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2007.7. 31/ 특별취재반




예로부터 어른들의 손놀이개감으로 인기를 끌었던 호도. 대보름날 한해 종기나 부스럼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며 땅콩과 함께 즐겨 까먹었던 호도가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 되고 있다.

이런 호도가 최근 대도시 백화점 등지에서 몇 만원도 아니고 몇 백만원이나 되는 금값에 팔리고 있다.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호도는 탐진강 맑은 물과 득량만의 청정 해풍을 받아 자란 장흥의 귀족호도로 명품대접을 받고 있다.

이런 장흥 귀족호도를 지역특산품으로 상품화해 널리 알린 사람이 있어 화제다.

장흥읍 향양리에 귀족호도 박물관이라는 이색적인 박물관을 건립, 귀족호도 품평회 등을 통해 호도 알리기에 나서고 있는 김재원(50) 관장이 그 주인공이다.

장흥군 부산면에서 1남 6녀중 외아들로 태어난 김 관장은 어려운 유년기 시절을 보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찌져지게 가난한 생활을 했다. 1977년 장흥고를 졸업하고 충남 예산 농업전문대학(지금의 충남산업과학대학)에 입학한다. 농업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실습, 흙에 대해 의미를 깨닫기 위해 그리고 독립심을 기르기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예산농업전문대를 선택했다.

당시 호남유일의 농과대학인 전남대 농과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되지도 안됐지만 그 보다는 2년제 농업전문대학이 충분히 기술도 연마할 수 있고 빠른 시일내에 현장에 투입할 수 있기에 선택했다.

당시에는 초급대학 학력도 좋은 대우를 받던 시기였다. 이듬해 평택 군청 농업직과 국가직인 농촌지도직 두 곳의 공무원에 합격했다. 장래 희망을 고려해 농촌지도직을 선택했다.

대학 졸업한 뒤 수리조합(지금 한국농촌공사)에서 물세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고 요청이 왔고 장흥농협에서도 특채 의뢰가 왔으나 다 포기하고 농촌지도소 근무를 시작했다.

원광대 편입에도 합격했으나 당시 입학금 135만원이 없어 포기했다. 소 한마리 값이 35만원이었으니 4마리를 팔아야 입학금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뜻을 접고 1979년 조치원(지금 연기군) 농촌지도소에서 첫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 김 관장이 22살로 농촌지도소 모든 일이 재미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했던 지 병충해가 인근 군에서 발생하면 다른 군에 통보해 주는 통보기를 군경계 자리에 꽂아놓았는데 인근 천안과 대덕군까지 갔다가 오기도 했다.

1년간 농촌지도사 역할을 하다 군에 입대했다. 운이 좋았던 지 행정하사로 차출됐다.

남한산성 인근에 육군 문무대에서 교육을 받고 1군단 사령부 의무참모부에서 행정하사관으로 근무했다.

이곳에서 대학 행정학과를 입학한 것처럼 문서관리, 차트, 타자, 글씨, 의전, 각종 서식 등을 통달했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역량을 연마할 수 있어서 군 생활은 김 관장이 공직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1년8개월만에 제대를 했다. 외아들이기에 부모가 60세 이상이면 의가사제대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농촌지도소에 복직하려면 30일 이내에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데 김 관장은 다른 길을 모색하다 30일을 다 채우고 부모님의 소원대로 공직생활에 다시 복직했다.

예산서 학교를 다녔다고 해서 예산군 농촌지도소로 발령나 공직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농업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김 관장은 속으로 부모가 살아계시는 동안만 공직생활에 전념하자고 다짐했다. 20년 이상 공직에 있어야만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점과 어느 한 분야에서 20년 정도는 해야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20년 뒤에는 나이가 42살이 되는데 그때가 되면 인생의 진로 특히 노후의 진로에 대해 한번쯤 고민하고 필요하다면 직장이나 직업을 옮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 관장은 공직생활 마감을 1999년으로 잡고 20년간 공직생활에 머무르겠다고 다짐했다.

