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봉에서 본 아소카왕 탑

■기록으로 본 불교 최초 도래기


우리나라에 불교가 맨 처음 도래하기는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화상이 고구려 사신으로 입국(372년)하면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고구려에는 아도화상(그는 당시 위魏나라 사신 아굴마와 고도령-고구려 여인-사이에 태어나 5세에 입산했다고 한다)이 불법을 홍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신라 눌지왕 때(417년)로, 당시 고구려 승려였던 아도화상이 신라에 와서 처음으로 포교를 하며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제에 불교가 처음들어온 것은 침류왕 원년(384년), 인도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에 최초로 불교를 전하고 불갑사를 세우면서부터다.

이처럼 당시 삼국시대의 불교도래기는 3,4세기 전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보다 앞선 시기에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설이 있었으니, 바로 가야 김수로왕 7년(48년)에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후와 그녀의 오빠 장유화상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는, 이른바 남방불교 전래설과 그 흔적이 남아있는 명월사지 등이 그것이다.


■기록으로 본 최초 부처님 진신사리 도래설


그리고 불교 최초도래설과 함께 밀접한 관련이 있는 최초 석가모니의 사리의 도래설은,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사리가 전달된 것은 '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10년(549년)이다. "양나라에서 사신으로 입학승 각덕과 함께 파견하면서 부처의 사리를 전하자 왕은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 나아가 맞이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의 오대산 태화지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불정골(부처님의 정골 뼈)와 치아사리 등 백 개와 부처님이 입었던 가사 한 벌을 가져왔다고 한다. 자장법사는 사리를 황룡사 탑과 태화사 탑, 그리고 통도사 불단에 나누어 봉안했다.

그리고 1976년 구미 도리사에서는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올 때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세존사리탑 보수공사중 금동육각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에 봉안되어 있는 발견했다. 이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었고,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이 진신사리가 아도화상이 가져온 것이라면, 그 시기는 417년으로 삼국유사 기록(549년)에 130여년을 앞세게 된다.

현재는 양산의 통도사, 설악산의 봉정암, 정선군의 정암사, 영월군의 법흥사, 오대산의 상원사 등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기록이 아닌 설화로, 이보다 먼저 석가모니의 진시사리가 전해진 곳은 계룡사 갑사 부근의 신흥암 천진보답(天眞寶塔,충남문화재자료 68호)다.

이 보탑은 공주 계룡산 내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있는 자연바위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바위가 몇 개씩 포개어져 만들어진 자연 그대로의 탑이다. 이 탑은 갑사에서 동쪽으로 1.3㎞ 정도 떨어진 용문폭포 위의 신흥암(新興庵) 뒤에 있으는데, 이 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인도의 아소카왕(기원전 273-232 阿育王)이 구시나가라국에 있는 사리탑(舍利塔)에서 부처의 사리 8곡(斛) 4두(斗)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십왕세계(十王世界)에 나누어 줄 때 사천왕 가운데 북방을 담당한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을 계룡산에 보내어 이 천연석탑 안에 사리를 두었는데,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이 사리를 발견하고 천진보탑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구전에 의한 것으로 기록에는 없다. 기록으로 아소카왕 때, 즉 기원전 3세기때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한반도에 건너온 것은 장흥 천관산 탐사사가 유일한 것이며, 그 때 불교가 탑산사에 전래된 것이므로,김수로왕의 허황후의 남방불교 전래(48년) 3백여년, 고구려 불교 전래(372년)보다 무려 640여년이나 앞서게 된다.

(아소카왕과 관련된 설화는 경주 황룡사(사적6호) 금동장육상에도 전해오고 있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 553년에 착공하여 574년에 거의 완성단계에서 본존불이던 금동장륙상이 완성되었다. 이 금동장륙상과 아소카왕의 연기설은 <삼국유사>에 나오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인도의 아소카 왕이 불상을 조성하고자 세 번이나 시도하다 모두 실패해, 인도 전국을 다니면서 불상을 조성하려고 많은 애를 썼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다 결국 아소카왕은 인연 있는 국토에서 불(佛)이 이루어지기를 빌면서 구리 5만7000근과 황금 4만푼, 그리고 삼존상의 모양을 그린 그림을 실어 바다에 띄워보낸다. 그 배가 긴 세월을 떠돌다 신라의 울산 근처 바닷가에 닿는다. 그때 진흥왕은 그 재료를 사용해 불상을 완성시킨다. 그때 조성한 본존상은 구리 3만5700근, 황금 1만198푼이 들어갔다. 그리고 본존상을 보좌하는 두 보살상도 구리 1만2000근과 황금 1만136푼이나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금동장육상은 몽골의 침입으로 황룔사가 불타면서 불에 타 버라고 말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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