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아우르기'/ 정리 김준
아우르기-김준·박종오·선영란·전고필·김준


“첫째는 우리 가정이 평화롭기를, 둘째는 오곡 풍년을, 셋째는 국태민안을 기원합니다.”장흥 부산면 호계리.
동백정 위에 보름달이 걸릴 시간인 정월 대보름 새벽2시경, 별신제를 주관하던 축관이 소지를 올리면서 마을신에게 한 해 바람을 읊는 소리가 밤하늘로 퍼져가고 있었다.

300년 지속된 호계리 별신제

차는 능주까지 이어진 4차선 도로를 달려 2차선으로 좁아지면서 한 걸음에 곰치재로 내달은다. 곰치재는 장흥 유치와 화순 백아산,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으로 ‘산사람’들이 이용했던 이동로였다고 한다.

호계리에 도착하자, 우리를 맞는 것은 호계천 자갈밭에 만들어진 제단이다. 제단을 설치할 장소는 12월 마을총회에서 정해진다고 한다. 다른 지역과 다르게 28개의 대나무를 한지가 끼워진 왼새끼줄로 엮어서 냇가에 둥그렇게 세워 두었다.

이번 별신제에 집례로 참여한 김종인(73)씨는 “다른 마을은 당산젠디, 우리는 별신제여, 방촌보다 오래됐제, 우리는 한번도 안 멈췄제, 300년이나 깨끗한 갱본에다 제단을 만들어 ‘천제天祭’를 지내고 있응께”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당산제 당제 별신제 도제…이름도 다양한 마을제

별신제는 호계리 외에 전라도 각처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마을제는 ‘당산제’라 부르는 마을이 가장 많으며 ‘당제’‘별신제’‘도제’ 등으로도 부른다. 이 때 모시는 신체神體로 당산나무, 입석, 짐대, 장승, 단지(곡식이 담김) 등이 있으며 호계리처럼 신체가 없이 제단을 만들어 의례를 행하는 경우도 있다.

담양 수북면 풍수리 미산未山마을은 당산제 혹은 천제天祭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과거 당산제를 지내기 전날 짐대를 만들어 나무오리를 앉혀 동쪽을 보게 세우기도 했다. 이 마을 당산신은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그리고 아들당산 등으로 일가족을 이루고 있다.

할아버지당산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수령 200년의 노거수이다. 할머니당산은 7년 전에 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베어진 후 마을 입구에 조그마한 나무를 심어 모시고 있다. 그리고 마을 남쪽 입구 길가에 입석 한 기가 있는데, 이를 마을 사람들은 ‘아들비석’ 혹은 ‘아들당산’이라고 부른다.

한편, 영산강이 굽이치는 나주 공산면 강변에 위치한 척포마을은 매년 정월 열나흗날 밤이면 마을을 지켜준다는 ‘당산할머니’께 ‘도제’라 불리는 제를 지내 일년 평안과 주민의 단합을 꾀하고 있다. 이 마을 도제는 원래 열두 당산에서 거행되는 규모가 큰 마을제였다. ‘오산-들’ 안에 있던 일곱 군데 당산, 마을내 천룡신(철융신), 사장신, 조왕신을 모시는 세 곳의 당산, 영산강변에 두 곳의 당산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1974년 오산들이 경지정리되면서 영산강변의 당산을 포함한 아홉 군데의 당산이 사라졌고, 지금은 마을 입구에 새롭게 조성된 ‘당산할머니’당산과 천룡신, 사장신, 조왕신을 모시는 당산 등 네 곳에서만 도제가 거행되고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이 제 지내는 사람보다 더 많으니…”

밤8시 무렵이 되자 십여명의 호계리 주민들이 저녁을 먹고 회관에 들어섰다. 이들은 모두 마을의 명령을 받은 제관들이었다. 이들은 회관에 모여서 그간 별신제에 얽힌 이야기와 영험담, 마을의 대소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다른 방에서는 명령을 받았지만 유고로 별신제에 참여할 수 없는 몇 사람이 모였지만 서로 이동은 물론 전혀 아는 기척을 하지 않았다. 회관에서 나눈 이야기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별신제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오늘 제단을 설치하면서 나온 이야긴디, 매구 칠 사람이 없으니까 다음에는 녹음테이프와 확성기로 해야것어.”
“젊은 사람이 없어도 그것은 안되제.”
“수입을 해서라도 명맥을 이어야제.”
“구경하는 사람이 제 지내는 사람보다 더 많으니…”
“가장 큰 문제는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이여.”
“이번에 교수님들 왔응께 힘좀 많이 써주셔야 것그만.”
“이럴 줄 알았으면 장항리에서라도 사람을 꾸어 올 것을….”
“사람만 꿔오면 뭘해 매구를 칠 줄 알아야제.”

밤10시 무렵, 제단에 불이 밝혀지고, 꽹과리로 시작된 행렬이 제단을 돌기 시작하면서 별신제는 시작된다. 매구를 치다가 입구에 멈추어 제단을 보고 “초경 아뢰오”라고 외치는데, 옛날에는 초경부터 오경까지 각각 매구를 치고 막걸리가 몇 순배 돌아갔다. 지금은 일경과 이경, 삼경과 사경, 그리고 오경으로 축소되었다.

