 아름다운 공간을 차지해서 정자를 앉혔다. 번성한 가문에서는 대부분 이를 소유하여 자제들의 교육과 인격함양에 이용하고 종친회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누정은 입지를 정할 때 조망의 대상으로 자연의 수려한 경관을 먼저 고려한다. 내륙지방의 누정은 넓은 들판과 산을 대상으로 하는데 반해, 탐진강이나 영산강과 같은 강의 주변에 세워진 누정은 정적이면서 동적인 주변 풍광이나 강물을 배경으로 한다. 강이나 계류 가에서 주변의 경치와 흐르는 물을 완상하도록 지어진 것이 탐진강 유역의 동백정, 경호정, 용호정, 부춘정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백정이 있는 호계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이는 전남지방 대부분의 농촌 마을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동각(洞閣)이라고 한다. 동각과 정자는 보통 소유면에서나 기능면에서 구별된다. 동각(모정, 유선각, 동정이라고도 함)은 마을민의 공동소유이나 누정은 개인이나 문중의 소유이다. 동각은 마을과 들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마을과 수평선상에 있다면, 누정은 마을과 자연의 접점에 위치하여 마을을 내려다보는 수직선상에 위치한다. 누정이 선비들의 휴식처라면 동각은 농부들의 휴식처이다. 동각은 경치가 좋은 곳보다는 농경지를 배경으로 해서 지어져 있다. 그야말로 이 곳은 전형적으로 양반문화와 평민문화가 일체화된 곳임을 말해준다.

최근에는 누정이나 동각이 주로 마을 노인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으나 얼마 전까지도 노소가 모여서 시조를 짓고, 시회도 여는 등 시가문학의 산실 구실을 했다. 누정은 대개 경치가 뛰어나 전망이 좋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에 지어졌고, 대부분 그 곳에는 기문과 시들이 있다. 이 같은 누정은 풍광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과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선비들의 휴식처였다는 두 가지의 여건만으로도 이미 문학에 상당 부분 접근되어 있다. 그리고 풍류의 멋을 누리기 위해서 지었다는 자체가 이미 노래와 관계가 깊어진다. 이는 정자가 넉넉히 문학의 산실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다. 명문가에서는 경치가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관리하면서 시를 짓고 노래하며 인근의 선비들과 교유를 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는데, 속세와 떨어져 은둔하는 곳으로 낙향한 선비나 영욕을 멀리하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누정의 문학적 기능에 변화가 일고 있다. 사회적으로 볼 때 양반과 선비의 구별이 따로 없고, 시단을 형성할 수 있는 문인의 수가 적으며, 한시를 읊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소수가 남아 있더라도 노령화하여서 그들이 집단을 이루어 시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강학의 장소로서의 기능도 학교 교육의 발달로 이미 기능이 사라진지 오래다. 또, 동족 집단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다수의 이농으로 동족 집단의 집회소로서의 기능도 사라지고 있다. 이용이 활발한 누정은 위치에 의해 좌우된다. 경관이 좋은 누정이라 해도, 마을과 떨어진 곳에 위치한 누정은 사람이 거의 찾지 않아 먼지만 쌓여있는 실정이다. 동백정의 경우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 곳에서 시회가 끊긴 것도 대략 20여 년 전으로 이러한 변화양상과 무관하지 않다.

2. 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의의

문학활동과 삶의 현실과의 상호관계를 밝히는 데는 문학작품과 사회, 경제, 정치, 문화와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문학사회학은 하나의 작품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그리고 구조화된 구성 요소들이 그 작품을 어떻게 형성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작업일 것이다. 아울러 문학은 사회현실 그대로를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굴절시켜 걸러낸 사회적 사실일 뿐이다.

농경 생활을 위주로 했던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을 아끼고 사랑함에는 상, 하층의 구별이 없었다. 이는 우리의 평민 문화와 양반 문화가 모두 그 바탕을 자연에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맑고 깨끗하여 부정이 없는 자연을 닮은 심성이야말로 한국인들의 순수한 기질이기 때문에 누정은 마땅히 산수의 경관이 좋은 곳을 배경으로 한다. 누정은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이 강조된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공의 구조물인 누정이 자연 환경 속에 눈에 거슬리지 않고 자연 속의 한 송이 꽃이나 한 그루의 나무와 같이 너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동백정은 호계마을에서 호계천을 건너 용두산으로 이어지는 학등의 솔숲 속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대로 자연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야말로 사람이 사는 마을과 자연의 경계선에 있다. 동백정이란 하나의 누정이 갖는 의의를 고찰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첫째, 동백정은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를 하여 파한상경(破閑賞景)의 장소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동백나무와 솔숲이 우거진 언덕 위에서 마을과 호계천을 굽어보면 주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둘째, 동백정은 주로 시회의 장소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시를 아는 선비들이 이 곳을 휴식처로 삼아 유유자적하면서 그때그때 일어나는 흥취를 시로 표현하여 많은 시편들을 남겼다. 이 지역의 문풍을 진작시키는데 크게 공헌을 한 곳이 다.

