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2007.08.27

이훈/전무등일보편집인-주필







장흥 회진면 이진목 해변. 수로에 어선들이 물꼬 아래 물고기들처럼 모여 있다. 이진목 전어는 씨알이 굵어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임정옥기자

길 좀 고쳐 달라" 나그네에 통사정

하소연 들어줄 귀 큰 양반 없을까

어젯밤 늦가을 비가 내려서인지 버스에서 무릎이 제법 시렸는데 해변에 서니 찌뿌듯했던 기분이 싹 가신다. 오늘이 11월7일(2006), 걷기 시작한지 열세 번째 되는 날이다.

고금도행 철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량항을 빠져나간다. 중방파제 입구에 서서 좋은 이름이 없을까 다시 작명을 생각한다. 엊그제 마량에 도착했을 때 잘 꾸며진 중방파제를 돌아보며, 여기를 뭐라고 부르느냐니까 사람마다 “그냥 중방파제여라우” 했는데 양이 차지 않는 이름이다.

가운데 있는 방파제라 해서 중방파제로 부른다는데, ‘미항 마량’을 꿈꾸며 바다 위에 공원을 띄웠으면 이름도 그에 걸맞아야 할 텐데 그냥 중방파제라니, 어디 쓰겄는가.

버스터미널에서 청년이 일러준 대로 쭈욱 해변을 따라 올라가니 남양건설 고금대교 현장사무소가 길을 막는다. 쭈욱 올라올 일이 아니었구나. 경찰지구대에 들러 물으니, 가다가 삼거리가 나오면 교회 쪽 비탈길로 올라가라며 방금 지나온 길을 가리킨다.

현지사람들은 자기네들은 빤히 아는 길이라 쉽게 말하지만 나그네는 모퉁이 하나 차이로 엉뚱한 길을 갈 수 있다. 출발부터 몇 백 걸음 손해 봤다.

마량중앙교회 입구를 지나 고갯길에 올라서니 아침 해가 바로 눈앞에서 솟는다. 햇살을 받은 몸에 온기가 퍼진다. 오른쪽으로 아직 상판이 올려지지 않은 고금대교 교각들이 파란 바다에 육중하게 솟아 있다.

오랜만에 내린 비로 길은 촉촉이 젖었다. 신마 앞길은 완전히 진흙탕이다. 신발이며 바지가랑이가 수렁에 빠진 듯 엉망이 된다.

가만있자. 여기 신마 어디에 수렁배미가 있다고 ‘강진군 마을사-마량면편’에 쓰여 있던데. 수렁이 얼마나 깊던지 빠지면 바다 건너 고금도 용도리로 나온다고?… 수렁보다 더 깊은 옛 사람들의 익살이 재밌다.

마침 마을 앞에 서 있는 할아버지에게 수렁배미를 물으니 “쓰잘데기 없는 소리”라고 일축하면서, “어디서 왔소? 그나 좋은 거시기 허요.” 하며 신마방조제에 오르는 길을 알려준다.

‘좋은 거시기’라… 거시기, 참 편리한 말이다. 거시기라고 해도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뜻을 짐작할 수 있으니 두루뭉술, 우리말에서 이만큼 오지랖 넓은 말도 드물리라.

신마방조제를 지나면 숙마아랫마을 지역이다. 숙마(宿馬)는 저 위쪽에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마량은 말의 형국인데 숙마는 말이 누워있는 자리라 하여 그런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조금 전에 지난 신마는 옛 이름이 땀(담)마로, 담을 둘러 말을 키우던 곳이란다. 제주에서 보낸 조랑말이 원마(마량 중심지)에 도착해 신마와 숙마에서 피로를 푼 뒤 한양으로 떠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제주 조랑말과 관련된 구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지난해 제주에서 조랑말 한 쌍을 마량에 보내와 화제가 되었다. 그 말을 신마와 숙마, 강진농고에서 서로 키우겠다고 줄다리기를 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마량면사무소에 알아보니 숙마마을 전 이장 이윤석씨가 키운다고 황상운 계장이 전한다.

