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신문/ 2007/08/15


2030년 농촌의 모습은 어떨까. 2030년이 선택된 이유는 이렇다. 앞으로 23년 후는 예측가능한 미래다. 또 가능성이 거론되는 일본·중국과도 FTA가 체결돼 있을지 모른다. 이밖에도 여러 변수가 있지만 미래의 사람들은 자연이 살아숨쉬는 농촌을 더 그리워할지 모른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소설가 유재용씨가 2030년의 농촌공간으로 안내한다.

이외근씨는 이민 수속을 밟아 캐나다로 떠난 지 23년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2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번도 고국에 가보지 않은 경우는 예외라고 할 만큼 드물어서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별종 취급을 받을 만한 사람에 한했다.

이외근씨가 이민을 결행한 이유는 부득이한 것이었지만 아주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무절제한 경쟁에 신물이 나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농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는데 농촌이라고 해서 이외근씨 가족을 덥석 받아들여 뿌리내리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때 이미, 아니 훨씬 전부터 농촌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빠져나가 노인만 남아 있는 모양새가 되었고, 농촌마을에서는 갓난아이 우는 소리와 아이들 뛰노는 모습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외근씨도 도시를 떠나기 전 농촌의 그런 현실을 듣고 보고 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외근씨는 농촌의 그런 면을 ‘역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계화에 의한 대규모 영농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이 실현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다. 한데 이외근씨는 설계도를 겨우 완성한 상태에서 커다란 장애물을 만났다. 바로 자유무역협정(FTA)이었다.

그 문제가 이외근씨 가족의 눈 앞을 막아서며 앞날에 대한 꿈을 짓밟아 깨부수어 놓았다. FTA 체결은 이외근씨 가족이 농촌생활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먼 앞날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졌다. 농민들은 위기감의 전단계인 불안감을 느끼며 사회 각계에 반대의사를 전달하면서도 ‘설마 현실화되랴’ 하는 낙관이 있었다.

그러나 FTA의 현실화는 농민들의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FTA가 체결되면 농촌경제는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도산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농업의 기초인 작물재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과수·목축 등 여러 분야에서 선진대국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됐다. 우리가 큰 운동장만 한 넓이의 논밭이라면, 선진국의 논밭은 우리 시골의 행정단위인 면(面)만 한 넓이였다. 단위면적당 생산가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정부도 공산품 수출의 중요성 때문에 농민의 절대적인 보호자가 되어 주지 못했다.

이외근씨는 심사숙고 끝에 이민을 선택했다. 마치 조국을 배반하는 길을 선택하기라도 한 것 같아 마음의 갈등을 겪었고, 혼자만 살 길을 찾아 훌쩍 떠나버리는 것 같아 죄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외근씨는 비장한 심정으로 이민 길에 올랐다. 그러나 혼자서만 편히 살기 위해 떠나가는 게 아니라 조국이 자신을 배신해 추방한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마음 속으로 ‘그렇다’고 계속해서 주장하다 보니까, 자신과 가족은 정말로 ‘쫓겨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달픈 이민생활은 배신당하고 쫓겨났다는 생각을, 틀림없는 사실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낯선 땅에서 고생하며 삶의 뿌리를 내리기까지의 근 10년 동안 이외근씨는 대한민국과 동포들을 향해 한정 없이, 사정 안 두고 증오와 원망을 퍼부었다. 역설적이게도 조국과 동포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낯선 땅에서의 실의와 절망을 견뎌내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을 훨씬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동안 한국의 농민들도 FTA라는 엄청난 도전에 맞서 싸우느라고 실의에 빠졌다가 헤어나기를 수없이 되풀이했을 것. 그러나 캐나다에서 생활기반을 일궈낸 이외근씨는 ‘한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지가 않았다. 막연하게 앞날 어느 때 기회가 생기면 가보게 되겠지, 하는 정도였다.

이외근씨가 한국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 것은 3년 전, 그러니까 2027년이었다. 줄곧 세계 10위이던 한국의 경제력이 한 단계 상승해 9위로 올라섰다. ‘그런가 보다’ 했더니 해마다 한 단계씩 상승해 지난해에는 세계 7위로 도약해 있었다. 전문가들의 예측으로는 올해 2030년에는 세계 6위가 될 것이라고 했다. 눈부신 과학기술 개발 못지않게 영농기술 첨단화의 성공으로 특용작물 재배에 성공하고 동시에 이들 첨단 농산물 수출이 경제 체질 강화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23년 만에 찾아온 한국의 농촌은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달라져 있었다. 우선 농촌마을에 젊은이들이 돌아와 있었다. 마치 민둥산이던 곳에 다시 숲이 울창하고, 떠나갔던 온갖 짐승들이 돌아와 새끼들을 낳아 키워내는 생명력과 활기가 넘치는 산으로 회복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단지 ‘회복되었다’는 것만으로 설명될 수가 없었다. 한국의 농촌은 오랫동안 국민의 식량을 만들어 공급하고 인구의 70%를 차지해 인적자원의 절대적인 공급원이라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삶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산업화에 성공해 ‘보릿고개’의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도 농촌의 젊은이들이 서슴지 않고 농촌을 등지게 되었던 까닭의 커다란 부분이 오랫동안 대대로 겪어온 가난일 터였다.

그러니 2030년 현재의 한국 농촌의 모습을 두고 단지 회복이라고만 표현할 수는 없었다. 버리고 떠나 비어 있는 집이라고는 단 한 채도 없었다. 아니 새 집들이 많이 지어져 있었다. 농촌을 떠났던 농민 가족들이 거꾸로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 벌써 한참 전부터라고 했다. 소득이 도시 중산층에 뒤지지 않게 된 상황에서 공해가 심한 도시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소득과 공해 적은 환경이 귀향하는 이유의 전부가 아니었다. 품위 있는 삶, 명예로운 삶, 편리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여러 조건들이 수준 높게 갖춰져 있는 점이었다. 우선 대기업과 대학의 연구소들이 농촌지역에 설립되어 들어서 농촌 부흥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성과는 품종개량을 통한 우량농산물 생산과 생산증대에 그치지 않았다. 연구소에서는 농작물 속에서 특수성분을 발견하고 추출해내어 유효한 물질로 합성한 뒤 난치병 치료약품을 제조해 내든가, 난치병 치료에 특효가 있는 농산물을 만들어 내든가 했다.

연구소와 농촌이 한팀이 돼 농작물을 생산해내면, 농촌은 물론이고 전국적 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아 외국으로 수출한다고 했다. 농촌에는 농작물을 수입해 가려는 외국 상인들과 기술을 배우려는 외국인 학생, 연구원, 관광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을 맞기 위한 숙박시설과 음식점 등이 세워져 성업 중이었다. 농민의 소득이 증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폐교되었던 초등학교 건물이 다시 문을 열었고, 해마다 취학아동이 늘어나 학교건물을 증축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민가기 전 친밀하게 지내던 농민의 집에서 며칠을 묵으며 이외근씨는 갈등 속으로 빠져 들었다. 캐나다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과의 싸움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앞으로 2~3년 안에 남북한이 통일을 이룩할 것이라는 외국전문가들의 예측 발언이 보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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