장관상, 도지사 상을 각각 2회씩 수상하는 11번의 표창을 받았다. 20년 공직생활중 2년마다 한번씩 수상한 셈이다.

85년 장흥으로 왔다. 부모가 나이를 많이 먹었고 장흥에서 봉사하고 싶어 이동했다.

예산에서 장흥으로 이동하는데 당시 공무원 시험보다 어려웠다. 당시에는 전라도 출신의 공무원이 전국 어디에서나 넘쳐나 전라도로 오려는 공무원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로 오기 위해서는 170대 1이라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가능했다.

귀향을 결심한 김 관장은 기다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 귀향 이유를 적은 종이를 가지고 광주에 있는 농촌진흥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원장과 만나 귀향 이유를 설명했다.

나이드신 부모님 등의 이유를 주장하는 다른 사람과 달리 김 관장은 호남의 농업발전과 젊음을 바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김 관장의 말에 감동을 받은 당시 진흥원 원장이 일주일만에 발령을 내줬다.

언젠가는 그만둘 직장이라는 생각에 나태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열심히 일했다. 방송대에 진학해 농축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지도소에서의 주 업무는 인력관리, 4H로 농촌지도자 양성이었다. 89년 장흥에서는 처음으로 해외연수도 다녀왔다.

90년부터는 농업기술개발, 원예, 과수분야에 투입돼 근무했다. 96년에는 순천대 대학원에 진학, 농업교육을 전공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실력배양을 위해서다. 농사꾼도 동등하게 대접을 받고 남에게 천대받기 싫어서다.

대학원에서 식물응용심리학을 공부했는데 식물을 이용해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는 분야였다. 지금의 원예치료사 역할이다. 식물을 보면서 상대방의 고독과 생각을 이해하고 독파하는 것이다.

김 관장의 철학은 '사람은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가을철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은 아름답게 물들었기 때문으로 사람도 마찬가지로 늙어서 아름답게 물들어가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노력없이는 아름답지 못한다. 저절도 늙어가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고 푸석푸석한 나뭇잎 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풍으로 되고자 노력하기 위해서 부단히 움직이고 고민한다는 것이다.

1999년 드디어 농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고비마다 뜻하지 않은 행운으로 순탄한 생활을 이어오던 김 관장은 공직생활 마지막도 행운을 기회를 잡게 된다.

공직생활이라는 것이 명예퇴직을 위해서는 정년퇴임 5년 이내에만 가능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공직생활에 불어닥친 구조조정 여파가 김 관장에게는 오히려 득이 됐다.

사표를 쓰고 싶어도 자격이 되지 않았던 김 관장은 99년3월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당시 과장과 소장이 나가서 뭘 할 것이냐 물어보며 명퇴를 반대했다.

97년 계장으로 승진했던 김 관장은 과장과 소장의 반대로 3개월 동안 사표가 수리되지 않다 6월말 명예퇴직을 하게 된다.

김 관장은 공직에 있던 95년부터 부모님의 재산 등을 처분하기 시작하며 박물관 건립을 준비했다.

명예퇴직을 한 뒤 99년 하반기에 순천대 평생교육원에 들어가서 풍수지리학을 공부했다.

박물관 자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2000년 초에 지금 박물관 자리에 터를 잡았다.

당시 장흥에 있던 남도대학에서 강의요청이 들어왔다. 지역발전을 위해 강단에 서 2년 동안 실습위주로 원예, 과수, 조경 등 3과목을 강의했다.

강의를 하면서 박물관 건립에 착수해 1년여만에 완공했다.


장흥읍 앞 들녁 1천600평 부지에 건립된 귀족호도 박물관은 1층은 전시실로 2층은 김 관장의 생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층 60여평의 전시실은 각종 귀족호도와 일반 호도·추자·가래를 호도나무로 만든 가구 등과 함께 전시 중이다.

옥외의 육종실에는 모양이 조금씩 다른 열매가 맺히는 10여 그루의 귀족호도나무가 있다.

박물관 앞 뜰에는 볼거리를 다양화하기 위해 화분에서 키운 차나무와 소나무 분재 등의 전시판매장도 마련됐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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