숙마 아랫마을에서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길이 있을 법한데 지도에는 애매하다. 마침 한 젊은이가 임도 같은 산길을 내려오기에 길을 물으니 “차이나, 차이나” 하며 손을 젓는다. 여기에까지 중국인 근로자가 와 있구나.

다른 사람에게 물으니 갈 수는 있는데 중간 100여m는 길이 안 좋다면서, “말 좀 해 주시오 예. 고쳐준다고 말만 하지 하세월이어라우” 하소연이다.

걷는 데는 불편이 없으나 자동차가 지나기에는 위험한 길이다. 한 차선 정도 되는 길을 파도가 파먹어 곧 무너질 듯 위태롭다. 바퀴 하나라도 잘 못 굴리면 그대로 바다로 곤두박질치겠다. 오죽했으면 나그네에게까지 매달리겠는가. 이 하소연 들어줄 귀 큰 양반 어디 없을까.

바다를 끼고 위태로운 길을 지나니 갯바위낚시꾼들이 해변에 늘어섰다. 아주머니 꾼도 보인다. 돔이 잘 잡히는 곳인데 아직 입질이 없다고 투덜댄다.

더 이상 해변길이 없다. 들을 건너 신리방조제 위쪽 하분 마을 앞을 지나는 77번 국도로 올라선다. 하분은 강진군의 마지막 마을이다. 자동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길, 하분교 건너에 선 이정표가 ‘장흥군/대덕읍 7㎞ 장흥 30㎞’를 알린다. 이제부터 장흥 땅을 걷는다.

장흥 땅에서 만난 첫 마을, 신리 길가에 돌샘이 보인다. 반갑다. 바지가랑이나 씻자.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둥근 돌확과 직사각형으로 긴 돌확이 2단으로 설치돼 맑은 물이 철철 넘친다.

물 한바가지를 받아 마시고 아랫단 직사각형 돌확에 담긴 물을 퍼 바지 가랑이며 신발에 달라붙은 신마의 흙을 씻어낸다.

“거 조심하시오. 우리 동네 식수여라우”

들로 나가던 아저씨가 주의를 준다. 마을 뒷산에 지하수를 파 끌어온 것인데 상수도 물맛이 안 좋아 이 물을 식수로 쓴다며 거듭 조심을 당부한다.

폐교장에 들어앉은 ‘강진칠보도예’를 지나니 오른쪽으로 멀리 바다가 부챗살처럼 펴진다. 고갯마루에 잠두승강장. 도로를 곧게 펴는 공사가 한창이다.

지도대로라면 여기 어디쯤에서 언덕 아래쪽으로 내려가야 잠두, 덕촌을 거쳐 덕촌방조제로 올라서겠는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보니 파헤쳐진 흙더미와 작업 중인 포클레인에 가려 언덕 내려가는 길을 놓쳤다.

대덕읍 쪽으로 양하마을 앞까지 갔다가 아무래도 길이 이상해 삼밭에서 일하는 아저씨에게 물으니 되돌아 저 포클레인 있는 데로 올라가란다. 헛걸음질을 했구나. 터벅터벅 걷는 길에 헛걸음처럼 힘 빠지는 일이 없다.

출발하면서 마량에서도 그랬고, 오늘은 헛걸음질의 날인가. 헛걸음을 해도 내 만보계 수치는 헛걸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량에서, 내가 강진에서 마량까지 걸은 거리가 28㎞라고 했더니 마량사람들은 25㎞ 남짓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다 맞다. 내 거리에는 오늘 같은 헛걸음,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거리까지 포함돼 있으니 내 거리가 지도 거리보다 조금 더 나온다.

굽이굽이 도로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 포클레인 작업장에 가려진 길을 찾아내 잠두마을로 내려선다.

