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곡이 적을 방어 하면서 보여준 임기응변은 실로 기묘하였다
이순신-반곡을 종사관으로 스카웃, 둔전 경작을 맡겨 성공했다

■‘반곡의 난중일기에 제함’
독서(讀書)를 하는 데는 모두 방법이 있다. 대체로 세상에 도움이 없는 책은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예사롭게 읽어도 되지만, 만약 백성이나 나라에 도움이 있는 책이면 문단마다 이해하고 구절마다 탐구해 가면서 읽어야 하며, 오창(午?)에 졸음을 쫓는 방패로 삼기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반곡(盤谷)이 이 책을 만든 것은 어찌 겨우 그 고생한 것이나 설명하고 그 공로만을 드러내어 그 자손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겠는가. 이는 국가에 경계를 제시하고 후세에 귀감을 남기려고 함일 것이니, 이 《난중일기》를 읽는 자는 마땅히 그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서애(西厓, 柳成龍의 호)의 《징비록(懲毖錄)》과 백사(百沙. 李恒福의 호)의 《임진록(壬辰錄)》은 상세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두 상공(相公)은 모두 조정의 대신으로서 혹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고 서쪽으로 나가 진중(陣中)에서 전략을 짜냈고, 혹은 왕명을 받들고 남으로 내려와서 문서상으로 공로를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온 나라의 대세(大勢)를 논평하고 팔도의 많은 기무(機務)를 조정함에 있어서는 그 업적이 위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고기도 놀라고 산짐승도 도망간 상태라든가 비바람을 맞으며 들에서 밥해 먹고 지새우는 고초에 대해서는, 생동감 있게 기록한 이 기록만은 못하다. 그것뿐이 아니다. 벼슬이 낮으면 비록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함정 속으로 몰아넣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다만 머리를 숙이고 받들어 시행하면서 그 실패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거리가 멀면 비록 가슴에 품은 지식이 천지(天地)를 돌리고 일월(日月)을 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입을 봉하고 할 말을 못하고서 그 분수를 지킬 뿐이니, 이를 '유분(幽憤)'이라고 한다. '유분'이 있는 자는 당세에는 쓰이지 못하고 오로지 그 포부를 필묵(筆墨)으로 발설하여 후세에 시행되기를 바랄 뿐인데, 이를 '고심(苦心)'이라고 한다. 소인(小人)의 아첨하는 행위를 모르면 나라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고, 지사(志士)의 유분과 고심을 모르면 역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이니, 대체로 이《난중일기》를 읽는 사람은 먼저 그 유분과 고심에 대해서 눈을 밝게 떠야만 아마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은…중략…조정에서도 이순신(李舜臣)을 발탁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내려보내는 등 기미가 이미 발생하였고 화근이 이미 드러났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돌 하나라도 쌓고 창 하나라도 만들어서 성문에 침입할 왜적에 대한 대비는 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의 일을 나는 들었다. 변방의 사건을 말하면 허풍을 떤다고 하고 군사 일을 말하면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하여, 주사(籌司 비변사(備邊司)의 별칭)의 좌석에서는 당황한 얼굴빛으로 서로 돌아보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도 밖에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는 태평하다고 하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귀를 대고 소곤거리지 아니한 적이 없으면서도 밖에 나와 손님에게는 걱정이 없다고 하였고, 지방의 관리들도 그 영향을 받고 그 뜻에 맞추어 날마다 음악이나 연주하며 기생과 즐기면서,"이것이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법이다."하며, 궁벽한 곳에서 노동일을 하는 사람들도 이미 귀신처럼 당시의 정세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반곡공(盤谷公)은 그러한 때를 당하여, 그의 뛰어난 재능으로도 역시 돌 하나라도 쌓고 창 하나라도 만들어서 눈앞에 닥친 화액에 대비할 수 없었던 것은 진실로 온 나라에서 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선산(善山 정경달(丁景達)이 당시에 선산 군수로 있었음)에서만 하라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가 군사를 징발할 때는 사운(四運)의 법을 설치하고, 적을 방어함에 있어서는 사채(四寨)의 장수를 두는 등 그 임기응변은 그와 같이 기묘(奇妙)하였으면서도 임진왜란이 나던 4월 15일 이전에는 손가락 하나 못 놀리고 털 하나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은 위에서 싫어하는 것을 아래에서 감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략
-다산시문집 제14권/제(題)