셋째, 동백정은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강학하고 인격을 수양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던 장소였다. 이 곳은 좌찬성을 지낸 김린이 벼슬을 그만 두고 은퇴하여 안식처 삼아 지내던 곳으로서 후손들이 선조의 덕을 기리고 학문과 시문을 가까이하며 수양하는 장소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효당 김문옥 같은 학자는 이 곳에서 3년간을 머물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동백정은 결국 강학하는 장소이면서 인간의 규범을 깨우치게 하는 수양지로서의 역할까지 담당하였던 것이다.

넷째, 동백정은 씨족끼리 회합하는 문중회의나 마을 사람들의 동회, 또는 각종 계모임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이는 건립할 때의 취지에 따라 선비들이 여기에서 선조를 추모하고 시대를 한탄하며 자연을 감상하기도 하다가 필요에 따라서는 지역사회의 사랑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음을 말해준다.

다섯째, 동백정은 사장(射場)의 구실을 하기도 했다. 활쏘기를 연습하던 정자는 전국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글을 읽던 선비들이 평소에는 여흥 삼아서 습사(習射)를 하다가 국난에 처했을 때는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했다. 그야말로 이 정자는 문무를 겸비한 수련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 흔히 7정, 또는 8정이라고 하는 동백정, 경호정, 용호정, 부춘정, 독우재, 농월정, 서륜당, 영귀정 등이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사회적인 요인은 일단 각 성씨들이 교류를 하며 문중의 문인들이 만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탐진강 유역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동류의식이나 풍류정신이 일치했고 또한 장흥읍이 가까우면서도 넓게 펼쳐진 평야지대에서 나오는 풍부한 산물이 그들의 넉넉한 삶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수려한 탐진강 주변의 경치는 그들에게 누정을 짓게 하고 서당을 열게 하였다. 한 스승에게서 동문수학한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문단을 꾸릴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그들은 수시로 어울리게 된 것이다. 이름난 학자들이 특히 동백정을 중심으로 모여 든 것도 한 요인이었다고 보겠다.

이 지역은 임진왜란 때는 해안과 가까워 적으로부터 유린을 당할 만한 곳으로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항거한 역사가 있고, 동학전쟁 당시에도 이 지역에 접주가 있어서 동학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좌우익의 대립도 치열했던 곳으로 항상 역사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있었던 곳이다.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른 지역보다 시대마다 느끼는 아픔도 컸을 것이고 한편으론 앞선 문물과 학문을 접하기도 쉬웠으리라 짐작된다.

특히 20세기를 전후에서 문학이나 시회 활동이 활발한 것도 그러한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는 않다. 사람들이 만나서 풍류를 즐기면서도 시대를 의논하고 정보를 교환할 필요를 느꼈다고 보겠다. 이 지역의 시회가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이 시회들이 창립된 1853년과 1924년, 1962년이 특별한 시대적 연관성은 없으나 시대적 배경과 문인들의 존재 여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지역의 토반들인 청주김씨, 장흥위씨, 낭주최씨, 인천이씨 등은 부산평야를 소유하고 있던 씨족으로서 일정한 경제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각 문중에서는 누정을 소유하고 서당을 열어 문중과 마을에 한학을 보급하고, 또한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전수한 문인들은 함께 모여 시회를 꾸려 나갔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시회는 단순한 친목회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문사회에서 한글사회로의 변화, 문학사회에서 비문학사회로의 변화와 맞물린다. 근대교육기관이 들어서면서 서당의 역할이 축소되고, 매스컴이나 교통의 발달 등은 더 이상 한문 지식인 사회의 시회를 불가능하게 했다. 외지에 나가서 신식학문을 익히고 새로운 정보와 풍습에 익숙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고지식하고 난해한 한시에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 전반의 한문학 단절 현상과의 연관성 속에서 살펴볼 수도 있겠다.

1970, 80년대 중반까지는 서당 세대로서 어린 시절 한문을 익혔던 인사들이 시회의 주축세력이어서 시회에서의 시 창작이 가능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근대식 학교 교육이 보편화하면서 한문세대가 퇴조하게 되어 시회를 이끌어갈 구성원이 끊기게 된다. 1990년 무렵이 이러한 시회가 순수 친목회로 전환되는 분기점이 된다고 보겠다. 정사계에서 1980년대 후반 이후로는 시회를 1박 2일에서 당일로 단축하고 친목 모임만을 갖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동백정을 중심으로 이제까지 이루어졌던 문학 활동이나 시회 활동에 대해서 문체면이나 연대순으로 고찰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가능한 연대순으로 문체의 특성, 형식적인 관습, 서술의 기술, 성격묘사, 구성, 상징 등 겉으로 드러나는 경험적 사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것이 문학사회학이다. 바로 그러한 면에서 15세기부터 시작한 동백정의 문학의 역사가 16세기로 이어졌고 그것이 다시 한동안 침체기를 거쳤다가 다시 19세기에 와서 크게 성황을 이룬 것은 시대의 분위기나 마을의 역사, 문중의 성쇠 등 문학 외적인 요소들에 영향을 받은 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이 지역에서 시회를 이끌어간 동백정은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누정이라 할 수 있겠다.