덕촌방조제에 올라서니 갯바람이 시원하다. 밀물 때인지 제방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힘차다. 쉬어가자. 제방 위 원두막 같은 곳에 걸터앉는다. 제방 아래 ‘강수원/최길자’ 부부 문패가 붙은 외딴집이 있다. 인기척은 없고 긴 끈에 매인 강아지가 마당을 오가며 힐끔거린다.

심심하겠다. 새참으로 꺼낸 빵 한 조각을 던졌는데 엉뚱한 데에 떨어진다. 강아지가 빵조각을 향해 용을 쓰지만 줄이 제법 긴데도 닿지 않는다. 다시 빵을 뜯어 던진다. 이번에는 정통으로 몸에 맞고 떨어진 것을 한 입에 먹어치운다. 맛있냐?

나도 빵조각과 밀감으로 새참을 하고 덕촌방조제를 건넌다. 덕촌방조제 역시 허리 넘게 자란 잡풀이 뒤엉켜 길을 막지만, 경운기라도 지나갔는지 바퀴자국이 있어 다행이다.

덕촌방조제는 10리 길이다. 제방을 건너면 삭금. 안쪽에 보이는 마을이 안삭금이고 해변을 따라 모퉁이를 돌면 이진목(삭금)이다. 점심때가 되었다. 포구에 있던 청년이 안삭금에는 식당이 없으니 이진목으로 가라고 한다.

삭금횟집. 간단히 요기할 게 있느냐니까, 안사람이 회진 미장원에 갔으니 5분만 기다리면 온다며 방으로 안내한다. 방안에 한 남자가 누워 있다가 “어어 깜박 한 숨 했네”하며 몸을 일으킨다.

목포 새청호시장내 청호수산 양승천 사장이다. 전어를 사러 왔다고 한다. 목포에도 많은데 여기까지 왔느냐니까, 여기 것이 씨알이 굵고 이 집 주인이 아침마다 직접 잡기 때문에 싱싱해 단골로 온다고.

이것저것 내 여행이야기를 물으며 지도를 살피던 양 사장이 손불 일공구를 가리키며 “어, 여기도 지나왔어요?” 하며, 자기 고향이 손불이라고 반기면서도 세발낙지는 일공구가 최고인데 손님 관리를 잘못 한다고 혀를 찬다.

양 사장이 “이집 물회 한 번 자셔보지 그러요?” 권한다. 3~4인분에 2만원, 2만5천 원이라는데 혼자라 안 되겠다. 장흥 물회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이 집 메뉴에 없는, 나를 위해 특별히 차린 5천 원짜리 백반상을 받는다. 전어속젓이 맛있다.

상머리에 앉아 내 여행길을 묻던 양 사장이, 자기도 개인택시가 나오면 마누라와 한 3개월 전국 관광지 일주를 할 생각이었는데 개인택시가 안 돼 작파했다고 아쉬워한다.

“그나저나 몇 날 며칠 하루내 혼자 걸으면 지루하고 심심하지 않소?”

“이렇게 걸으니 양 사장 같은 분도 만나고… 뭐가 지루해요? 사막을 걷는 것도 아닌데”

2002년 봄 프랑스 파리지하철공사에서 공모한 콩쿠르에 당선된 ‘사막’이라는 시가 있다.

‘그 사막에서/그는 너무나 외로워/때로는 뒷걸음질로/걷는다/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사막에 드리운 ‘그’의 실루엣이 좋아 기억에 남은 시인데, 그러나 내가 걷는 전남서남해안은 무채의 사막이 아니다.

파도가 있고 바람이 있고 가슴을 적시는 갯냄새, 흙냄새가 있고 산과 들이 있고 사람이 있고 …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길, 보이고 느끼는 모든 것들과 동무하는 길에 지루하고 심심할 새가 어디 있는가.

“허긴 그러것소. 참 좋소”

삭금횟집 주인 박형길씨가 걸쭉하게 추임새를 넣는다.

전 무등일보 편집인 주필 http://blog.naver.com/namdo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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