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산사지에 남아있는 석등


장흥 천관산의 탑산사가 한국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곳이라는 근거가 제시된 데 이어, 장흥군이 최근 천관산 탑산사에 대한 지표학술조사 용역을 의뢰해, 그 결과에 학계와 지역민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같은 사실이 공식 인정될 경우 국내 불교 역사가 5백년이상 앞당겨지게 된다.


■탑산사 - 한반도 불교 최초 도래지(?)


호남의 5대명산인 천관산 중턱 6백미터고지의 탑산사터.지금도 탑사사지에는 주춧돌이 괴여있고 주변에는 기와조각들도 널려 있다. 근처에는 인도 아소카왕(阿育王)탑으로 알려진 아육왕탑과 의상대사등 고승들이 수양한 선방터와 석등이 남아있다.

BC 83년 인도 아소코왕이 부처님의 사리로 8만4천개 탑을 세웠는데, 이 가운데 중국에 19개, 우리나라에는 전라도 천관산과 금강산 두 곳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동문선(東文選)>의 '천관산기(天冠山記)'와 보물 제523호로 지정된 <석보상절(釋譜詳節)> 제23권, 24권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기록원은 최근 한반도 불교 도래지 등과 관련된 이 두 문헌의 기록, 즉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처음 들어온 곳’이라는 기록을 공식기록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탑산사가 한반도 최초의 불교태동지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불교의 최초 도래설은 백제 침류왕 때(384년), 인도 마라난타가 영광에 불갑사를 세우면서부터라는 백제최초 불교도래설과, 가야국 김수로왕 7년(48년)에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김수로와의 왕비 허황후 등에 의해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졌다는 이른바 남방불교 전래설이 무게를 가지고 제기돼 왔다.

그러나 이번 장흥군의 학술조사에 의해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한반도에서 탑산사로 처음 들어온 곳’이라는 史實(사실)이 인정될 경우, 불교 역사가 5백년 이상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다.

장흥군 문화공보과 관계자는 "최근 탑산사가 불교 최초 도래지이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곳이라는 문헌과 기록이 공식기록으로 인정됨에 따라, 장흥군은 두 문헌의 기록에 근거해 지표조사를 실시한 뒤 학계의 연구와 검증작업을 거쳐 탑산사 일대를 불교성지로 개발하고 국내외에 홍보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또 군 관계자는 "아직 연구조사 초기단계로 어떤 성과가 나올 지 모르지만, 탑산사가 고대 불교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탑산사 일대를 한국 불교의 최초 도래지로서의 성역화 사업은 물론 고대 불교역사의 체험지로 가꿔나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탑산사는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 천관산에 있는 한국 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로, 그동안 서기 800년 통일신라 애장왕 때 창건됐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번 공식기록으로 인정받은 사실에 의하면 사찰건립과 부처님 사리 전래시기가 BC 83, 즉 2100여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석가 BC 563~BC 483, 아소카왕 재위 BC. 268~232)

그동안 이 탑산사에 인도의 아소카왕이 이곳에 보탑을 세워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고 설화로만 전해졌지만, 구체적인 문헌기록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한국기록원이 밝힌 '석보상절'의 문헌적 기록은 "아소카왕(阿育王)은 아도세왕이 세운 탑에 있는 사리를 다 내어 금, 은, 유리, 파려로 만든 통과 병 8만4천개에 담아 8만4천 탑을 세웠는데, 중국에는 19개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전라도의 천관산과 강원도 금강산에 이 탑이 있어 영험한 일이 있었다"라는 내용과 "아소카왕이 세운 것이 려왕 마흔여섯째 해인 무진년(BC83년/약2천1백여년 전)이다" 등에 의해 탑산사의 사찰건립시가 9세기 가까이 앞당겨지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을 근거로 한다면, 우리나라에 불교와 부처님사리의 전래시기도 BC 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현 탑산사 주진인 도성스님은 "탑산사의 이름도 아육왕 탑의 동편에 있다하여 얻어졌다"면서 "불교 전성기에 천관산에 89암자가 있었는데 탑산사는 89암자를 이끌었던 으뜸 사찰이었다"고 주장했다.


