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2007.08.14/김익희 기자





우리나라 옛집들은 자연 환경을 최대한 살려 지어졌다.
계절의 온도 변화와 일조량을 따져 터와 방향을 잡았다.
심지어 지붕의 각도와 높낮이도 자연을 고려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기와집은 선조들의 자연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와는 해마다 갈아야 하는 볏짚 등에 비하면 아주 튼튼하고 멋있는 건축 재료다.

기와를 지붕에 얹은 한옥은 정성을 들인 만큼 수명이 길고 아름답다.
기와집을 짓는데는 많은 경제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궁궐과 관청, 상류계층의 저택, 신앙 처인 사당과 사찰, 서원, 향교 등에 국한돼 사용됐다.
이처럼 권위와 부의 상징이었던 기와는 지붕의 중요한 재료가 될 뿐 아니라 모든 건물의 마감 재료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 처음 기와를 사용한 것은 중국 한무제(漢武帝)가 한사군(한무제가 BC108년에 위만조선을 없애고 설치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의 네군)을 설치한 기원전 1세기경으로 추측된다.
이 때를 전후해 한반도 북부지방에 나무로 만든 기와집이 등장한 것이다.

“흙일하는 사람이 부자는 못 돼도 한때는 괜찮았어요. 양철 벗기고 너도나도 기와를 올릴때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전남 장흥에서 이제는 우리나라 안에서 하나뿐인 기와막을 짓고 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1호 제와장 한형준(80) 선생.
그는 전통 조선기와 가마에 불을 지피며 그의 호시절을 돌이켜본다.
세칸짜리 홀집지붕을 덮는데 드는 기와는 무려 4천장.
너도나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올릴때면 한 선생 혼자 수만장씩 구워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으로 스레트지붕이 판을 치고 윤이 나는 기계식 기와에 시멘트 기와까지 득세하면서 한 선생의 기왓장은 볼품없는 구닥다리로 전락해 갔다.
그래도 그는 “전통 기와는 매끈한 양기와가 따라오지 못할 질박하고도 은근한 멋이 있다”며 주문을 해주는 이가 있기에 기와를 버릴수 없었다고 한다.
한 선생은 14살이던 1941년 전남 보성군 한문리에서 이모부 최길수씨로부터 처음 기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 선생은 이모부 밑에서 조수로 들어가 품삯을 대신하고 먹고 자면서 일을 배웠는데, 처음에는 주로 불을 때는 일의 시중을 들거나 흙을 이기는 고된 작업만 도맡아 했다.

그러던 중 해방을 맞이하고 이모부가 봇짐을 싸면서 “이까짓 기와막 같은 것이야 비만 안 들이칠 지붕 하나만 씌우면 되는 것인데 어디 간들 초막 하나 못 짓겠냐”고 함께 떠나자고해서 지금의 모령리를 찾아오게 됐다.
‘안양전통한와공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기와공장도 그 당시 공장장이었던 고윤석씨와 이모부인 최길수씨가 만든 것이고 한 선생은 이곳에서 66년 세월을 기와만 구우면서 살아 왔다.

그는 현재까지 오직 기와 만들기에만 몰두한 제와장으로 전통적인 기와제작과 가마 축조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조선기와를 생산하는 기와막은 10여개소로 알려져지고 있으나 전통적인 제와시설과 제와 기법으로 기와를 생산하는 제와장은 유일하게 한 선생 뿐이라고 한다.

그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이곳에서 그 제작기법과 전공정을 익힌 장인으로 현재 주문 생산만을 하고 있다.
전통방식 그대로 기와를 만든다고 해서 지난 8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1호가 됐다.

기와의 흙은 점토질과 모래가 적당히 섞인 논바닥의 흙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가을 들판에서 추수가 끝나면 먼저 흙을 찾아 나선다.
흙을 떠낸 논에는 이모작으로 보리를 갈수 없기 때문에 보리 세를 주고 산다.
논흙은 먼저 위층을 걷어내고 그 밑에 있는 좋은 흙만 파내는데, 보통 흙 색깔이 검거나 누른색을 띠고 있어야 상품이다.

검은 흙은 모래가 섞이지 않아 기와를 만들면 강도가 높고 누런 흙은 모래가 섞여서 약하긴 해도 기와의 수축을 조정한다.
가을에 준비한 흙은 겨울동안 쌓아 둔 뒤 날이 풀리면 작업을 시작하는데 먼저 구덩이를 파낸 흙에 물을 부리고 하룻밤을 재운다음 흙일을 한다.
이것을 흙을 숙성시킨다고 하는데 흙을 숙성시켜야 흙일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천년을 견디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조선기와는 얼어 터지거나 눈이나 빗물에 들지 않는다.
눈이나 비가 내리면 물기를 흠뻑 머금었다가 날이 개이면 증발시키는 자연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기력이 달려 흙을 방망이로 두드리는 일조차 힘들지만, 자신의 솜씨를 알아주는 세상 사람들이 있기에 육신을 움직일 수 있을때까지 기와를 만들겠노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지금은 도자기를 전공하다 흙을 연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윤청훈(33)씨가 고향인 부산을 떠나 한 선생에게 8년째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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