이렇게 아뢰는 것은 별신제가 모시는 천지인天地人의 삼신에게 제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소리다. 과거에는 매구도 초저녁부터 여러 명이 참여해서 잘 쳐댔지만 지금은 겨우 꽹과리 두 명, 징 한 명, 북 두 명으로 의례에 임박해서 흉내만 내는 정도며, 그것도 대부분 칠팔십의 고령들이라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안타까웠다.

별신제 최고의 맛, 내장탕

대부분 마을제는 한두 명의 제관에 의해 거행된다. 그러나 호계리의 경우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집례, 축관 등 20여명의 제관에 의해 진행되는 특징을 보였다. 호계리의 별신제가 향교나 서원의 제향처럼 제관의 역할이 이처럼 세분화된 것은 유교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매년 마을총회에서는 별신제를 준비할 제관을 일주일 전에 정해 공고한다. 별신제는 4시간에 걸쳐 매구를 치고, 의례를 행해야 하는 힘든 일로, 고령화된 마을주민을 대상으로 제관을 구성하는 문제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금년 정월 마을에 유고가 생겨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들 중 몇 사람이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매구꾼, 제관의 수를 줄이고, 별신제를 보러간 사람들도 제물을 나르는 일, 횃불 드는 일 등을 거들면서 별신제는 거행되었다.

호계리처럼 대부분 마을제는 여자들의 참석을 엄하게 금해 왔다. 그러나 농촌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이러한 금기도 자연스레 깨져가고 있는 모습이다. 남자만의 의례였던 당산제에 여자들이 참석하기 시작하였고, 아예 부부가 제를 준비하는 마을이 있다. 담양 미산마을의 당산제는 제관 부부가 제를 거행하는 마을이다.

오경을 아뢰고 나자 제물을 장만한 제관집에서 음식을 가마로 내왔다. 제물 장만을 맡은 제관은 청주 세 병과 백설기, 가래떡, 나락, 보리, 콩, 팥, 목화씨, 다리를 묶은 장닭 한 마리를 준비해야 한다. 비용은 마을 대동계 재산인 500여 평의 제답에서 받은 곡식으로 준비한다고 한다. 제물은 정성을 다해서 준비해야 하며 수건이나 하얀 마스크로 입을 가려야 한다.

술은 소주와 제주가 빚은 막걸리며 안주는 소내장탕이다. 지금까지 먹어본 내장탕 중에서 그렇게 맛있는 탕은 처음이었다. 두부를 넣어서 끊인 내장탕은 별신제를 준비하는 사람과 주민들을 위해서 준비한 유일한 음식이었다. 직접 빚은 달콤한 막걸리가 몇 잔 들어가고, 내장탕에는 소주가 최고라며 이장님이 권하는 소주가 섞이자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잡귀잡신을 쫓는 피가 제장에 뿌려지고

제장에서 한바탕 매구를 치고, 진설을 하는 동안 장막에서는 불을 밝히고 축문을 쓴다. 집례가 모든 제관과 별신제의 역할을 맡은 사람을 호명하면서 별신제는 막이 오르고 있었다. 호계리 별신제의 하이라이트는 장닭의 목을 잘라 피를 제장에 뿌리는 의례이다. 예전에는 돼지를 사서 그 목을 잘랐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닭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잡귀잡신을 쫓기 위해 이처럼 닭의 피를 뿌린다고 한다.

장닭의 목은 제단 근처에 묻고 몸둥이는 다음날 죽을 쑤어 노인들을 대접하고 있다. 별신제는 소지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마을주민의 이름이 호명되면서, 그가 처한 상황에 맞는 기도가 제관의 입을 통해 구송되고 있었다.


'아우르기'는 -

아우르기는 기존의 유적지 중심의 답사문화와 다른 생활문화답사를 표방, 그 동안 대보름답사, 시장답사, 장승답사, 전통마을답사, 고분답사, 축제답사, 염전답사, 섬답사 등을 추진해 왔습니다.
아우르기는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건축학, 민속학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참여자치 참여자치21(대표 민형배)의 답사모임입니다.
※ 아우르기란 : '둘 또는 여럿을 한 덩어리나 한 판(혹은 큰 판)이 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순수한 우리말로, 특정한 사람들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열린 답사를 지향하는 모임의 취지에 맞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 현재 회원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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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관(정치학, 오마이뉴스 기자)
김 준(사회학,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연구교수)
김미향(영상인류학, 목포대 강사)
김재웅(건축사, 조대 박사수료)
모상근(미술비평, 조선대 미술학과 석사수료)
문안식(사학, 화순군 문화재 전문위원)
박경섭(인류학, 전남대학교 석사)
박종오(민속학, 전남대 박사수료, 전남대박물관 특별연구원)
선영란(인류학, 목포대 강사)
이대석(고고학, 목포대 석사 수료, 함평 나산중학교 교사)
전고필(관광학, 동강대 교수)
조은정(도자사, 광주박물관, 홍대 석사수료)
지지성(불교사, 조선대 사학과 석사수료)
진 주(사회학, 전남대학교 석사수료) 차정옥(사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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