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307번째 하늘에 지내는 제사라고 한다. 전국의 민속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지만, 일반 대중들과 정작 우리 고장인 장흥군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별신제가 열리고 있는 호계리를 지난 2008년 2월 20일 보름 전날 저녁 9시경에 찾아갔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호계리 문화예술박물관은 2008년 1월에 문을 열었다. 호계리 출신 향우들과 마을 주민, 장흥군, 전남도의 예산 지원을 받아 완공된 호계리 박물관은 농촌 마을에서는 거의 유일하리 만큼 많은 5억의 예산이 집행된 박물관이다.

호계리 마을에 문화예술박물관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박물관이 문을 열게 된 것은 순전히 300년을 넘게 지켜온 마을 전통인 별신제(別神祭)라는 하늘에 제를 올리는 천제(天祭) 때문이다.

호계리 마을에는 약 65호 80여 주민들이 살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50세로 대부분 주민들이 60-80대의 노인들이다. 그래서 매년 단 한번 지내는 별신제가 버겁기만 하다.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최양기(68)씨는 “인자 참말로 심 들어라. 평생 단 한 번도 별신제가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 왔는디, 인자 별신제를 지낼 사람도 없당께요” 한다.

호계리 마을의 김점규(68)씨는 “참말로 우리마을 별신제는 인정해 줘야 한당께요. 옛날 한국전쟁 때도 별신제를 지냈당께요. 인민군들이 총을 들고 난리였는디, 마을 어르신들은 그라고 사슬이 파랄때도 제를 올렸당께요. 오늘이 딱 307번 짼디, 옛날에 마을에 우안(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때 한해에 두 번 세 번도 지냈다고 어른들이 말했고,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낸 제사랑께요" 했다.

이 마을에서 처음 별신제를 지내게 된 것은 1702년 (숙종 28년)때부터였다.
마을 사람들은 천제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삼신(三神)인 천신(天神), 지신(地神), 인신(人神)에게 오곡(무명, 수수, 팥, 콩, 보리)과 무, 가래떡, 밤, 대추를 제물로 올리면서 마을의 안녕과 국태민안(國泰民安) 그리고 마을의 풍요와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호계마을 김종관(68)씨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40대 때만 해도 별신제는 이웃마을인 월만, 장항, 만수마을과 함께 4개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여 제를 지냈제. 별신제는 정월 초 이렛(7 일)날 4개 마을이 회의를 하여 날짜를 정했제. 제를 올리는 초헌관과 음식을 장만하는 장찬은 정월 이렛날부터 열 나흘 날까지 찬물로 몸을 씻어야 한당께. 음식 장만을 맡은 사람은 꼭 혼자 사는 여자가 장만해야 하고, 대문에는 금줄을 치고 치칸(화장실)에 가고 나믄 꼭 찬물로 몸을 씻어야 한당께요. 그랑께 그놈의 치칸을 안 갈라고 아무것도 안 묵어불믄서 일주일 정도를 견뎌븐당께요.”
다음은 호계마을 김종근(78) 할아버지의 말이다.

“제사는 그래도 어찌게 하든지 지내 것는디, 사람이 없어 븐께 참말로 심이 든 당께요. 옛날에 참여했던 이웃마을은 인자 참여하지 않고 우리마을만 제를 올리게 됐는디, 제를 올리는 사람은 있는디, 제를 올리라믄 신께 풍악을 울려야 하는디, 풍악을 해줄 사람들이 없당께요. 그란디 올해는 참말로 다행인 것이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이 풍물을 해 주것다고 이라고 찾아와서 천만 다행이랑께요.”

호계마을 별신제가 전통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외부 도움이 절실하다는 김종관씨는 꼭 공공기관이나 언론사 등과의 자매결연이 필요하다며 연결이 될 수 있도록 부탁을 했다.

“호계마을은 박물관이 있고 마을회관이 있어 잠자리와 음식 등을 충분하게 준비할 수 있응께, 자매결연을 맺게 되면 우리마을에 찾아와 며칠씩이라도 묵어 가믄서 우리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맘껏 먹으면서 별신제도 함께 참여하면서 큰 잔치를 열수 있을 것 같은디, 어디 자매 결연을 맺을만한 기업을 소개 한번 해주쇼.”

저녁 9시경부터 시작된 별신제는 학생들이 풍물을 울리면서 시작되었다. 마을 어른들은 하룻밤을 초경, 이경, 삼경, 사경, 오경으로 나누어 풍물을 치면서 천신께 “초경이요, 이경이요, 삼경이요”라고 알리면서 사경이 끝나면 제를 올린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밤은 오경까지 가지 않고 초경과 이경을 하나로 묶어서 알리고 삼경과 사경을 함께 묶어서 신께 알리고 난 밤 11시경부터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집사의 부름에 초헌관과 아헌관 등 제를 올리는 마을 어른들이 나와 술을 올리고 신께 엄숙하게 절을 올리기를 수십 번 한 뒤 밤 12시 30분경에야 제사가 끝나고 음복에 들어갔다.

제를 올렸던 음식을 먹어야 복을 많이 받는다며 제에 올렸던 제주(祭酒)를 마을 어른들과 학생들에게 권한다.

