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사 주지 청원당 현광(속명 이경환)은 정읍시 출신이다(1936년생).

1961년 26세때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의 계를 받아 출가했고, 이후 해인사, 서울 삼각산 암자 등 전국의 크고 작은 선원에서 수도에 정진했다.

1976년부터 수년간 조계종총림 송광사에서 초대 총무를 맡기도 했고, 광주 증심사 주지 등을 거쳐 1993년 6월 1일 보림사 주지로 부임해 왔다.
천년고찰 보림사는 보조선사 체징이 선문 도량으로 개창한 이래 호남의 명찰로 입지해왔으나, 1950년 한국동란 때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목조건물 중에서 사천왕문과 사천왕상만이 간신히 화를 면했을 정도였다. 또 철불인 철조비로자나불상을 비롯, 석조물 중에서 3층석탑, 석등, 보조선사창성탑과 탑비만이 천년 전의 모습을 잃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페허나 다름없는 보림사에 중건의 총책을 떠 안은 현광스님이 임명되어 온 것이다.

당시 보림사에는 6.25 이후인 1968년 대적광전 복원에 이어 1984년 대웅전이 간신히 복원되어 사찰의 명맥을 이어나오고 있었다.

주지 현광은 열정적으로 보림사 복원과 중건에 매달렸다. 그의 이같은 노력으로 1996년 신검당, 종각, 조사전, 보림당을 신축했으며 그후에도 계속 요사채와 명부전 등 주요 건물을 신축하거나 복원사업이 진행돼 왔다.

또 지난 2007년 4월에는 국보 제117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에 대한 개금식 및 삼존불 4대 협시보살 점안식이 봉행되고 대적광전(54평) 준공식과 선방(54평) 기공식도 이루어지면서 비록 옛 가람의 모습에는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가일층 사찰다운 면모로 일신해 가고 있는 상태이다.


“내가 보림사로 부임해왔을 때 내 몸뚱이 하나 편안히 뉠 공간이 없었다. 천년고찰이고 선종본찰이어서 조용히 수도나 닦으리라는 생각으로 궁벽한 유치 보림사로 덜컥 내려왔던 내 꼴이 우스웠다. …결국 나는 수도는 아예 집어치우기로 하고, 옛날 보림사의 반만큼이나마 보림사를 중건하고 복원해 내리라고 마음먹었고, 이것이 또 내 사명이라고 생각을 했다.

해서 오로지 그 사명수행을 위해서 서슴없이 속세로 자주 내려가 ‘땡초’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함께 어울리고, 권하는 곡차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보림사 복원에 필요한 자금을 따내기 위해 서울의 해당 부처들을 찾아다니며, 그들 속세인들이 좋아하는 소위 ‘로비’라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몇 년 전, 현광 스님이 기자에게 털어놓은 말이었다.

현광스님의 영결식 때 함께 수도하고 평생을 지기로 지내왔다는 송광사 전주지 현봉스님은 현광스님의 행장소개에서 “한국동란 후 폐허나 다름없던 보림사가 현광스님의 각별하고도 집념어린 노력으로 지금은 경내 30여동의 건물이 웅장하게 들어선 명찰로 재현되었다”면서 “송광사의 총무스님과 보림사 주지승으로 보여주었듯, 현광스님은 종무행정의 달인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스님은 자주 저자거리에 나가 대중들과 잘 어울리는 소탈하고 자유자애한 대선사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또 국회의원이었을 때 현광스님의 보림사 복원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적극 도와주기도 했던 이영권씨는 이날 조사에서 “스님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보림사 중건과 복원사업 같은 일은 감히 그 누구였을지라도 생각도 못했을 것”이라면서 “복원사업을 위해 세속인들과 곡차도 마시며 세속을 헤쳐 나가다 지치고 지치시어 그렇게 가신 것이 아니신가요?”하며 스님의 갑작스런 비보에 통분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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