■“정경달은 명망있는 문관”
<…(상략)…상(선조임금)이 이르기를,
“이순신의 호령이 수령에게 시행되지 않고, 여러 장수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다고 하니, 명망이 있는 문관으로 종사관을 삼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유성룡(柳成龍. 영의정)이 아뢰기를, “전 부사(府使) 정경달(丁景達)이 내려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망이 있는 문관을 정하여 보내야 열읍(列邑)을 호령할 수 있을 것이며 군중(軍中)에 외람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를 꺼려 진정이 될 것이다. 병판(兵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병조판서 심충겸(沈忠謙)이 아뢰기를, “이 계책이 매우 타당합니다.” 하였다. ">
-<선조실록> 원전 22 집 297면
이는 선조실록에 나오는 한 대목으로, 반곡 정경달이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선임되어 해전에 투입됐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당시 이순신 휘하에서 종사관의 역할과 그 중요성 즉, ‘이순신 장군의 명령이 수령에게 시행되지 않고,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합하지 않는 상황’이어서 ‘종사관으로 하여금 열읍(列邑)을 호령할 수 있고 군중(軍中)에 외람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를(종사관) 꺼려 진정이 될 수 있게 하는 역할’로서 종사관이 필요했으며, 그러한 대임을 맡기 위해서는 ‘명망있는 문관’이 필요했고, 그 임무에 적합한 사람으로 정경달을 선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당시 위 기록만으로도 이미 정경달은 조정에서 ‘명망있는 문관’으로 평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순신은, 장흥사람으로 문관인 정경달을 종사관으로 삼겠다고 선조에게 장계를 올린다. 즉 이순신은 식량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당시의 상황에서, 병참확보나 군사들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있는 문관으로 정경달을 지목하여, 종사관의 벼슬을 하사해 달라고 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이순신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李忠武公全書卷之三//狀啓二)
“문신으로 종사관을 내려 주실 것을 청하옵나이다.
신은 이미 통제사의 임무를 겸하여 삼도의 수병장관이 모두 부하에 있습니다. (배, 무기 등을) 제조하는 일을 점검하여 바로 잡음이 한두 번에 그친 것이 아니었으나, 신(이순신)이 먼 바다에 나와 있으니 문(文)은 도(道)에서 떠나 멀어지고 병무는 매우 많아 앞으로 나아가 아직 (배를 제조하는 일을)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원수 순찰사로 주둔한 곳으로 가 의논하여 결정하지만 (식량을) 빼앗는 자가 많고, 서로 동떨어져 거리가 멀고, 혹은 아직도 기한에 미치지 못하고, 일마다 방도에서 어그러져 극히 염려스럽나이다. 신의 허망한 뜻으로는, 문관의 일원 중에 순변사의 예에 의하여 종사관이라 호칭하여 왕래하며 의논하고 상통하면서 연해 여러 고을에 소속시켜 순검토록 조치하고 수부를 지원하여 식량이 연속으로 고르게 들어오게되면 이것이 장래에 큰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또한 만의 하나라도 구제하고자 여러 섬의 목장과 묵고있는 넓은 땅은 개간하여 경작할 것이니, 이 또한 자세히 살펴 조사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망령되게 감히 품수를 헤아려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조정이 십분 헤아려 잘 생각하여 주옵서소! 만약 일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장흥에 사는 전(前) 부사 정경달이 지금 본가에 있다고 하니, 특명으로 벼슬을 내려 주시옵서소!
((請以文臣差從事官狀//臣旣兼統制之任. 三道水兵將官. 皆在部下. 檢飭措制之事. 非止一再. 而臣在嶺海. 文移遠道. 許多兵務. 진未擧行. 都元帥,巡察使所駐處. 就議定奪者亦多有之. 而相距隔遠. 或未及期限. 事事乖方. 爲可慮. 臣之妄意. 文官一員. 依巡邊例. 從事官稱號. 往來通議. 所屬沿海列邑巡檢措置. 射格軍粮連續調入. 則將來大事. 庶濟萬一. 諸島牧場閑曠之地耕墾處. 亦有審檢之事. 故妄料敢稟. 伏願朝廷十分商量. 若於事體無妨. 則長興居前府使丁景達. 時在本家云. 特命差下.-번역 이세규)

■현대사가들,”유능한 병참전문가”
그렇다면, 근현대사에서 사가들은 정경달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근래들어 경영자와 비지니스맨들을 중심으로 이순신의 리더십 배우기 열풍이 거세다. 이순신은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 다음의 역사인물 검색 순위 1위, 교보문고와 예스24등 인터넷 서점 키워드 검색 1위를 차지할 정도다. 뛰어난 장군에서 최고의 전략 경영자로 다시 조명 받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 연구의 전문가들도 한결같이 이순신이 최고의 경영자로, 리더십이 뛰어난 장수로 손색이 없었던 것은 그가 분야별로 출중한 전문가를 수하로 거느렸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순신, 그는 그 막하에 뛰어난 전문가(참모)들을 거느렸기 때문에 23전 23승이나 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 뛰어난 수하의 한 사람으로 당연히 정경달도 꼽히고 있다.
<월간조선>(2003년 09월호)에서, 월간조선 편집위원인 정순태씨는 “난중일기의 현장을 가다(上)-이순신의 상승(常勝) 뒤에 숨은 절대 고독"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석식 후에는 이민웅(李敏雄) 해사교수로부터 강연 ‘이순신과 리더십’을 들었다. 현역 해군소령인 이교수는 2002년 논문 ‘임진왜란과 해전사(海戰史)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학자이다. 필자의 면담 요청에 그는 “마침 당직근무이니 밤 8시30분 교수연구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다음은 이교수와의 대담 요지이다.
-이순신은 지장(智將)이죠…‘난중일기와 임진장초(壬辰狀草-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 전쟁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해 놓았다)를 읽어 보면, 이순신은 대단한 지적 능력을 가진 장수인데다가 휘하에 유능한 지휘관과 참모를 두었어요. 용장 녹도만호 정운(鄭運), 경상도 물길에 능통한 광양현감 어염담(魚泳潭), 순천부사 권준(權俊),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사도첨사 김완(金浣)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활용했거든요. 이순신의 둔전 경영과 관련해 주목할 인물은 정경달(丁景達)입니다. 선산부사 재직시 능력을 발휘한 그를 이순신은 종사관으로 스카우트하여 둔전의 경작을 맡겨 성공을 거두었어요. 이순신으로선 제일류 병참참모를 곁에 둔 겁니다’>
임진왜란과 이순신의 전문가인 이민웅교수도 정경달을 제일류 병참참모로 평가한 것이다.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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