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2407호/ 2008.3.8/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순천 송광사에 봉안돼 있는 원감국사 진영

“도시의 반은 도망가 빈 집이고(邑邑半逃戶), 마을 마을이 모두 황폐한 전답(村村階廢田). 세금은 끝내 면할 수 없고(官稅竟難免), 군량은 또 어떻게 조달해야 하나(軍租安可蜀). 온 천하가 연기와 먼지일세(四海皆烟鹿). 끓는 물에 삶기는 듯 괴로운 백성(烝民因煎鰲), 보이는 것 마다 불쌍하구나(觸目旴可哀).”

전형적 승복차림의 전신 의자상

농담 살려낸 색감, 안정적 느낌

조계종 중흥조인 원감국사 충지스님(沖止, 1226∼1293)은 ‘영남간고장(嶺南艱苦壯)’이란 시를 통해 13세기 말 몽고족의 침입과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피폐한 삶을 살아야 했던 고려 백성들의 아픔을 이처럼 묘사했다.

송광사 16국사 중에서 다시(茶詩)를 가장 많이 남긴 스님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충지스님의 시에는 당시 시대적 아픔을 안타까워하는 애민우국의 마음이 오롯이 배여있다. 전남 장흥 출신으로 속성은 위 씨, 속명은 원개였던 충지스님은 1244년(고종 31)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 벼슬길에 올랐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국위를 선양하고, 문체가 원숙뛰어나 당시 선비들을 탄복하게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어릴 적부터 속세를 떠날 뜻을 두고 관직생활을 하던 중 몽고에 반기를 든 최씨의 무인정권의 항몽으로 수도가 강화로 옮겨지고 육지에 남은 백성들만 몽고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등 암담한 시대적 상황을 직면하고 29세의 나이에 출가를 결심한다.

이후 선원사 원오국사에게 구족계를 받은 충지스님은 교학을 탐구하여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이어 여러 사찰을 거친 후 원오국사의 추천으로 조계산 수선사(현 송광사) 제6세 사주가 됐다. 특히 스님은 시문에 탁월해 <동문선>에 여러 시문이 실려 있고, 저서로 <원감국사가송>이 전해진다.

스님은 세수 67세, 법납 39세를 일기로 “생사는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고려 충렬왕은 스님의 업적을 기려 시호를 ‘원감국사’라 칭하고 탑 중수를 명했다. 현재 스님의 탑은 송광사 감로암에 보전돼 있다.

지충스님의 진영은 송광사 국사전(국보 56호)에 지눌스님, 혜심스님, 몽여스님, 혼원스님 등 16국사와 함께 봉안돼 있다. 1780년(정조 4) 응성 지호스님이 증명한 가운데 쾌윤스님 등에 의해 조성된 스님의 진영은 전신 의자상이다. 복식은 장삼에 가사를 걸친 전형적인 승복을 입고 있으며 장삼은 비교적 단조로운 색조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철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주름진 곳은 농담을 달리하는 색감의 효율성을 살려 안정된 느낌을 준다.

지충스님을 비롯해 16국사 진영의 가사는 모두 첩상가사다. 색체의 다양한 배합과 적절한 면의 분할로 실재감 있게 표현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녹색, 적색, 또는 황색, 흑색의 첩상가사가 장삼과 조화를 이루며 진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안면의 묘사는 담백한 색조 위에 선으로 표현되는 백묘법으로 되어 있고, 관조하는 듯 한 눈과 입 등이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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