■옛날 탑산사는 어떤 사찰인가


현재 탑산사라 명칭되는 절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위치도 본래의 위치가 아니다. 본래의 탑산사는 현재의 탑산사에서 왼쪽 계곡을 타고가다 구룡봉 오르는 길 중간에 있었다. 천관산(天冠山) 남쪽 중허리이고, 거의 정상에 가까운 위치다.

원탑산사는 800년(신라 애장왕 1) 통령(通靈)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찰 이름은 절의 북서쪽에 있던 아소카왕탑(아육왕.阿育王塔)에서 유래되었으나, 현재 탑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의상암이 있었던 자리에는 중간석이 없는 석등 하나만 덜렁 남아 있다

설화에 따르면, 인도의 왕인 아소카 왕이 이곳에 보탑(寶塔)을 세워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또 아육왕탑 터 아래에는 가섭불(迦攝佛)이 좌선했다는 자리로 알려진 '가섭불연좌석(宴坐石)'이 남아 있다. 이는 경주 황룡사지에 있는 가섭불연좌석과 관련이 있어 불교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인도 아소카왕이 와서 쌓았다는 아육왕탑은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기이하면서도 영락없는 탑의 형상을 하고 있다. 본래는 5층이었는데 그 때 한층이 무너져 내려 지금은 4층만 남았다고 한다.

원탑산사는 대웅전, 시왕전, 공수청, 정방 등 크고 작은 방들을 갖춘 큰절이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전만 해도 대웅전과 시왕전·공수청·향적각 등 많은 건물이 있었던 사찰이었다. 800근이나 되는 대종도 있었다고 한다. 대종은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녹여 총포를 만들었는데, 이때 작은 종도 함께 만들었다는 사실이 종의 용두에 기록되어 있다.

1745년(영조 21) 이후 3차례 화재로 소실되어 작은 암자로 명맥을 이어왔다. 1923년 화재로 이 작은 암자마저 소실되었다.

현재는 탑산암이라는 암자만 하나 있지만 탑산암 주변에 옛날 사찰터로 보이는 축대와 계단, 기와들이 흩어져 있어 이 절의 융성했던 시절을 말해 준다.

특히 현재의 탑산암에 있는 샘은 사방 1미터가 넘는 크기로 탑산사가 매우 큰 절이었음을 웅변해 준다.

원탑산사의 위치는 천관산에서 가장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위치다. 천관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아육왕탑이 바로 곁에 있을뿐더러,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산비탈 가득 어울려 있어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탑산사의 이름도 아육왕탑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탑산암에서 바라보면 대덕읍과 회진항,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오며 하루종일 해가 드는 명당 가운데 명당이다.

현재의 탑산사는 1991년, 청화 스님이 ‘탑산암’ 암주 최보살의 권청을 받아 새로이 개원했다. 이어 1992년 6월 12일에는 부처님 이운식도 가졌다. 곡성군청 창고에 방치돼 있던 곡성군 목사동(木寺洞)에 있던 폐사의 불상을 모셔왔다. 큰스님께서는 그 후로도 수 차례에 걸쳐 탑산사 중흥을 위한 큰 법회를 가져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제지‘에 나오는 아육왕탑


존재 위백규의 <지제지>에 탑산사와 아육왕탑에 얽힌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조선 선조때 청금공 위정훈(聽禽公 魏廷勳)이 선세휘(宣世徽)와 천관산 의상엄에서 글을 이읽고 있었다. 어느날 이승(異僧)이 위정훈을 찾아와 “소승이 거처한 곳이 불영대”라며 매우 청절(淸絶)하니 구경하지 않으시렵니까?”하고 청하였다. 위정훈이 승려의 청에 응해 그 암자로 가니 가니 다른 중은 없고 그 중 하나만 극진히 대우를 했다.

새벽 삼경이 되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중이 들어와 말하기를 '아육왕탑이 무너져 의상암에 있던 모든 선비들은 다 죽었다'고 했다. 위정훈이 놀라 그 중에 친한 친구인 손세징 또한 죽었느냐고 묻자 중은 '학덕이 있고 청빈한 선비는 죽지 않는다'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의상암에 가보자 중이 말한 데로 아육왕탑이 무너져 의상암을 덮쳤고 다른 선비는 다 죽고 오직 손세싱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손세징의 말을 들은 즉, 갑자기 밖에서 '급히 나오라'는 세 번의 외침을 듣고 밖으로 나가자 아육왕탑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그 중이 산신령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제지> ‘아육왕 붕(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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