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안양면 억불사 자락에 위치한 성암선생의 묘소에서 독립투사 성암 김재계선생 65주기 추모식이 천도교 중앙 김동환 교령과 김인규 군수, 군의원, 유가족등 15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다.
김인규 군수는 추모사를 기하여 “선생의 거룩한 뜻을 기리고자 함께 해 주신 모든분들게 감사드리고 그 시절 선생님의 고향은 덕도 섬이었으며 교통도 원활하지 못하고 거의 구보로 다시는 시절인데도 덕도에서 장흥, 장흥에서 서울까지 독립을 위해 몸바친 선생의 민족정신을 우리 다 같이 받들고 유가족 여러분과 함께 자부심을 갖고 살아 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동환 천도교 교령은 “2년전에 선생의 묘전 앞에 왔는데 또다시 뵙게 되어 기쁘고 바쁜 일정인데도 또다시 장흥을 찾게 된 것은 농민운동 항일운동과 애국애족 민족의 사랑 도의의 사랑이 살아 숨쉬는 고을이기 때문이며 장흥 군민은 긍지를 갖고 살아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성암 김재계선생은 회진면 신상에서 김규현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힌 뒤 15세때 천도교에 입문하였고 17세때 손병휘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으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홀로 3일간 단식을 한 뒤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6년 장흥에 천도교당이 개설되자 천도교인이 되어 활동하면서 천도교 장흥교구의 발전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고 1919년 3ㆍ1운동 당시 독립운동 성금을 오백원을 모금하여 거사를 지원하는 한편 그해 3월15일 김재만, 황생주, 황업주등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장흥의 3ㆍ1운동을 주도하였고 이로인해 3년간 옥고를 치루웠다.

이후에도 천도교 선교와 아울러 사회교화운동에 신명을 바치고 1932년 전남 대표로 천도교 중앙본부와 인연을 맺어 천도교의 재정을 관장하는 일을 맡으면서 천도교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
1938년 멸왜기도사건의 주도자로 모진 고문과 옥고로 인해 1942년 서울에서 52세의 나이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친 분이다.

민족정신 민중교화와 민권의 신장에 헌신함은 물론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거룩한 분이다.
현 명덕초등학교 당시(양영학교)을 설립하였으며 그 자손들은 현재 회진면 대리에서 대가를 이루고 있다.
/김광남기자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