Ⅵ. 결론

이상으로 동백정을 중심으로 한 문학 활동에 대해 알아보았다.

동백정은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의 경치가 수려한 곳에 자리를 잡은 누정으로서 뜰 앞에 선조가 심어 놓은 동백나무의 이름을 따서 '동백정'이라고 명명하였다. 많은 선비들이 이 곳에 모여 학문을 연마하고 시재를 겨루기도 하였는데, 건물 내부에 박광전의 [동백정기] 등 17개의 현판을 포함해서 기문이 22건, 시문이 154건 정도가 남아 있다.

동백정은 흔히 시회의 장소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밖에 씨족끼리 회합하는 문중회의나 마을 대동계, 별신제의 회의소 또는 각종 계모임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이는 건립할 때의 취지에 따라 선비들이 시대를 한탄하고 자연을 감상하기도 하다가 필요에 따라서는 지역사회의 사랑방 구실을 겸하기도 하였음을 보여준다. 양반문화와 평민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독특한 누정 문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작시모임은 시계 또는 시회라고 부르고 있다. 알려진 것만도 난정회, 풍영계, 상영계, 정사계 등인데 이외에도 팔정회 등 존재하던 시계가 사라지고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또한 시계가 아니라도 몇 사람이 모여 그때 그때의 시흥을 토로하였고, 어떤 이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거나 문집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동백정기운집}과 {만천시고} 또는 {호은세고}, {독우재집유고}나 {소천유고} 등의 문집이 그것을 증명한다.

시회는 비단 동백정 뿐만이 아니라 용호정이나 농월정, 경호정, 부춘정, 독우재, 영귀정 등 탐진강이 흐르는 부산면 일대의 누정에서 두루 이루어졌다. '칠정계(七亭契)'니 '팔정계(八亭契)'니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누정들을 중심으로 시회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누정마다 각 성씨를 대표하는 정주(亭主)가 있어서 매년 돌아가며 일정한 날을 정해 유사를 맡으며 수계를 하였다. 이 지역은 탐진강을 끼고 늘어선 누정을 중심으로 시가문학의 한 띠를 형성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문인들은 시회를 조직하여 시흥을 달래었고 또한 글을 배우며 시대의 아픔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청주김씨, 장흥위씨, 탐진최씨, 인천이씨 등 이곳에 터전을 잡은 씨족들은 누정을 지어 선조들을 추모함과 동시에 후손을 교육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자연풍광을 감상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시를 지으며 문풍을 진작시켰으니 탐진강 유역 문화권이 하나의 문향(文鄕)으로 자리 매김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면서도 국난을 당하여서는 분연히 일어서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했던 이 지역 인사들의 기개는 평상시 심신연마를 통해 길러진 의리정신의 표상일 것이다. 진정 선비는 문무를 겸해야만 실천적 힘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 할 수 있겠다.

또한 근세에 이르러서는 금계 이수하나 금강 백영윤, 만천 김진규 같은 이 지방의 선각자들이 후학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더구나 효당 김문옥 같은 당대의 문장을 초빙하여 후진을 양성하려고 한 것만 봐도 지역민들이 얼마나 학문추구의 열정이 강한가를 짐작케 한다.

한시를 짓는 모임인 시회에는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시문에 어느 정도의 조예가 있으면서 나름대로 시간적인 여유를 확보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시회는 지식층의 문화이자 양반문화의 잔존이라고 할 수 있다. 상층 지식인들이 세상이나 자연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받아들였는가는 그들이 남긴 시와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문학과 사회와의 연관성은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한 편의 시로서 심회를 토로하고 그때 그때의 일을 기록해 두었던 선학들의 치밀함이나 문학적 소양은 후대인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문학작품과 사회 현실과의 상호관계를 밝히는 데는 문학작품과 사회, 경제, 정치, 문화와의 연관성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이제는 어느 지역이나 양반과 선비의 구별이 없고, 시회를 끌어갈 수 있는 문인이 드물며, 한시를 읊을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사라져 가는 이 지역 지식인들의 시회 양상을 고찰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일 것이다. 앞으로 또 다른 연구자에 의해 충분한 자료를 확보하여 더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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