모두 음복을 하면서 올 한해 마을의 풍요와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전통문화를 배우면서 참여한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통극문화연구회 학생들은 의미 있는 행사에 참여하여 추운 줄도 모르고 즐거웠다고 말했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잃지 않고 지켜내기 위해 우리 모두 우리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마동욱(오마이뉴스 기자)



호계리 마을의 지신밟기

별신제 다음 날 지내는 지신밟기도 3백년 역사
해마다 별신제 기록물 남겨- 민속학자들 주목








어젯밤 12시 30분경에야 별신제가 끝났다. 별신제의 모든 장면을 사진에 담고 돌아오는 길에 전대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고 있는 정명철 후배가 내일 아침에 다시 호계리에서 지신밟기를 한다고 전했다.

아침 일찍 다시 찾은 호계리마을은 어젯밤 보이지 않던 아주머니들이 음식준비에 매우 분주하게 움직였다. 별신제의 모든 준비와 제사는 오직 남자만 할 수 있다는 옛날 옛적부터 전해 내려온 오랜 풍습에 따라 여자들은 참여하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에는 여자들이 음식을 장만하고 음식을 나르며 앞장을 섰다.
호계리마을에서는 별신제가 끝난 다음 날인 보름날 오전에 별신제의 결산을 보는 마을 회의를 열어 별신제를 치르면서 제관으로 참여한 모든 제관들의 이름과 역할을 기록한다.

별신제를 처음 지내기 시작하면서 기록해 두었던 별신제의 모든 기록이 300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현재까지 잘 보존된 것은 호계리 마을의 큰 자랑이다.

전국의 민속학자들이 호계리 마을에 주목하는 것은 그 만큼 오랫동안 빠짐이 없이 잘 정리되어 기록해 둔 별신제의 기록물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라고 김종관(68)씨는 말해 주었다.

아침 일찍 시작한 회의는 진통을 겪고 있었다. 어젯밤 별신제에서 자기 역할을 잘해야 함에도 갈수록 제를 올리는 사람도 없고,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우왕좌왕 자기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고 반성하는 자리가 되고 있었다.
회관 밖까지 큰소리가 들려 지신밟기를 오전까지만 해주고 떠나려고 했던 전남대 국학과 전통극문화연구회 학생들과 나는 불안하기까지 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회의에 참석했던 종관씨께서 “모든것이 그 놈의 사람 땜시 그래, 제를 올릴 사람이 없응께 그런 거여, 인자 귀찮은 거, 심든 거 서로 안 할라고 하제. 옛날에 서로 제관을 할라고 난리였는디, 인자는 참말로 할 사람이 없당께”하신다.

“그나저나 그래도 이라고 학생들이 왔응께 지신밟기는 해야제, 한 해 동안의 모든 액 매귀는 풍악이랑께,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풍물을 뚜들고 나믄 시원하제”한다.
지신밟기의 앞잡이 역할은 김종근(86)할아버지가 했다. “먼저 그랑께 어지께까지 고상을 제일 많이 한 장찬(제사에 음식을 장만한 사람 집) 집 부터 해야제” 하시면서 풍물패를 장찬집으로 안내했다.

마을 주민들은 대학생들의 마당굿을 보며 옛날 옛적을 생각했다.
“어린 것들이 이쁘게 생겨갔고, 참말로 별 것이네, 영판 잘하네, 우리집도 한 번 해주면 좋것구마, 종근이 아제 우리집 꼭 해주믄 안 되것쇼.”

“왔 따 그란디 어쩌께라, 학생들이 바쁘다고 한께, 내 생각 같으믄 이왕에 시작했응께 집집마다 확 두둘겨불믄 좋것는디, 바쁘다고 안 하요.” 종근할아버지는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어이 종관이 그래도 저그 범섭이 집은 꼭 가야 쓰것는디, 그랑께 그 놈이 속이 무지 상해갔고 있데, 어지께부터 부탁을 했어 꼭 해달라고” 하신다.

“범섭씨는 나이가 50쯤된디 아직 장가도 못 가고 혼자 살믄서 삿시를 하고 댕긴디, 아부지는 얼마전 돌아가시고, 엄니가 엇 그저께 마당에서 치칸을 갔다 오다가 쓰러져 갔고, 지금 장흥병원에 입원에 있고, 또 그 와중에 광주서 교통사고가 나갔고 500만원이나 합의금을 물어 주었데야, 그랑께 한 번 해주쇼.”
동네 옆집 아주머니도 간절하게 풍물패에게 부탁을 했다.
범섭씨집에 도착했다. 범섭씨는 대문 앞에서 풍물패를 맞이했다.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풍물이 울려퍼지는 동안 두 손을 모아 간절한 기도를 했다. 사는 게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에 풍물패와 그 모습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풍물패가 마당굿과 곳간굿 샘굿을 하고 집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범섭씨가 풍물패를 다시 대문앞 도로가에 세워둔 자신의 화물차로 안내했다. 엊그제 교통사고가 나 500만원을 쓰게 된 화물차에게 풍물을 울려주고 자신은 간절하게 두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범섭씨집의 지신밟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풍물패와 동네 사람들은 그의 소박한 순수함에 고개가 숙여진다고 하며 그의 어려운 사정이 액매귀 굿으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하게 소망을 했다.

/마동욱(오마이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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